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크푸르트암마인과 함부르크를 달군 독일 힙합의 90년대

2024. 8. 23. 23:00Berlin

 

 199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서부터, 독일어로 랩을 한다고 하는 래퍼가 본격적으로 쏟아져 나오기 시작하는데, 이 시기, 독일 힙합의 중심은 주로, 프랑크푸르트암마인과 함부르크에 있었습니다. Iz와 토네(Tone), DJ 피드백으로 구성된 프랑크푸르트암마인의 힙합 크루, 콘크레트 핀(Konkret Finn)이 1994년, <Ich diss dich>라는 곡을 발표하며, 독일어로 된 랩 배틀 시대를 열었습니다. 프랑크푸르터리시(Frankfurterisch =프랑크푸르트암마인 방언)를 적극적으로 사용한 이 곡은 오늘날, 힙합 음악에 열광하는 어린 세대에 조금 뻣뻣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당시, 공개와 동시에 전국적으로 큰 인기를 끌었고, Iz와 토네에게 "강력한 프랑크푸르트암마인 배틀과 거리 랩의 아버지"라는 영광스러운 이름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여기서 영감을 얻은 젊은 래퍼들이 바치카프(Batschkapp; 플랫캡을 뜻하는 Schiebermütze의 프랑크푸르트암마인 방언)와 같은 클럽에서 열린 힙합 경연에 나와, 이름을 알리기 시작, 바야흐로 헤센주에서 힙합의 전성시대가 활짝 열렸습니다.

 미국 블루스 음악가의 피를 물려받아, 미국에서 휴가를 보내기도 했던 모지스 펠험은 <Pelham Power Tapes>라는 이름으로 테이프를 만들어서 팔며, 학창 시절을 보냈습니다. 80년대 후반, 그는 모지스 P.라는 활동명으로, 당시, DJ 마크 프랜시스("DJ Starscream"), 더론 모리스 버틀러("Turbo B"), 마쿠스 뢰펠("Mark Spoon"; 독일어로 "Löffel"은 숟가락을 의미) 등과 위 웨어 더 크라운(We Wear The Crown) 활동을 했는데, 테크노 위주의 레이블인 로직 레코즈에 소속된 그룹에서 영어로 랩을 하며, 그 이면에는 알 수 없는 갈증을 느꼈습니다. <Twilight Zone>이라는 곡으로 첫 번째 상업적인 성공을 거두었지만, 힙합 음악가로서 그의 경력에는 그보다 훨씬 크고 중요한 사건들이 남아 있었습니다. 1993년, 로버트 자틀러, 마틴 하스 등, 두 명의 제작자와 만난 펠험은 토마스 호프만과 뢰델하임 하트라임 프로젝트(Rödelheim Hartreim Projekt (RHP))라는 팀을 결성했고, 이듬해, 그 첫 번째 앨범, <Direkt aus Rödelheim>을 발표했습니다. 자틀러, 하스, 펠험, 세 명이 대부분 곡을 만들었습니다. 펠험의 가사가 퍽 마음에 들었던 하스는 그가 돋보일 수 있도록, 당시로서는 제법 파격적이게, 건반과 현악기 소리를 배경에 깔았습니다. 지금이야 힙합 세계 최고 수준의 영향력을 자랑하는 작곡가, 메트로 부민이 오케스트라와 협업하는 등의 장면이 인터넷을 타고 유명해졌지만, 하스가 "실험"에 나설 때만 해도, 그가 참고할 만한 표본이 거의 없었습니다. 펠험은 새로운 그룹의 이러한 새로운 시도가 성공하리라는 자신감이 다소 부족했다고 고백합니다. 그는 앨범이 시장에서 실패하면, 자기 음악 활동을 거기서 접고, 새로운 삶을 시작할 작정으로, 1994년, 대학교에 미리 등록해 놓기도 했습니다. 결과적으로 그는 딱딱한 책상 앞에 앉을 운명이 아니었습니다. <Direkt aus Rödelheim>은 25만 장이 넘게 팔렸고, 이 성공에 고취된 펠험은 또 하나의 도전을 시작합니다.

 

로이 마키스 II.의 힙합 레이블, 러프-앤-로우는 90년대, 프랑크푸르트암마인 힙합 진영에 다양성과 역동성을 불어넣었다고 회자합니다.

 

 밍(Ming), RM2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진 이탈리아 배경의 칼로제로 란다초, 로이 마키스 II.(Roey Marquis II.)는 열여덟 살에 프랑크푸르트암마인에서 음악가로서 자기 경력을 연 뒤로, 다양한 색깔의 회사를 거쳐, 1993년, 케어스틴 램과 힙합 레이블, 러프-앤-로우(Ruff-n-Raw)를 차렸습니다. 이전부터 해 온 재즈 음악을 놓지 않은 채, 로이 마키스 II.는 1993년부터 1996년 무렵까지, 런 DMC(Run DMC), 독일에서 힙합 음악가와 교류하던 그랜드마스터 플래시(Grandmaster Flash), 나스, 푸지스(Fugees) 등의 보조 DJ로 활동, 점차 영향력을 키웠습니다. 러프-앤-로우는 프랑크푸르트암마인 힙합 진영에 다양성, 역동성을 불어넣은 주체로 회자합니다. 후에 아자드라는 이름으로 독일 갱스터 랩과 랩 배틀 최고 선수 중 하나로 활약한 아자진, D-플레임(D-Flame) 등이 몸담았던 아시아틱 워리어스(Asiatic Warriors), 치마, 아이샤와 이스마엘 압달라흐 남매 등이 소속된 오트로픽 트(스)리(Otropic T(h)ree), 프랑크푸르트암마인과 미국, 나중에는 베를린 크로이츠베르크와 파리까지 오가며 왕성하게 활동한 다 게름(Da Germ; Genetisch Erschaffenes Reinkarniertes Meisterhirn) 등이 바로 이 레이블과 작업했습니다. 다만, 영어와 독일어, 쿠르드어 가사를 한 데 섞는 어려운 과제에 도전한 아시아틱 워리어스는 결국, 아자진과 D-플레임이 독자 활동에 나선 뒤, 더 큰 성공을 거둘 수 있었고, 치마도 그룹을 떠난 2000년대, 이전과는 달리, 독일어로 가사를 써서 인기를 얻었으며, 뉴욕에서 전설적인 우탱 클랜(Wu-Tang Clan)과 협업하기도 한 다 게름의 개인 성적도 냉정하게, 어딘가 애매했습니다. 그래도 로이 마키스 II.는 삼손 존스("Jonesmann"), 제이지(Jeyz), 팔 원(Pal One) 등과 계약하고, 커스(Curse), 올리 반조 등에게 곡을 주며, 독일 힙합의 중심이 또 한 번 옮겨간 뒤로도 꾸준히 활동했고, 그로부터 중요한 제작자로 역사책에 남았습니다.

 

한때, 법정 싸움까지 불사하며 서로 등을 돌렸던 제이비어 나이두(li.)와 모지스 펠험(re.)은 2010년대 들어, 화해하고 다시 만났습니다. [ⓒ dpa]

 

 

 

 모지스 펠험은 펠험 파워 프로덕션즈(pelham power productions (3p))라는 새로운 레이블을 차리고, 음악 제작 산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습니다. 3p의 상업적인 성공은 로이 마키스 II.의 러프-앤-로우를 능가했습니다. RHP의 <Direkt aus Rödelheim>에 수록된 <Wenn es nicht hart ist>에 참여한 "슈베스터 에스(Schwester S)" 자브리나 제트루어와 <Reime>의 제이비어 나이두가 3p의 초창기를 대표하는 얼굴입니다. 이 둘은 <Freisein>이라는 곡을 공동으로 내기도 했습니다.

 슈베스터 에스라는 기존의 활동명을 버리고, 3p 소속으로 처음 발매한 곡, <Du liebst mich nicht>로 자브리나 제트루어는 음원 순위 1위를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습니다. 1995년부터 2007년 사이, 그의 음반이 200만 장 넘게 팔렸습니다. 하이델베르크의 코라 E.가 독일에서 여자도 랩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먼저 알려줬지만, 그는 지금껏 단 한 장의 앨범만 냈습니다. 그래서인지, 여성 래퍼로는 최초로 독일 음악 시장 정상에 오른 자브리나 제트루어가 90년대를 추억하는 이들의 머릿속에 더 강렬하게 박혔습니다. 음악가로서 활동을 위해, 그가 경영학 전공을 포기해 버린 일도 유명합니다.

 오늘도 온갖 논란의 중심에 서는 제이비어 나이두는 1998년, 그의 첫 번째 정규 앨범인 <Nicht von dieser Welt>를 공개하고, 3p의 성공 신화를 이었습니다. 100만 장 넘게 나간 이 데뷔 앨범은 그가 후에 발표하는 다른 앨범들과 마찬가지로, 독일 음반 순위 1위에 올랐습니다. 제이비어 나이두는 래퍼가 아닌, R&B와 소울 가수입니다. <Direkt aus Rödelheim>에서 선보인, 오케스트라 반주를 포함하는 마틴 하스의 디자인은 자브리나 제르투어와 제이비어 나이두의 성공으로 3p를 대표하는 색채가 됐고, 이후로도 2014년을 강타한 <Auf uns>의 안드레아스 부라니 등에게까지 전해져, 독일어권 대중음악 시장에 큰 뿌리를 내렸습니다.

 Illmat!c, (러프-앤-로우를 떠난) 아자드, 글라스하우스 등, 실력 있는 음악가가 계속해서 합류한 3p는 힙합, R&B, 소울, 팝의 경계를 넘나들며 승승장구했는데, 자립 의지가 강했던 제이비어 나이두가 모지스 펠험과 척을 지면서부터 알게 모르게 위기가 닥쳤습니다. 죄네 만하임스(Söhne Mannheims)라는 팀을 꾸린 나이두는 결국, 자기 레이블을 차리고 3p를 나갔습니다. 만하임과 뢰델하임의 두 거두는 법정에서 진흙탕 싸움을 하기도 했고, 종국에는 대개 나이두에게 유리한 판결이 나왔습니다. 3p에 소속된 동안, 나이두가 착취당했다고 주장하는 음악가, 개인의 권리에 관한 분쟁이 주를 이루었습니다. 2007년 말부터 임직원을 대거 해고하기 시작해, 2008년 늦가을에 문을 닫았던 3p는 그 이듬해 5월, 돌아왔지만, 세기말, 세기 초의 영광에서는 몇 발짝 멀어진 모습입니다.

 

함부르크는 명실상부, 90년대, 독일 힙합의 중심지로 군림한 도시입니다. 이 아름다운 북쪽의 항구도시에서 초기에 힙합이 유행하는 데는 NDR 등 방송의 역할도 컸습니다. [ⓒ jgseins__jh]

 

 캠밸 기지 덕에 대문 밖으로 "작은 미국"을 마주할 수 있었던 하이델베르크의 어린 세대처럼, 프랑크푸르트암마인의 어린 세대가 그 대도시에 PX와 주택 시설이 있어, 거리의 차를 몰고 다니는 미국인들과 쉽게 접촉할 수 있었다면, 함부르크에서는 초기에 힙합이 '전파'되는 데 '전파'의 역할도 제법 컸습니다.

 전후, 서독 지역을 분할 점령한 연합국은 "나치 독일"이 준 교훈에 근거하여, 언론이 국가 권력의 나팔수로 전락하지 못하게 하는 제도적 장치 마련에 정책적인 목표를 두었습니다. 과거의 국영방송 제도에서 벗어나, 정치나 경제에 의해 통제되는 대신, 사회적 집단에 의해 운영되는 공영방송 제도를 도입했고, 전국 차원의 단일 방송사 대신, 각 주 단위 공영방송사를 설립했습니다. 1945년, 영국군 점령지에 신설된 북서독일방송(Nordwestdeutscher Rundfunk (NWDR))을 시작으로, 헤센방송(Hessischer Rundfunk)과 바이에른방송(Bayerischer Rundfunk), 남서부 방송(Südwestfunk), 라디오 브레멘(Radio Bremen), 남독일방송(Süddeutscher Rundfunk) 등이 차례로 개국했습니다. 이들은 1950년, 공영방송사 연합체인 전국 방송 채널, ARD(Arbeitsgemeinschaft der öffentlich-rechtlichen Rundfunkanstalten der Bundesrepublik Deutschland) 출범을 이끌었습니다. 대다수 공영방송이 주마다 분할됐지만, NWDR는 슐레스비히홀슈타인주와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 니더작센주, 베를린, 함부르크를 아우르는 최대 방송권역을 가졌습니다. 모두의 필요, 손익계산서가 같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 1953년 11월, 베를린에서 자유 베를린방송(Sender Freies Berlin)이 독립하여 탄생했고, 그다음 이 년간, 서부 독일방송, WDR와 북부 독일방송, NDR가 각자 독자적으로 출범했습니다.

 <Wild Style>과 <Beat Street>가 독일의 "젊은 문화"를 강타한 80년대 말, NDR의 "소울트레인(Soultrain)" 쇼는 함부르크에서 수입 음반이 없이도 힙합 음악을 접할 창구가 돼 주었습니다. 밤마다 루트 로켄샤우프가 소울과 펑크, 때로 랩을 틀어 주었습니다. 1988년에는 마리우스 No. 1이 방송사에 합류해, 그만의 편성을 받아 냈습니다. 그가 이끈 "넘버 원 믹스쇼(Number One Mixshow)"는 독일 북부에서 최초의 힙합 음악 전문 라디오 쇼로 불립니다. 함부르크에 생긴 첫 번째 힙합 클럽, 데프콘 파이브(Defcon 5)에서 금요일 밤마다 공연하던 마리우스 No. 1은 후에, 코라 E.의 DJ로 함께하며, 전국에 이름을 알렸습니다.

 

(왼쪽부터) 비예른 베톤(본명은 비예른 바른스), 독터 렌츠, 쾨니히 보리스의 3인조로 명맥을 유지한 페테스 브로트는 지난해, 해체했습니다. 언제까지 과거의 영광에만 머물 수는 없으니, 이쯤에서 작별하고, 각자 새로운 길에 오르기 위한 결정입니다. [ⓒ dpa/ Markus Scholz]

 

 "넘버 원 믹스쇼"가 흥행하던 그즈음, 슐레스비히홀슈타인주 남부, 피네베르크의 할스텐베크에서 포이츠 오브 피지(Poets of Peeze)라는 무리가 결성했습니다. 샘플러와 미니 LP를 제작해서 조용히 함부르크 힙합 진영의 흥미를 불러일으킨 이들은 이때까지 영어로 랩을 했습니다. 전환점은 1992년, 슈투트가르트의 디 판타스티셴 피어가 <Die da!?!>로 이전에 본 적 없는 상업적 성공을 거둔 해에 찾아왔습니다. 포이츠 오브 피지의 후신이 피네베르크 셰네펠트의 한 학교에서 탄생했으니, 함부르크 힙합 애호가들에게 오래도록 사랑받고 지난해 해체한 페테스 브로트(Fettes Brot)입니다. 원래는 보리스 라우터바흐("König Boris")의 이름을 전면에 내건 보리스 앤드 더 콜보이즈(Boris & The Callboys)라는 이름을 준비했지만, 초창기 공연을 관람한 라우터바흐의 동료, 슈팍스(Spax)가 관람평 중 페테스 브로트라는 표현을 쓴 데서 착안해, 이름이 바뀌었다는 일화가 전합니다. 이들의 첫 번째 EP(Extended Play)인 <Mitschnacker>가 세상에 나오고 얼마 안 가, 핵심 구성원인 독터 렌츠(Dokter Renz), 마틴 판드라이어와 포이츠 오브 피지로 같이 활동했던 올리버와 토비아스 슈미트 형제가 팀에서 빠졌습니다. 마이티(Mighty), 코크 괴트만(Kok Göttmann) 등의 이름을 썼던 올리버는 이내, 음악가로서 경력을 내려놓았지만, 마툴라(Matula), 토비 토프센(Tobi Tobsen)으로 알려진 토비아스는 미르코 보고예비치("Das Bo")와 뭉친 데어 토비 운트 다스 보(Der Tobi & das Bo), 퓐프 슈테르네 디럭스(Fünf Sterne deluxe), DJ 코베 식스(Kowe Six)와 함께한 문부티카(Moonbootica) 등으로 활동을 계속했습니다.

 비슷한 시기, 얀 딜레이("Eizi Eiz"; 본명은 얀 필리프 아이스펠트), 데니스 리스크("Denyo"), 기도 바이스("DJ Mad"), 마틴 빌케스("Platin Martin"), DJ 번, 나빌 셰이크, 미르코 등으로 구성된 앱솔루트 비기너스(Absolute Beginners)도 그룹의 초창기를 지나고 있었습니다. 다른 팀들과 마찬가지로, 영어 랩으로 활동을 시작한 이들은 이내, 독일식 이름인 압졸루테 베기너(Absolute Beginner)로 개칭, 1992년 6월, 비교적 펑크 선호도가 높았던 레이블, 부바크에서 공개한 샘플러, <Kill the Nation with a Groove>에 참여하여 나름의 인지도를 얻었습니다. 코라 E.와 어드밴스드 캐미스트리 등, 한창 남쪽에서 성공 가도를 달리던 힙합 음악가들과 함께했습니다.

 

압졸루테 베기너의 황금기를 열어젖힌, 그룹의 두 번째 정규 앨범, <Bambule> 커버 사진.

 

 압졸루테 베기너는 1994년, 사회 비판적인 주제를 녹인 EP, <Götting>을 발표했고, 그로부터 이 년 지난 1996년 8월에 데뷔 앨범, <Flashnizm>을 공개, 힙합 음악에 밴드의 소리를 입혀서, 아직은 그리 크지 않았던 함부르크 힙합 시장을 확장하고자 했습니다. 이때 이미 팀에는 네 명의 구성원만 남았으니, 지난 2003년에 베기너(Beginner)로 다시 이름을 바꾸고 오늘까지 활동하는 아이지 아이스, 데뇨, DJ 매드 등, 세 명과 플라틴 마틴이 함께했습니다. 플라틴 마틴은 나머지 구성원이 대형 레이블, 유니버설 뮤직 그룹과 손을 잡은 직후(부바크가 유니버설 뮤직 그룹 계열에 들었습니다), 압졸루테 베기너를 떠났습니다. 공교롭게도 팀의 황금기는 그가 탈퇴한 뒤에 낸 두 번째 정규 앨범, <Bambule>부터 열렸습니다. 단, 플라틴 마틴이 세 번째 곡, <Rock On>과 아홉째 곡, <Geh bitte>에는 객원으로 참여했습니다. 다스 보, 뮌헨 출신의 다비트 P.(다비트 파포), 브레멘에서 프릭스 어소시에이션 브레멘(Freaks Association Bremen) 활동으로 이미 입지를 다진 페리스 MC(자샤 라이만), 수단계 독일인 래퍼, 새미 디럭스(Sammy Deluxe) 등도 작업에 참여했습니다. 특히, <Füchse>에 함께해 처음으로 주류 시장에서 주목받은 새미 디럭스는 이후, 다이너마이트 디럭스(Dynamite Deluxe)와 독자 활동으로 꾸준히 사랑받는 래퍼가 됐습니다.

 1993년 말부터 1994년 초에 제작된 페테스 브로트의 <Mitschnacker>에는 <Definition von Fett>처럼, 이름부터 통통 튀는 곡은 물론, MC 레네, 다스 보, 저지 드레(Judge Dré) 등이 함께한 <Schlecht>도 수록됐습니다. MC 레네는 개인 음반 판매 성적이 비교적 저조했지만, 독일, 특히 뮌헨과 마인츠 등지에서 힙합 문화의 계발과 정착에 크게 이바지한 사설 간행물, <<MZEE(독립 레이블 기능도 해서, 페리스 MC 등의 앨범을 발매하곤 했습니다)>> 등에 투고하여, 90년대, 꾸준히, 적잖은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저지 드레로 알려진 요 마마 레코즈(Yo Mama Records)의 수장, 안드레 루트는 애초, 독일어 힙합 음악에 대해 비관했는데, 포이츠 오브 피지 시절의 인연으로 페테스 브로트가 <Mitschnacker>를 낼 수 있게 해 준 뒤, 그가 반향을 일으키자, 그 성공을 발판으로 삼아, 자기 회사에서 퓐프 슈테르네 디럭스의 <Sillium>, 아인스 츠보(페테스 브로트의 객원 DJ로 참여했던 DJ 라바우케와 덴데만의 2인조)의 <Gefährliches Halbwissen>, DJ 코체의 <Music Is Okay>, 페리스 MC의 <Asimetrie> 등을 발표하고, 주의 음악 시장을 제대로 뒤흔들었습니다.

 

<Jein>이 수록된 페테스 브로트의 두 번째 정규 앨범, <Außen Top Hits, innen Geschmack> 커버 사진.

 

 페테스 브로트는 잼, 청소년 수련관에서 공연, 축제에 이르기까지 왕성히 뛰며, 얼굴을 알렸습니다. 빡빡한 일정 속, 결원이 발생하면, 쾨니히 보리스의 동생, 니나 라우터바흐("Heißes Eisen")가 투입되기도 했습니다. 덕분에, 그는 초기, 독일의 여성 래퍼로(그 상징성이나 남긴 발자취에는 차이가 있어도) 코라 E., 자브리나 제트루어 등과 이름을 남길 수 있었습니다. 팀은 <Mitschnacker> 작업에 매진하다, 함부르크 최고의 힙합 음악 제작자 중 하나인 마리오 폰하흐트와 처음 만났습니다. 이후로도 요 마마 레코즈의 수많은 대표작을 맡은 그와 손을 잡고, 페테스 브로트는 1995년 4월, 첫 번째 LP, <Auf einem Auge blöd>를 냈습니다. <Nordisch by nature>는 이들의 첫 번째 "히트곡"이 됐습니다. DJ 코체의 밴드, 피시모프(Fischmob), 데어 토비 운트 다스 보 등의 목소리까지 녹음해, 독일어, 저지 독일어(주로 독일 북부와 네덜란드 북동부에서 쓰이는 독일어로, 오늘날까지 부분적으로 문학에 쓰이나, 대개는 지역 방언을 중심으로 합니다), 네덜란드어, 덴마크어가 섞인 랩을 완성했습니다. DJ 라바우케도 이때, 처음으로 작업에 참여했습니다.

 함부르크의 래퍼들은 라임을 잘 맞추기로 유명했고, 그로부터 널리 사랑받았지만, 한 번 "반짝"하고 사라져 버린 이도 그만큼 많았습니다. 그렇게 되지 않기를 간절히 원한 페테스 브로트의 바람은 그들의 두 번째 정규 앨범, <Außen Top Hits, innen Geschmack>가 발표된 1996년, 매우 빠르게 이루어졌습니다. 덴데만, 슈투트가르트의 프로인데스크라이스(Freundeskreis)에서 랩을 맡은 막스 헤레, 프라이징 출신 블루멘토프(Blumentopf)의 마스터 피(Master P; 본명은 카유스 하인츠만)와 홀룬더만(Holundermann; 본명은 베른하트 분더리히), 슈팍스, 토비아스 슈미트 등, 화려한 지원군을 등에 업은 이 단락에서 제일 인기를 끈 곡은 다름 아닌, "페테스 브로트"라는 이름을 만인에게 각인시킨, <Jein>입니다. "Ja(=Yes)"와 "Nein(=No)"의 합성어를 제목에 내세운 <Jein>은 세 개 절로 나뉘어, 홀로 휴가를 떠난 연인을 뒤로한 채, 파티에서 다른 여자와 시시덕거리며 바람을 피울 생각을 하는 상황(1절)과 절친한 친구의 연인이 자신에게 감정을 갖고 있어, 그와 새로운 관계를 시작하려면, 친구와 우정이 위태로워질 수밖에 없는 상황(2절), 집에서 연인과 저녁을 보낼지, 친구들과 파티에 나갈지 골라야 하는 상황(3절)에 세 명의 래퍼가 각자 양심과 씨름하는 내용입니다. 이 곡은 팔 주 연속으로 독일에서 음원 순위 정상을 차지했습니다.

 

 

 페테스 브로트와 압졸루테 베기너가 연이은 성공을 축하한 90년대 후반, 함부르크 힙합 시장에는 이들과 작업하며 실력과 인지도를 쌓은 음악가들이 대거 등장해, 큰 힘을 보탰습니다. <Willst du mit mir geh'n?>, <Dein Herz schlägt schneller> 등이 실린 퓐프 슈테르네 디럭스의 <Sillium>이 15만 장 넘게 팔렸고, 이듬해 나온 아인스 츠보의 <Gefährliches Halbwissen>도 20주 동안이나 독일 음악 시장, 음반 순위에 들었습니다. 달성한 최고 순위는 10위. 데어 토비 운트 다스 보로 활동하던 때부터 토비아스 슈미트와 미르코 보고예비치는 익살스러운 가사(그래서 늘 그들을 업신여기는 무리도 있었지만)로 인기가 높았고, 아인스 츠보도 말놀이하는 듯한 노래로 대표됐습니다. 이들과 반대되는 성향의 밴드로는 도펠코프(Doppelkopf)가 인기몰이했으니, 초현실적인 문학과 공상 과학물 따위에서 영감을 얻은, 어딘가 어둡고 우울한 분위기, 가사가 이들의 전유물이었습니다. 다이너마이트 디럭스의 첫 번째 정규 앨범, <Deluxe Soundsystem>은 2000년 3월에 발매돼, 독일에서 음반 순위 4위를 차지하고, 여러 상을 싹쓸이했습니다.

 일찍이 브레멘에서 함부르크로 근거지를 옮겨온 페리스 MC는 물론, 다이히킨트(Deichkind), Mr. 슈나벨, 마르세유에서 났으나, 함부르크에서 자란 일로(Illo; 본명은 올리버 레스), 함부르크알토나의 디거 댄스(Digger Dance), 니코 수아베, 모키 마블스(Moqui Marbles) 등이 너도나도 주류 시장에 입성하는데, 이러한 흐름은 2000년 6월, 18,000명 넘는 관중이 장크트 파울리의 밀레른토어-슈타디온에 몰려든 플래시 2000(Flash 2000)까지 절정을 이루었습니다. <Jein>(페테스 브로트), <Susanne zur Freiheit>(피시모프), <Füchse>(압졸루테 베기너), <Reimemonster>(페리스 MC; 주로 슈투트가르트 등지에서 명성을 크게 얻은 아프로프(Afrob)가 참여), <Ladies & Gentleman>(다이너마이트 디럭스), <Bon Voyage>(다이히킨트) 등이 울려 퍼진 이날의 축제는 독일 힙합 사상 최고의 순간 중 하나로 남았습니다.

 베기너가 2000년대에 발표한 두 앨범, 2003년의 <Blast Action Heroes>와 2016년의 <Advanced Chemistry>를 모두 독일 음반 순위 1위(후자는 오스트리아에서도 팔 주 동안 1위를 차지했습니다)에 올리고, 특히, 켄드릭 라마의 <To Pimp a Butterfly> 중 <The Blacker the Berry>에 영향을 받았다는 <Ahnma>로 세간의 시선을 집중시키는 등, 오늘까지도 종횡무진하며, 함부르크 힙합 진영의 다른 여러 음악가도 활동을 이어왔지만, 페테스 브로트는 새천년의 초반, 긴 공백기를 가졌습니다. 프랑크푸르트암마인으로 돌아오면, 모지스 펠험이 변함없이 사랑받으며 3p를 거의 홀로 지탱하는데, 주요 음반사들의 이탈과 기능 상실, 80년대 말부터 90년대 초까지 이 대도시에 미국 문화가 알려지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 클럽, "펑카델릭(Funkadelic)"과 당대의 음반 판매장 문화 따위가 종말을 고한 고로, 힙합 시장의 장악력을 다른 도시에 내주어야 했습니다. 새로운 세기, 독일 힙합 문화의 중심 역할을 이어받은 도시는, 마침내, 그 어느 곳보다 "다양성"이 넘치는 도시, "재통일을 이룩한 독일"의 수도, 베를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