<Straight Outta HEIDELBERG>: "잼 시대"에서 "랩 시대"로

2024. 8. 9. 23:00Berlin

1988년 8월 8일에 발매된 N.W.A의 전설적인 1집, <Straight Outta Compton> 커버 사진.

 

 어제, 2024년 8월 8일은 1980년대 힙합의 상징이 된 그룹이자, 경찰의 폭력성을 다소 선정적인 가사로 비판하는 등, 거친 언어의 "갱스터 랩"으로 서부 해안을 휩쓴 N.W.A의 전설적인 <Straight Outta Compton>이 세상에 나온 지 36년 되는 날이었습니다. 캘리포니아의 악명 높은 빈민 거주지, 콤프턴에서 이지-E의 루슬리즈 레코즈에 뭉친, 각자 개성 넘치는 구성원들의 이 위대한 팀은 바로 그 첫 번째 정규 앨범과 함께 정점에 이르지만, 이듬해, 계약 관련 문제로 갈등을 빚은 아이스 큐브가 탈퇴, 밖에서 그룹에 대해 날이 선 공격을 퍼부으며, 그 운명이 흔들리기 시작했고, 1991년, 닥터 드레마저 이지-E와 매니저, 제리 헬러에게 불만을 품고 독자 활동(그가 슈그 나이트 등과 손잡고 차린 레이블이 데스 로우 레코즈입니다)에 나서면서, 결국, 역사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이후, 뉴욕의 배드 보이 레코즈와 로스앤젤레스의 데스 로우 레코즈를 중심으로 동·서부 해안 힙합 진영 사이의 격한 전쟁이 벌어진 시대를 지나, "지난 세기의 여파"를 향수하게 하는 닥터 드레의 애프터매스 엔터테인먼트, JAY-Z의 라커펠라 레코즈, 락 네이션 등에서 에미넴과 50 센트, 카녜이 웨스트, 제이 콜, 켄드릭 라마 등, 걸출한 예술가가 발굴됐고, 트래비스 스콧과 퓨처, 미고스, 영 서그 등의 연이은 성공으로, 미국 남부의 힙합, 강렬하고 웅장한 전자악기 연주와 빠르게 박자를 쪼개는 하이햇의 사용 등으로 특징지어지는 트랩, 그 위에 얹는, 특유의 웅얼거리는 듯한, 부정확한 발음의 멈블 랩 등도 인기를 끕니다.

 인터넷에 익숙한, 전 세계의 소리를 듣고, 여러 창구에 자기 작품을 방출하며 성장한 음악가가 폭발적으로 쏟아지는 시대입니다. 힙합은 그야말로 날개를 달고 국경을 넘어, 활개 칩니다. 비교적 신생 장르로 분류되는 드릴을 들여다보면, 영국의 갱스터 랩과 융합하여 시장을 키운 UK 드릴이 거꾸로 미국에 전해져, 뉴욕 브루클린의 래퍼들에게 영감을 주기도 했습니다. UK 드릴을 대표하는 센트럴 시(Central Cee)는 소셜 미디어의 힘을 잘 활용할 줄 아는 래퍼 중 하나입니다.

 오랫동안, 그라피티, 비보잉/브레이킹 등과 상호작용을 하며 대중문화의 원동력이 돼 온 힙합은 지난 2017년, R&B와 같이, 마침내, 미국에서 한 해 동안 제일 많이 소비된 음악 장르로 우뚝 섰습니다. 켄드릭 라마의 <DAMN.>이 그해, 에드 시런의 <÷ (Divide)>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이 팔린 앨범이었습니다. 세계적인 음악 축제에 유명 래퍼가 초청되는 일이 이제는 너무나 흔하며, 캐나다, 토론토 출신의 드레이크는 상업적인 면에서 2010년대 음악계를 완전히 지배했습니다. 그라피티는 미술관에 걸리고 경매에 부쳐지고, 곧, 파리, 콩코르드 광장에서는 올림픽 경기에 세계적인 브레이커들이 나섭니다. 단, 팝, 컨트리 등, 다른 장르의 반격으로 2020년대 들어서는 음악 시장에서 힙합의 강세가 한풀 꺾였고, "디디 게이트" 등으로 그 진영에 대한 사회적인 시선도 곱지만은 않습니다. 그래서, 올봄을 뜨겁게 달구며 다시금 힙합을 화제의 중심으로 끌어온 켄드릭 라마와 드레이크의 디스전 이후, 앞으로 진행 방향이 매우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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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스트코스트힙합의 슈퍼볼 하프타임쇼 입성

열두 시간 뒤면, 전미 최고 스포츠 경기의 막이 오릅니다. 슈퍼볼 LVI, 제56회 슈퍼볼에 신시내티 벵골스와 로스앤젤레스 램스가 빈스 롬바르디 트로피를 다툽니다. 불과 이 년 전, 전체 최하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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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델베르크는 초기 독일 힙합의 중심지였습니다. 지난해, UNESCO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기도 한 이곳의 힙합은 독일 내 다른 어느 도시의 힙합보다 전체성이 뛰어나다고 평가받습니다. [ⓒ jgseins__jh]

 

 독일에서도 힙합은 지난 50년 동안 오락 산업에서 최고의, 제일 중요한 문화적 유입으로 평가받습니다. 범죄 행위에 취약한 청소년이 전국에 이름을 알리고 인기를 얻어, 큰 축제의 무대에 서는 일을 그 덕에 소망할 수 있고, 또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지난달에 독일을 찾은 트래비스 스콧이 함부르크와 쾰른, 프랑크푸르트암마인 등지에서 보여 주었듯이, 오늘날, 래퍼들은 그들의 음악으로 대형 경기장을 가득 메우고, 자기 이름을 걸고 기획 상품을 제작해서 판매하며, 신생 브랜드를 홍보합니다.

 51년 전, 뉴욕 브롱크스에서 탄생한 힙합 음악은 1980년대 초, 독일로 향하는 길에 올랐습니다. 1979년, 더 슈거힐 갱(The Sugarhill Gang)의 <Rapper's Delight>가 라디오를 타고 전미 흥행에 성공하고, 힙합을 전 세계에 알린 그즈음입니다. 독일이 제2차 세계 대전에 패하고 둘로 나뉜 뒤, 미군이 주둔하면서부터 미국에서 유행하는 문화가 서독 사회에 강하게 뿌리내리기 시작했는데, 이러한 현상은 특히, 젊은 층에서 두드러져 나타났습니다. 1983년에 서독 안방으로 처음 송출된 영화, <Wild Style>이나, <Breakin'>, <Beat Street> 등이 <Rapper's Delight>와 같이, "1세대"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고는 하지만, 사실, 이 새로운 흐름을 맞아, 그에 견줄 "독일적인 비교군"을 찾을 수 없었던 그 처음 십 년에 관해서는 많은 사실이, 여전히, 비밀에 부쳐져 있습니다. 레코드판을 찾아서 듣기도 힘들고, 잡지를 찾아서 훑어보기도 어려우며, 당시 시대상을 보여 주는 영상을 구하기도 하늘의 별 따기입니다. "1세대 독일 힙합"은 그들의 아지트, 브레이커들의 연습장, 경연이 열리고, 관심사를 공유하는 이들이 모여서 각자 발상을 나누던 청소년 수련관의 북적거리는 혼돈 속에서 서서히 그 작은 시장을 키워 갔습니다. 남아 있는 기록물이 원체 한정적이라, 이때의 흥미진진한 역사를 재구성하려면, 그 시기를 지나온 사람들, 그 문화가 싹트는 중심에 있었던 일부의 증언에 대거 의존해야 합니다. 단, 초기에 독일에서 힙합이 전파되는 과정 가운데, 집 대문을 나서면, "작은 미국"이 펼쳐져 있었던 도시, 하이델베르크가 제법 큰 비중을 차지한 점은 분명합니다. 하이델베르크에는 1948년부터 2013년까지, 유럽에서 활동하는 미국 육군의 거점, 캠벨 기지가 있었습니다. 재즈, 펑크, 블루스, 소울 등, 다른 장르와 함께, 힙합이 들어와, 누군가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독일 힙합의 기원을 다루는 그 어떤 전시나 수집물도 하이델베르크 없이는 존재성을 인정받지 못합니다. 지난해, 유엔교육과학문화기구(United Nations Educational Scientific and Cultural Organization (UNESCO))에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된 하이델베르크 힙합은 독일 내 다른 어느 도시의 힙합보다 전체성이 뛰어나다고 평가받습니다.

 

1980년대 초, 독일에서 브레이킹 열풍을 이끈 두 영화, <Wild Style>(li.)과 <Beat Street>(re.) DVD 표지.

 

 초기, 독일에서 힙합 진영은 브레이킹이 주도했습니다. 그라피티나 디제잉보다도 특별한 도구가 필요 없다는 유리함이 있었고, 이때까지 랩은 영어로 해야 한다는 일종의 강박이 있었던 까닭이기도 합니다. 심지어는 미국에서 들어오는 거의 모든 상품이 금지된 동독에서조차, 영화 <Beat Street>가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Wild Style>이 공개되고 이듬해인 1984년, 곧, <Breakin'>과 <Beat Street>가 세상에 나온 해, 브레이크 댄스 월드컵이 슈투트가르트에서 열렸는데, 6,000명 넘는 비보이가 몰려, 그 인기를 증명했습니다. 빠르게 바람을 타고 선전한 브레이킹 열기는 다만, 1986년을 전후로, 다시 빠르게, 비주류 현상으로 전락하고 말았으니, 그 인기가 유독 급하게, 바짝 타오르고 식어 버린 배경을 완전히 설명하기에는 오늘, 어려움이 따르지만, 힙합 문화의 다른 요소로 다수가 옮겨 갔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주류 문화에서 브레이킹의 실종이 독일에서 힙합과 비보잉의 끝을 의미하지는 않았습니다. 이전까지 이민 배경 어린아이들의 영역 정도로 치부한 청소년 수련관이 힙합 문화가 성장하는 배양기이자, 퍼져 나가는 매개 시설이 됐습니다. 힙합에 열광하던 다양한 계층, 다양한 세력이 이곳에 모여, 지역마다 덩치를 키워 갔습니다. 하이델베르크를 필두로, 함부르크와 기센, 마인츠, 뮌헨 등이 거점으로 역할을 했습니다. 여러 지역에서 탄생한 신(Scene)은 잼 문화(Jam culture)로 발전했는데, 이는 지역 경계를 넘어서 브레이커와 DJ 등이 모두 모여, 경연하고, 각자 연마한 기술을 선보이고, 아이디어를 교환하는 장이었습니다. 구름과 같은 청중을 끌어들이지는 못했지만, 이 경연들은 자기 기량을 뽐내고 싶어서 몸이 근질거리는, 열정 넘치는 참가자로 만원이었습니다. 첫 번째 큰 경연은 1987년, 도르트문트에서 있었습니다. 서독에서 힙합에 빠져 있던 많은 사람이 여기 참가했습니다. 청소년 수련관이 그 발달을 위한 장소를 자주 제공했다는 사실을 기억하면, 매우 역설적으로, 이러한 경연들은 그러나, 태생이 배타적이었습니다. 부모들은 어린 자녀가 도시를 벗어나서, 지역을 벗어나서 며칠씩 힙합 행사에 참여하기를 탐탁지 않게 여겼고, 잦은 여행은 결국, 금전적인 문제로도 이어졌습니다. 시설의 주인이기도 했던 이민 배경의 청소년층에 이러한 문제가 유독 심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미국에서와 같이, 랩이 빠르게 성숙하며, 힙합 문화 전반의 힘이 음악, 그 자체로 기운 1990년대 초, "잼 시대"는 막을 내립니다.

 한편, 아직 베를린을 가로지르는 장벽이 굳건히 서 있던 시기, 아무래도 동독에서는 서쪽에서와 같은 잼 문화가 발달하지 못했지만, 로스토크에서 예르크 프리베노가 조직한 "크레이지 세븐(Crazy Seven)" 등이 보안 당국에 "무해하다."라고 인증받고 활동할 수 있었고, 후에는 힙합에 열광하는 사람들이 모일 기회도 제공됐습니다. 드레스덴 근교의 라데보일에서 1988-1989년, 국가적인 랩 콘테스트가 개최됐습니다. 물론, 이 또한, 서독의 잼 경연과는 성격이 조금 달랐습니다. "일렉트릭 비(Electric B)"로 알려진, 당대, 동독에서 제일 뛰어난 래퍼로 이름을 날린 알렉산더 모라비츠와 그의 조수, 페터 피가스가 주최한 이 경연에 참여하고자 한 래퍼는 청소년 라디오국, DT64(자꾸만 서독에서 넘어오는 콘텐츠가 유행하는 흐름에 위기감을 느낀 동독에서 그에 대항하겠다고 만든 라디오국; 독일 재통일 이후에 새로이 창설된 중부 독일방송(Mitteldeutscher Rundfunk)에 권리가 넘어가며,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습니다)의 주간 힙합 라디오 쇼, "비브라치오넨(Vibrationen)"에 데모 테이프를 보냈고, 그로부터 참가자 명단이 미리 확정됐습니다. 자유롭게 경연에 참여할 수 있는 환경은 아니었지만, 전국에서 수많은 팬이 몰려들어, 실제 행사장 수용 인원보다 많은 수가 라데보일에 운집했습니다.

 

 

1992년, 디 판타스티셴 피어의 모습: 왼쪽부터 "And.Ypsilon" 안드레아스 리케, "Thomas D" 토마스 뒤어, "Michi" 미하엘 베크, "Smudo" 미하엘 슈미트. [ⓒ Imago Images/ Pressefoto Kraufmann & Kraufmann]

 

 독일어로 녹음된 최초의 랩은 90년대의 시작을 알린, 이민 배경 구성원이 모인 그룹, 프레시 파밀레(Fresh Familee)의 <Ahmet Gündüz>라고 전합니다. 튀르키예에서 제일 큰 규모로 제공된, 수백만의 외국인 '초청 노동자(Gastarbeiter*innen)'가 베를린 장벽의 건설로 동독으로부터 피난 행렬이 차단된 뒤, 만성적으로 서독 경제를 괴롭히던 노동력 부족을 완화하는 데 도움을 주었습니다. <Ahmet Gündüz>는 그 초청 노동자의 애환에 관한 곡입니다. 랩을 담당한 타히르 제비크는 라팅엔에서 태어나, 독일어가 유창하지만, 각각 1세대와 2세대의 시선으로 구분된 두 개 막을 전달하려, 전반부에 어딘가 어눌한 독일어를 섞기도 했습니다. 그룹을 두고 1991년, 데트레프 F. 노이퍼트가 제작, 서부 독일방송(Westdeutscher Rundfunk (WDR))이 방영한 <Fresh Familee - Coming from Ratinga>는 첫 번째 독일 힙합 영화로 불리며, 독일에서 본격적인 "랩의 시대"를 열었다고 이야기됩니다.

 프레시 파밀레가 상업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습니다. "새로운 독일식 가사", "새로운 독일의 운율 문화"와 같은 수식어를 양산해서 달고 다니며, "독일 힙합"의 초기 최고봉으로 등극한 그룹은 슈투트가르트의 디 판타스티셴 피어, "판타 피어"(Die Fantastischen Vier (Fanta 4))입니다. 대형 레이블인 포노그람/머큐리(Phonogram/Mercury)와 음반 계약을 프레시 파밀레보다도 먼저 따낸 이들은 1992년 9월 7일에 공개한 <Die da!?!>를 음원 순위에 올리며, 독일어 랩으로 사상 첫 상업적 성공을 거두고, 장르의 대중화에 앞장섰습니다. 이전까지 하위문화 수준에 머물러 있던 힙합이 주류에 탑승하는 순간이었으니, 아직은 "언더그라운드"에서 독자성에 조금 더 취해 있고 싶었던 일부는 판타 피어가 지나치게 음원 성적, 대중성을 겨냥해 만든 곡으로 시장을 석권했다고 힐난하기도 했습니다. 이들의 이러한 비난이 어느 정도 투기심에서 비롯됐다고 할 수 있지만, 디 판타스티셴 피어의 초기 성공 이면에는 무시할 수 없는 위험 요소도 분명, 존재했습니다. 판타 피어는 새로운 음악을 국가적인 정체성과 접목했습니다. 힙합이 특히, 이민 배경의 젊은 층에서 "독일적이지 않은" 문화적 현상으로서 인기를 끌었으므로, 이러한 움직임은 트집이나 시비가 생길 만했습니다. 가사 자체가 문제라고 보기는 어려웠지만, 그 가사가 누구에게 흥미를 불러일으키는지를 보면, 거의 그들과 같은 독일의 중산층 젊은 사람이었습니다. 미하엘 슈미트("Smudo")와 토마스 뒤어("Thomas D")는 <Die da!?!>에서 각자 최근에 만난 여성에 관한 이야기로 말문을 열어, 영화 관람과 낭만적인 외식, 더 많은 데이트를 바란다고 하지만, 이내, 그 비용을 모두 부담하고, 선물 공세까지 펼치려면, 돈이 많이 든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금요일에는 시간을 낼 수 없다던 상대가 바로 그 금요일에 다른 남성과 술집에 들어오는 모습을 화자가 발견, 좌절하며 노래가 끝납니다.

 

1993년, 하이델베르크의 알테 브뤼케 앞에서 <Fremd im eigenen Land> 영상 촬영에 나선 어드밴스드 케미스트리의 모습: 사진 맨 앞줄 중앙, 왼쪽에서부터 링기스트, 토니-L, 토치. [ⓒ Philipp Rothe]

 

 그 초기 주역이 전부 흑인 래퍼인 프랑스에서와는 달리, 독일에서는 금발, 파란 눈의 래퍼들이 상징처럼 떴습니다. 당사자들은 억울할 수도 있지만, 디 판타스티셴 피어는 독일 힙합의 첫 번째 상업적인 성공과 일종의 문화적 국가주의의 탄생, 그 중심에 있었습니다. 힙합 세계에는 빠르게, 갈수록, 인종적인 구분 선이 그어졌고, 이는 자칫, 하나의 장르가 분열하는 듯한 양상을 띠기도 했습니다. 물론, 대개는 외부 시선에 의한 설정으로, 힙합에 열광하던 큰 공동체 안에서는 여전히, 그만한 문제는 없었습니다. 판타 피어는 <Die da!?!>의 성공 이후에도 다양한 시도에 나섰습니다. 네 명의 구성원이 각자 독자 활동으로도 좋은 기운을 이었으며, 과거, "초심"으로 회귀, 영어로 랩을 해서 곡을 내거나, 인기몰이에 성공한 애니메이션, <마다가스카> 연속물에 네 마리 펭귄 목소리 더빙으로 참여하기도 했고, 런던과 파리, 민스크 등지에서 공연하고, <<더 보이스 오브 저머니(The Voice of Germany)>> 코치로도 나섰습니다. 지난 2018년에 발매된 그룹의 열 번째 정규 앨범, <Captain Fantastic>은 판타 피어의 그 어떤 작품보다 시대상을 잘 반영하고 있으며, 사회 비판적인 가사가 많고, 부상하는 대중 영합주의에 대한 저항을 주제로 합니다. 현대의 트랩을 일부 수용하여, 타협도 했습니다. 역시, 적잖이 사랑받은 이 앨범은 판타 피어를 1990년대, 첫 번째 주류 시장에서 성공 직후 따라붙은 인상만으로 평가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한편, 아이티 출신 배경을 가진 토치(Torch), 가나 출신 배경의 링기스트(Linguist), 독일인과 이탈리아인 사이에서 자랐으나, 후에 미군 전투기 조종사로 캠벨 기지에 온 아프리카계 미국인 새아버지를 맞이한 토니-L(Toni-L) 등, 이민 가정 출신들이 뭉친 어드밴스드 케미스트리(Advanced Chemistry)는 <Fremd im eigenen Land>라는 곡으로, 데뷔(주류 시장으로)와 거의 동시에, 인종적인 차별에 반대하는 상징으로 등극했습니다. 사하라 이남의 혈통을 가진 독일인을 지칭하는 말, "아프로도이체(Afrodeutsche)"를 의도적으로 가사에 집어넣었고, 곡을 공개하기 직전(1992년 8월 22일-26일 사이), 로스토크에서 벌어진, 독일 재통일 이후 최악의 외국인 혐오 폭동, 폭도 공격 사건의 짧은 뉴스 음성도 도입부에 삽입했습니다. <Fremd im eigenen Land>는 어드밴스드 케미스트리 구성원들이 독일 사회에서 매일 경험해야 했던 부당한 대우, 모욕에 대한 좌절감을 표현했습니다. 다만, 이들이 "반인종 차별 상징 그룹"이 된 데는 또 한 번, 외부의 과장과 정치적인 강제가 훨씬 크게 작용했습니다. 이들은 하루아침에, 재통일 이후, 세력을 키우던 우익 극단주의에 맞서는 투사가 됐고, 디 판타스티셴 피어와는 다른 가치를 수호하는 대안이 됐습니다. 어느 모로 보나 힙합 장르를 인위적으로 분열시키려는 움직임에 대하여 좋은 완충제가 되기는 글렀습니다.

 

올 초, 80년대 하이델베르크 힙합을 조명하는 북부 독일방송(Norddeutscher Rundfunk (NDR))의 다큐멘터리에 출연한 (왼쪽부터) 코라 E.와 토니-L, 마틴 슈티버. [ⓒ NDR/ David Meister]

 

 한창 디스코 음악이 뉴욕 시내를 휩쓸던 1973년, 무언가 다른 소리를 원한 자메이카계 미국인, 클라이브 캠벨("DJ Kool Herc")이 힙합을 세상에 나오게 한 뒤, 이 새로운 음악은 파티 중 흥을 돋우는 데 주로 쓰였는데, 80년대 들어, 랩이 정치적인 이야기를 전달할 수도 있음이 보였습니다. 1982년, 때로 힙합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곡 중 하나로 거론되는 그랜드마스터 플래시 앤드 더 퓨리어스 파이브(Grandmaster Flash and the Furious Five)의 <The Message>가 뉴욕 빈민 거주지에 만연한 사회 문제들(마약 문제, 흑인들에 대한 백인들의 괄시, 청소년들을 위한 최소한의 환경적인 기대를 충족하지 못하는 사회적인 방치 등)을 고발하며 나타나, 컨셔스 랩이라는 새로운 형태를 제시하면서입니다. 하이델베르크의 어드밴스드 케미스트리는 이민 배경 그룹이라는 그 정체성을 유지한 채, 그들에게 걸린 기대를 수용하고는 1990년대, 독일에서 시민권과 난민법, 기본권 등에 대한 정치적인 담론에 꾸준히 참여했습니다.

 물론, 단순히 컨셔스 랩을 받아들였다는 이유 하나로 그들이 80년대와 90년대 독일 힙합의 선구자 중 하나로 평가받지는 않습니다. 토니-L이 모든 경연에 참여할 만큼, 무리 가운데 제일 활발했다고 증언하는 토치는 <Kapitel 1>에서 자신을 가난과 사회 범죄에서 탈출해, 인제는 힙합의 숨겨진 깊은 뜻을 궁리하는 예술가의 모습으로 그려 냈습니다. 중산층의 젊은 세대가 그와 함께했습니다.

 이즈음, 하이델베르크에서 어드밴스드 케미스트리와 같이 활동한 힙합 예술가로는 마틴과 크리스티안 쌍둥이의 슈티버 트윈스(Stieber Twins), "줄루퀸(Zulu-Queen)"으로도 알려진 코라 E.(Cora E.) 등이 있었습니다. 슈티버 트윈스와 코라 E.는 조금 더 다양한 활동으로 유명했으니, 독일어로 랩을 했을 뿐 아니라, 그라피티 작가와 브레이커로도 알려졌습니다. "마셜 마르(Marshall Mar)"와 "룩수스 크리스(Luxus Chris)"라는 예명을 사용한 쌍둥이는 제작자로 특히, 막대한 영향력을 손에 쥐었으며, 킬에서 자랐지만, 1992년부터 하이델베르크 대학 병원에서 정신과 간호사로 일한 코라 E.는 볼티모어와 필라델피아에 이 년간 살았던 경험을 토대로, 티 라 록(T La Rock) 등, 여러 미국 본토의 예술가와 활발히 교류했습니다. 그는 독일에서 성공을 거둔 최초의 여성 래퍼이기도 합니다.

 토치와 어드밴스드 케미스트리는 독일 랩의 대부로 올라섰습니다. 그러나, 이런 그들의 모습을 모두가 좋아하지는 않았습니다. 훨씬 더 거친 소리와 언어를 두르고 나타난 독일 힙합의 다음 세대가 보기에 그들은 슈투트가르트의 디 판타스티셴 피어, 함부르크의 압졸루테 베기너(Absolute Beginner; 2003년부터는 베기너(Beginner)로 활동) 등과 별반 다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눈에 하이델베르크의 세력은 다분히 부르주아적이고, (최소한) 중산 계급에 속했으며, 고상했습니다. 미국에서 이스트코스트힙합과 웨스트코스트힙합의 전쟁이 발발하여 과열되던 시기, 독일 힙합의 중심은 서서히 다른 도시들로 움직여 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