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9. 6. 23:00ㆍBerlin
슈투트가르트의 판타 피어와 디 압졸루테 베기너를 위시한 함부르크 음악가들이 인기리에 활동하며, 연일 "매진" 신화를 쓰던 세기말, 베를린의 힙합 음악 시장은 그 존재 자체는 분명했으나, 아직 극도로 "지하"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늦어도 2002년 12월을 전후로, 크로이츠베르크에서 자란 튀르키예 이민자 배경의 쿨 사바시(Kool Savas)가 독일에서 제일가는 힙합 음악가로 우뚝 서기까지는 그랬습니다.
2000년에 마쿠스 슈타이거가 설립한 레이블, 로얄 벙커(Royal Bunker)가 베를린 힙합 시장을 크게 일으켰고, 새천년에 접어들어, 약간의 공백이 있던 독일 랩 시장을 이 도시의 예술가들이 장악하도록 지원했습니다. 1991년, 슈투트가르트에서 베를린으로 올라온 슈타이거는 베를린 자유 대학교(Freie Universität Berlin)에서 공부하며, 힙합 잡지의 기자로 활동했습니다. 그가 글을 기고한 베를린의 Mik's X-S.I.D.E. News(후에 Mik's News로 알려진)는 독일에서 최초의 힙합 전문지 중 하나입니다. 자연스레, 그는 베를린 음악 시장의, 배는 조금 고플지언정, 열정이 차고 넘치는 래퍼들과 활발히 교류할 수 있었습니다. 잼 문화가 꽃피운 여느 장소처럼, 혈기 왕성한 이들에게 워크숍과 랩이나 디제잉 기술을 배울 기회 따위를 제공한 힙합 하우스(Hip Hop Haus)가 당시, 도시 내 힙합 문화를 사랑하는 이들의 성지나 다름없었습니다. 이곳은 음반을 발매하는 작업실 역할도 하여, 쿨 사바시의 이름을 처음으로 크게 알린 <LMS(Lutsch mein Schwanz)>, <Schwule Rapper>가 그 안에서 녹음(풋 다 니들 투 다 레코즈(Put Da Needle To Da Records))됐습니다. 슈타이거가 쿨 사바시와 푸아트(Fuat), MK1 등과 만난 장소도 바로 이곳입니다. 로스앤젤레스를 방문한 슈타이거는 굿 라이프 카페(Good Life Café; 프로젝트 블로우드(Project Blowed)라는 이름의 레이블로도 알려진)에서 저녁마다 무명의 래퍼들에게 자기 실력을 뽐낼 무대가 주어지는 광경을 보고 큰 영감을 얻어, 베를린에서 젊은 힙합 음악가들에게 그들이 한 단계 더 성장할 기회를 마련해 주겠다는 결심을 세웠다고 전합니다. 일요일 저녁마다 로얄 벙커 바에서 개최된 사이퍼(Cypher)는 그렇게 시작했습니다. 여러 힙합 잡지를 통해 아이스 큐브 등의 이야기가 널리 알려지기도 했거니와, 그 탄생부터 미국 서부 해안의 힙합 문화를 본떴으니, 로얄 벙커 바 사이퍼에는 일전에 독일에서 본 적 없는 공격적이고 거친 언어의 싸움이 성행했습니다. 바는 사이퍼가 시작되고 일 년 뒤, 월세를 연체하는 바람에 문을 닫아야 했지만, 슈타이거는 그곳에서 연을 맺은 몇몇 음악가와 독립 레이블을 차렸습니다. 1998년, MK1과 미크로코스모스(Mikrokosmos)를 연 그는 <Berlin Nr. 1>라는 이름의 카세트테이프를 냈습니다. 카세트테이프 발매는 신생 레이블이 비교적 비용 효율적으로 선택하는 방법이었습니다. MK1과 의견 대립으로 이내 갈라선 슈타이거는 모노폴(Monopol)이라는 레이블 이름을 아주 잠시 쓰다가, 2000년, 마침내, "로얄 벙커"에 정착했습니다.
로얄 벙커의 비약적인 발전은 카세트테이프 <Berlin No.1 Volume 2>의 발매와 함께 찾아왔습니다. 이 년 전인 1998년에 내놓은 첫 번째 결과물의 중심에 대개 푸아트가 있었다면, 이번 작품의 핵심, 주인공은 누가 뭐래도 쿨 사바시였습니다. 그는 이미 전국적으로 알려진, 꽤 인기 있는 음악가였습니다. 마쿠스 슈타이거는 이 카세트테이프를 발판으로, 다양한 음악가의 독자적인 작품을 세상에 방출하기 시작합니다.
이듬해, 마스터스 오브 랩(Masters of Rap (M.O.R.))의 첫 번째 앨범, <NLP>가 공개돼, CD와 LP로 모두 판매됐으니, M.O.R.은 이후로도 그 얼굴들이 바뀌며 활동(쿨 사바시와 푸만슈(Fumanschu), 유스투스 요나스(Justus Jonas) 등 셋이 결성했지만, 쿨 사바시는 팀을 떠났고, 오늘은 그보다 많은 래퍼가 속해 있습니다)을 이어가지만, 이 데뷔 앨범보다 파급력이 큰 작품은 없습니다. 쿨 사바시는 물론이고, 로얄 벙커의 공개 사이퍼 현장에서 실력을 갈고닦은 래퍼 다수가 그 제작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습니다. 푸만슈, 유스투스 요나스와 풍크퓍세(Funkfüxe)로 뭉친 마틴 B.(Martin B.), 일로(Illo; 본명은 올리버 홀시케로, 마르세유에서 나서 함부르크에서 자란 올리버 레스와 활동명이 같을 뿐, 다른 사람입니다) 등도 모두 작업 과정에 합류했습니다. <<MZEE>>는 <NLP>를 두고 반항적인 가사와 뛰어난 소리, 독특한 랩 색채가 어우러져, 독일 힙합에 혁명을 불러일으킨 작품이라고 극찬했습니다.
점점 더 널리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지만, 쿨 사바시에게는 베를린 힙합 시장을 한층 더 전문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리고, 더욱 확장하고 싶은 갈망이 있었습니다. 로얄 벙커 활동을 하면서도 마쿠스 슈타이거가 변변한 사무실 하나 차리지 못하는 당시 상황이 그에게는 제법 절망적으로 다가왔습니다. 결국, 사바시는 로얄 벙커와 M.O.R., 풋 다 니들 투 다 레코즈 등을 모두 떠나, 베르텔스만 뮤직 그룹(Bertelsmann Music Group (BMG))의 손을 잡고, 오프티크 레코즈(Optik Records)라는 독자 레이블을 차렸습니다. 이전보다 작업물 출판과 새로운 음악가 육성 등에 훨씬 자유로운 권한을 행사할 수 있게 된 그는 이곳에서(2009년 1월에 재정적인 어려움으로 레이블을 해산하기 전까지) <Der beste Tag meines Lebens>, 믹스 테이프 <Die John Bello Story>, 아자드와 협업한 <One> 등으로 성공 가도를 달렸습니다. 사바시를 동경한 쾰른 출신의 에코 프레시(Eko Fresh)가 초기에 오프티크 레코즈와 계약, <Der beste Tag meines Lebens> 등에 참여하여 경력을 쌓았는데, 내부 갈등으로 회사를 떠난 뒤, 그는 사바시와 독일 힙합 역사에서 제일 유명한 설전을 벌였습니다. 에코가 소니 BMG에서 연달아 발표한 두 앨범, <Ich bin jung und brauche das Geld>, <L.O.V.E.> 등에 대해 사바시가 팝 색채가 너무 짙다고 수위 높게 비판하자, 이를 자신에 대한 모욕으로 간주한 에코가 2004년 12월, 사바시는 물론, 한창 베를린에서 세력이 강성한 아그로 베를린(Aggro Berlin)의 플레어(Fler), 부시도(Bushido), 지도(Sido) 등을 모조리 공격하는 <Die Abrechnung>을 내놓아, '전쟁'을 선포했습니다. 에코는 "온갖 원숭이가 독일어로 랩을 한다."라고 하거나, 플레어와 부시도 등에 대해 자칫 인격 모독을 가하는 듯 들릴 수 있는, 아주 거친 언어를 사용했습니다. 공격당한 이들의 반격, 에코의 재차 반격 등으로 싸움은 여러 해 동안 지속됐습니다. 2005년 2월, 쿨 사바시의 첫 번째 대답, <Das Urteil>은 여러 평론가에 의해, 이 과정에 탄생한, 독일 힙합 역사상 제일 강력하고 완성도 높은 디스 랩으로 평가받습니다.
한편, 초기에 자기 재정 상황이 레이블의 꾸준한 발전을 감당할 정도로 안정적이라고 자신하던 마쿠스 슈타이거는 점차, 전문적인 경영인이 아니라는 자기 한계에 직면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 자신이 뛰어난 재능을 가진 래퍼도 아니었고, 오랫동안 음반 제작 산업에 종사한 인물도 사실, 아니었습니다. 특별한 신인을 골라내는 탁월한 안목을 갖지도 못했습니다. 결국, 그는 지금껏 몇몇 힙합 음악가와 친분, 관계를 통한 레이블 경영에 지나치게 의존했는데, 이는 그 관계에 금이 가기 시작하면, 언제든 상황이 급변할 수 있음을 의미했습니다. 처음에는 MK1과 쿨 사바시가 떠나더니, 후에는 지도와 B-타이트(B-Tight) 등이 아그로 베를린으로 적을 옮겼습니다. 단, 마쿠스에게는 도시 안팎의 새로운 힙합 음악가들과 사귀고, 그들과 작업을 같이할 천부적인 능력이 또한 있었습니다. 프린츠 피(Prinz Pi)와 K.I.Z가 로얄 벙커와 함께했고, 오프티크 레코즈와 계약서에 서명하기 전에는 에코 프레시도 이곳에 몸담았습니다. 마쿠스는 플레어와도 친분을 쌓았습니다.
마쿠스 슈타이거가 로얄 벙커의 수장으로서 일을 온전한 자기 생계 수단으로 삼기는 2001년의 일입니다. 그는 사업을 하며, 누구에게나 문이 열려 있어야 한다는 자세를 고집했는데, 이는 독점적인 권리를 사들이고자 한 대형 기업들과 맞지 않았습니다. 그와 그의 레이블은 작품을 전국 방방곡곡 음반 판매장에 까는 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유통을 도와준 쾰른의 한 회사로부터 그의 초기 기획보다 훨씬 많은 작업물을 내놓으라는 압박에 시달린 마쿠스는 2003년 상반기에만 일곱 개의 음반을 제작하기도 했습니다. 이는 그의 주머니 사정을 어렵게 했을 뿐 아니라, 로얄 벙커에 소속된 몇몇 음악가에게 자신이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다는 불만을 심어 주었습니다. 수년간 마쿠스와 그의 레이블을 지탱해 온 일부 우정에 위기의 그림자가 드리운 순간입니다.
어느 시점엔가 마쿠스 슈타이거는 "지하의 벙커"에서 "땅 위"로 올라와, "독립 레이블"로 전환을 꾀해야 했습니다. 초인종 없는 무거운 철문을 둔 크로이츠베르크의 반지하 요새는 거리를 지나다니는 이들의 시선을 끌기에 썩 유리하지 않았지만, 로얄 벙커 레이블의 웹 사이트라면, 이야기가 달랐습니다. 물리적인 위치와 관계없이 힙합 애호가를 불러 모을 수 있었으니, 그들이 그 무한한 공간을 헤엄치다가 상품을 구매하거나, 뮤직비디오를 시청하거나, 레이블의 최신 소식을 접할 수도 있었습니다. 로얄 벙커의 다음 물결은 인터넷 가상 공간에 있었던 셈입니다. 더는 슈타이거가 로얄 벙커를 진두지휘하여 음반 제작에 나서지 않는 오늘도, 그 영역에는 베를린에서 힙합을 사랑하는 이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만한 정보가 저장돼 있습니다.
2007년 8월에 발매된 K.I.Z의 두 번째 정규 앨범, <Hahnenkampf>는 독일 음악 시장에서 제법 의미 있는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베를린 SO 36 출신으로, 사회적인 문제를 고발하는 K.I.Z 특유의 컨셔스 랩과 다양한 음악 장르를 향한 개방적인 수용 태도가 빛나는 이 앨범을 알리기 위해, 마쿠스 슈타이거는 로얄 벙커를 이끌고 처음으로 "타협"에 나서기도 했습니다. 대형 레이블인 유니버설 뮤직 그룹과 협력입니다.
레이블 사업에 지칠 대로 지친 마쿠스 슈타이거는 2007년 말, K.I.Z의 그다음 앨범을 끝으로, 2008년에, 로얄 벙커 문을 닫겠다고 선언했습니다. 하지만, <Hahnenkampf>의 성공으로, 그 순회공연 등이 진행됨에 따라, K.I.Z의 세 번째 정규 앨범, <Sexismus gegen Rechts> 발매는 일 년가량 지연됐습니다. 2009년 7월 10일, 세상에 나온 이 작품에는 <Straight Outta Kärnten>과 같이 정치적인 색채가 강화된 곡과 <Rauher Wind> 등, 사회 비판적인 곡이 조화를 이루어, 그룹의 정체성을 더욱 공고히 했습니다. 이번에도 유니버설 뮤직 그룹이 함께했고, 앨범은 전작보다 조금 더 성공했습니다. 슈아티거는 이후, "로얄 벙커 시대"의 종말을 공식화했습니다.
마쿠스 슈타이거와 로얄 벙커가 실질적으로 베를린 힙합 진영을 지배한 주체는 아니고, 하이델베르크에서부터 프랑크푸르트암마인, 함부르크 등지를 거쳐서 옮겨온 독일 힙합 중심지로서 싸움의 판에 "최종 승자"로 기록될 만한 주류 시장에서 상업적인 성취를 많이 이루지도 못했다지만, 크로이츠베르크의 이 작은 레이블은 래퍼로서 기량을 늘릴 그 일요일 저녁의 기회만 손꼽아 기다리던 거의 모든 이에게 지난날에 대한 향수로 여전히 기능하고 있습니다. 2017년 9월 29일, 쿨 사바시와 지도가 함께 낸 앨범, <Royal Bunker>는 1998년, 로얄 벙커에서 처음 만난 두 사람이 그 경력의 시작점에 관해 이야기한 작품으로, 독일과 오스트리아, 스위스에서 엄청난 판매 실적을 올렸습니다. 두 사람이 그 몇 년간, 각자 발매한 다른 어떤 앨범보다 낫다는 평가와 함께. 사바시와 지도의 여정이 그러하듯, 로얄 벙커는 슈타이거가 레이블 수장으로서 자기 자리를 내려놓은 그날에 멈추지 않았습니다.
1986년 4월, 베를린시 예산을 지원받아, 대중교육과 직업 훈련을 목표로 설립된 비영리 단체, 아바이츠크라이스 메디언페다고기크(Arbeitskreis Medienpädagogik)는 1993년부터 힙합 모빌(Hip Hop Mobil)이라는 프로젝트를 진행했습니다. 2000년대에도 존속한 이 프로젝트는 베를린과 브란덴부르크주에서 신청자를 모집해, 베를린 힙합 현장에서 활동하는 예술가들에게 래핑이나 디제잉, 브레이킹 따위를 배울 기회를 제공했습니다. 직업 훈련으로서 의미도 있었을뿐더러, "성공 사례"도 속속 만들어 내, 이내, 베를린에서 가장 유명한/중요한 프로젝트 중 하나로 떠올랐습니다. 쿨 사바시나 푸만슈, 멜비츠(Melbeatz; "비트의 여왕"이라고 불린 유명 힙합 음악 제작자) 등, 이미 주류 시장에서 자기 입지를 키워가던 다수가 아바이츠크라이스 메디언페다고기크에 지원받아, 로스앤젤레스로 "짧은 힙합 유학"을 다녀왔습니다.
2001년에 문을 연 뒤로, 세기 초, 베를린 힙합 음악 시장을 사실상 "정복"하여 "지배"한 레이블, 아그로 베를린의 시작을 다루기 전, 비영리 단체의 프로젝트인 힙합 모빌 이야기부터 시작해야 하는 까닭은 아그로 베를린을 설립한 세 주역 중 하나, 슈파이헤(Spaiche)가 1990년대 말, 그 프로젝트에 깊숙이 관여하여, 두말할 필요 없이, 베를린 힙합 현장의 여러 인사와 교류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펑키 그로스앙그리프(Funky Grossangriff)라는 그룹의 일원으로 여러 경연에 나선 브레이커입니다. 슈파이헤와 협력하여 '독립 레이블' 아그로 베를린을 출범시킨 다른 둘은 그라피티 아티스트인 스펙터(Specter)와 베를린에서 힙합 문화 상품을 전문으로 취급하는 상점, 다운스테어스(Downstairs)를 운영하던 할릴(Halil)입니다. 이중 레이블 로고와 각종 예술 작품, 영상물 제작 등을 총괄하며 홍보를 담당한 이가 스펙터인데, 그는 아그로 베를린 탄생 초기, 힙합 전문지인 <<JUICE>>와 인터뷰를 통해, 자신들의 목표가 수년간 배급사와 미디어의 손에 형성된 힙합에 대한 고정관념, 음악이 대중에게 전달되는 "엘리트주의적인 방식"을 타파하기라는 포부를 밝혔습니다. 아그로 베를린에서 완성된 작업물은 2001년부터 2007년까지 쾰른의 그루브 어택(Groove Attack)을 통해, 그다음 이 년(레이블의 앨범 제작 활동은 소속 음악가들과 계약 관계가 일제히 정리된 2009년을 전후로 막을 내렸으며, 그 뒤로는 인터넷 플랫폼인 Aggro.TV를 통한 영상물 배포에 중점을 뒀습니다)은 유니버설 뮤직 그룹을 통해 배급됐습니다.
처음으로 아그로 베를린과 계약한 래퍼들이 바로, 로얄 벙커에서 이적한 지도와 B-타이트입니다. 둘은 어릴 적부터 교분을 쌓았습니다. 이란계 혈통이라고 밝힌 지도는 아직 동베를린에 속했던 프렌츠라우어베르크에 살다가, 1988년, 서쪽으로 넘어와, 망명을 신청하고 기다리던 이들이 집단생활한 베딩의 임시 숙소에 머물렀고, 이후에는 뤼베크로 떠났다가 서베를린으로 돌아왔습니다. B-타이트는 독일인 어머니와 아프리카계 미국인 아버지 사이에 미국에서 태어나, 베를린에서 자랐습니다. 지도와 B-타이트, 두 친구 뒤로는 베를린 쇠네베르크 출신의 부시도, 드라이아이히에서 태어나, 베를린 크로이츠베르크에서 성장한 레바논계 독일인 래퍼, 토니 디(Tony D), 플레어, 튀르키예계 독일인 래퍼, G-Hot, 동베를린 출신의 여성 래퍼, 키티 캣(Kitty Kat) 등이 아그로 베를린에 합류했습니다.
레이블의 색깔은 "갱스터 랩"으로 대표됩니다. 쿨 사바시가 로얄 벙커 등지에서 그러한 음악을 이미 들려준 터라, 아그로 베를린의 래퍼들이 미개척지에 발을 들이지는 않았습니다. 단, 80년대 말에 이미 N.W.A의 <Straight Outta Compton>이 크게 성공한 미국 서부 해안에서와는 달리, 이들은 여전히, 주로 카세트테이프를 들고 틈새시장을 공략하는 형국이었습니다. "아트 디렉터" 스펙터는 상황을 바꾸기 위해, 대개 길거리에서 힘들게 성장한 래퍼들의 모습에 세련된 포장지가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이 과정에서 누구보다 빠르게, 대중의 눈에 보이는 시각적 인상이 중요하다는 점을 알아챘습니다. 그는 레이블의 래퍼들에게 이야기를 부여했고, 각자 맞춤형 로고와 분장 등을 지원했습니다. 지도의 특징적인 해골 가면은 그의 탁월한 감각을 보여준 "홈런"입니다. 부시도의 데뷔 솔로 앨범, <Vom Bordstein bis zur Skyline>과 지도의 데뷔 앨범, <Maske>를 비롯한 17개 창작물이 청소년에게 해로운 출판물을 관리하는 연방 기관(Bundeszentrale für Kinder- und Jugendmedienschutz)의 심의 중 색인화하여, 아그로 베를린, 브랜드의 정체성을 더욱 강화했습니다.
스펙터가 빚은 세계는 어느덧, "독일어로 쓰인 랩"의 인쇄 연판이 됐습니다. 뮤직비디오 속, 그야말로 전신 무장한 래퍼들이 어두운 도시 골목에서 자세를 잡고, 그들이 살아온 일생, 범죄에 노출되기 쉬운, 한없이 위험한 거리에서 생존과 사회 발전에 대한 꿈에 대해 거창한 말을 속사포로 쏟아내는 장면이 "독일 힙합"이라는 훨씬 큰 갈래에 대하여 일반적인 음악 소비자가 갖는 매우 명확한 연상, 표상입니다. 이는 아그로 베를린의 대표 주자들이 독일에서 힙합 음악 시장의 확장, 장르의 대중화에 그만큼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방증이기도 하지만, 당연히, 하이델베르크에서부터 출발한 이 거대한 문화의 다양하고도 복잡한 여러 얼굴을 모두 담지는 못합니다. 독일어권 힙합 연구의 선두 주자로 평가받는 하이디 쥐스는 자기 돌봄과 가정 복지, 사회 복지 따위의 주제가 이내 모습을 감춘 독일어 랩은 신자유주의 사회진화론과 체념해 버린 허무주의 사이를 헤엄치다가 그 중간 어딘가에 정신을 두고, 공격적인 언어 행위로 포장한 뒤에, 이는 사회적 불평등의 결과라고 주장한다고 썼습니다.
사실, 아그로 베를린이 내세운 갱스터 랩은 그 자체로 논란거리가 다분합니다. 이 갈래의 곡들에 주로 나타나는 내용 가운데는 불평등과 사회에 대한 비판만큼이나 폭력, 물질주의, 여성 혐오 따위의 미화가 만연하기 때문입니다. 주제는 아래로부터 계급 정치와 신자유주의 사이 어딘가, 이민 이후 정체성 확립과 다문화 사회의 실패에 대한 공포심을 자극하는, 양극화한 사회에 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루는데, 그 음악들이 주는 인상과 그 안에 투영된 자아를 분석하려면, 이민과 노동 시장의 자유화, 복지국가에서 사회의 재구조 시 발생하는 불평등에 대한 갈등을 그 배경에 알아야 합니다. 예를 들어, 세계화의 맥락에서는 접근성과 참여, 곧, 사회적인 기회와 소속감의 문제를 일그러진 사회적 수용과 결합하고, 무리에서 소외되고 낙오되는 데 대한 두려움의 경험 속에 분출된 거친 언어적 표현을 갱스터 랩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자본과 노동 사이 갈등뿐 아니라, 문화적인 이질성을 중심으로 뭇 사회 문제가 전개되는 오늘날에는 이러한 해석법이 더욱 힘을 얻기도 합니다. 한편으로 독일 갱스터 랩의 "이국화"는 상대적으로 경제 수준이 떨어지는 도시 내 지역에서 이민자 남성성과 범죄율에 대한 위기 담론과도 함께 놓일 수 있습니다. 베를린 노이쾰른과 크로이츠베르크, 또는 쇠네베르크에서 사회 문제가 끓어오르는데, 공권력이 통제력을 잃으면, 래퍼들이 위협과 색인화에 대한 논란을 추가해, 그를 노래로 옮깁니다. 위험하고 악랄해 보이는 이 이야기는 부르주아 목가적 세계와 극명히 대비돼, 소비자를 사로잡습니다.
사회적 논란의 중심에 서기에 부족함이 없는 내용을 노래하면서도 독일의 갱스터 래퍼들이 비판받기보다 더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배경에는 결국, 그 성공의 주역 대다수가 이민 배경의 남성이라는 사실이 있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이들은 사회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주류의 외부인"이라는 광범위한 지위에서 조잡하고 폭력적인 노랫말이나, 겉으로 보기에 시대착오적인 관점 따위를 일정 수준, 허용받았습니다. 예를 들어, 아그로 베를린에서도 제일 많은 문제/논란을 달고 다닌 래퍼라고 할 수 있는 부시도는 기회가 날 때마다 다른 래퍼, 경찰, 동성애자 집단, 심지어는 튀르키예 출신의 자유민주당(Freie Demokratische Partei) 소속 정치인, 세르칸 퇴렌 등에 싸움을 걸었습니다. 이는 그 전달자에 따라, 훨씬 날카롭고도 엄격한 사회적 심판의 대상이 될 수 있으며, 사회 전반이 그에 대해 등을 돌릴 수도 있는데, 거꾸로 미 서부 해안의 힙합 진영에 혜성처럼 등장한 에미넴이 "백인 래퍼"로서 더 주목받고 인기를 얻은 점과는 정확히 대척점에 놓이는 면이 있어, 흥미롭기도 합니다.
갱스터 래퍼들이 이전에는 강인함과 호방함의 행동 원리로 완성되는, 자신들에게 친숙한 집단 내 "지배적인 남성적" 습속(아비투스(Habitus))을 들이밀어 성공을 거두었다면, 아그로 베를린이 주류 시장에서 사라진 오늘은 그 논리 구조의 변화를 심각하게 고민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 오래된 남성성에 대한 대안이 부상하며, 독일 사회에서 성 소수자 집단을 받아들이는 태도, 인식에도 큰 변화의 물결이 찾아온 데다, 여성 래퍼의 비율도 점차 증가하여, 도전자를 찾기 힘들어 보였던 그 패권이 흔들리기 때문입니다. 지난 2017년에는 부시도조차 <Papa>라는 곡을 발표하고, 그 뮤직비디오 가운데 '아버지'로서 지금껏 자신이 지켜온 지배적인 남성성과 충돌하는 가치 속, 고뇌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가 한창 전성기를 구가하던 지난 2011년, 독일의 유명 언론인이자, 현 WeltN24 편집장인 울프 포어샤트가 썼듯이, "만일, 독일인들이 차별화하고 다채로운 사회를 원한다면, 그들은 모든 사회 구성원이 처음부터 '옆집 아이'처럼 말하고, 생각하고, 느끼지는 않는다는 사실에 익숙해져야 합니다." 결국, 시대가 변하며, 대중문화에 반영되는, 그 소비자들이 기대하는 아비투스도 변하기 마련이니.
https://baumhaus.tistory.com/843
어쨌든, 아그로 베를린은 한 시대를 풍미하며, 독일에서 힙합 음악 사업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습니다. <<JUICE>>에 의해 2003년 이후 발매된 독일 힙합 음악 중 제일 중요한 곡으로 선정된 <Bei Nacht>가 수록된 <Vom Bordstein bis zur Skyline(부시도)>이 레이블 작품으로는 최초로 독일 음반 순위표(88위)에 진입했습니다. 단, 이듬해, 부시도는 플레어 등과 연락을 끊고, 공개적으로 아그로 베를린 운영진에 대해 날이 선 공격을 퍼부으며 레이블을 떠나, 유니버설 뮤직 그룹과 손을 잡았습니다. 그는 이 과정에서 아그로 베를린과 계약을 해지하려고 악명 높은 조직범죄 집단의 핵심 인물인 아라파트 아부차커르의 힘을 빌린 사실이 후에 드러나, 재판장에 서기도 했습니다.
지도의 <Maske>는 발매되고 단숨에 음반 순위 3위에 올랐습니다. 특히, <Maske>가 세상에 나오기 전, 미리 공개된 그 수록곡, <Mein Block>은 지도를 부시도 못지않게 유명한 래퍼로 만들어 주었고, 베를린의 랩 현장이 전국적인 규모로 언론에 주목받는 데 이바지했습니다. 아그로 베를린은 설립 직후부터, 소속 음악가가 두루 참여하는 <Aggro Ansage> 연속물을 꾸준히 내놓았는데, 역시 <Mein Block>이 실린 <Aggo Ansage Nr. 3>가 색인표가 붙기 전까지(2004년 12월, 아그로 베를린의 모든 출판물 중 처음으로 색인됐습니다) 육만 장가량 팔리며 크게 성공했습니다. <Mein Block>은 베를린 라이니켄도르프, 메어키셔스 피어텔(Märkisches Viertel)의 사회상을 그립니다. 서베를린 첫 번째 대규모 주택 개발 단지인 이곳은 소매점과 식당, 학교, 유치원 등, 사회 기반 시설의 구축 속도가 인구 증가율에 한참 뒤처지고, 그 개발 단계 중 방향성이 이리저리 바뀌는 혼란이 거듭된 데다, 각지에서 이주해 온 거주민 사이 사회적 유대감이 상실돼, 오래 시름해 왔습니다. 지도는 자기만의 독립적인 평행 세계로 묘사하는 이 "고립된 거주지"의 문란함, 매춘과 마약 밀매·소비 등 여러 문제를 짚었습니다. 그가 뒤이어 내놓은 몇몇 작품에서 지나치게 폭력적이고 외설스러운 언어의 사용으로 "과연 그와 같은 갱스터 래퍼가 청소년층의 본보기로 적합한지" 자주 언론의 심판대에 올라야 했지만, 적어도 <Mein Block>을 두고는, 그는 늘, 그 정치적인 주제를 강조/자랑해 왔습니다.
2005년에는 플레어의 데뷔 앨범, <Neue Deutsche Welle>와 <Aggro Ansage Nr. 4>, 그리고 <Aggro Ansage Nr. 5> 등이 (그 음악성에 관한 평가는 다소 엇갈렸어도) 연달아 시장에서 긍정적인 지표를 남겼고, 지도가 베를린 크로이츠베르크 출신의 래퍼, 해리스와 합작한 <Deine Lieblings Rapper>가 독일 음반 순위 2위를 차지하기도 했습니다. 이듬해 12월 1일에 발매된 지도의 두 번째 정규 앨범, <Ich>도 많이 사랑받았으니, 이 작업에는 B-타이트, 플레어, 토니 디, G-Hot, 키티 캣 등, 여러 래퍼가 함께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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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래퍼가 쌓아올린 아그로 베를린의 명성에 2007년부터 금이 가기 시작합니다. B-타이트의 데뷔 솔로 앨범, <Neger Neger>가 인종적인 차별과 성적인 차별의 표현으로 뭇사람의 지탄을 받았습니다. 특히, 1990년대 후반부터 독일에서 우익 극단주의 세력이 덩치를 키우자, 위기감을 느낀 토치, D-플레임, 아데 반투 등이 2000년에 설립한 (주로) 힙합 음악가들의 협회, 브라더스 키퍼스(Brothers Keepers)가 B-타이트와 아그로 베를린을 거세게 비판했습니다. 모잠비크에서 일을 찾아 동독으로 온 정육사, 알베르토 아드리아노가 세 명의 네오나치에 의해 데사우에서 살해(2000년 6월 14일)되자, 2001년 7월, 그를 비롯한 우익 혐오 범죄 희생자들에게 바치는 곡(<Adriano (Letzte Warnung)>)을 발표하는 등, 브라더스 키퍼스의 주된 목표가 인종적인 차별과 외국인에 대한 혐오에 반대 목소리를 내는 데 있었기 때문입니다. 토니-L, 제이비어 나이두(비록 나이두는 후에 이 참여에 대해 다시 논란을 만드는 말을 했지만), 다 게름, 치마, 새미 디럭스 등, 유명 음악가들이 일찍이 한데 뭉쳤습니다.
2007년 여름에는 G-Hot과 보스 에이(Boss A)가 <Keine Toleranz>라는 곡을 무료로 인터넷에 별게했는데, 아그로 베를린과 사전에 협의가 이루어지지도 않았거니와 동성애자에 대한 폭력 행위를 부추기는 가사 때문에 베를린의 한 래퍼로부터 고소장을 얻어맞는 등, 또 한 번 도시 힙합 진영을 뜨겁게 달구었습니다. 결국, 아그로 베를린은 G-Hot과 전속 계약을 이르게 해지했습니다. 후에 그는 이 일에 대해 사과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입니다. 토니 디의 <Totalschaden> 등은 부시도와 지도의 앞선 흥행 실적을 거의 따라잡지 못했고, 2008년 1월, 레이블이 유니버설 뮤직 그룹과 손을 잡고 처음으로 발매한 플레어의 <Fremd im eigenen Land>는 다소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어드밴스드 캐미스트리의 그 유명한 곡과 같은 제목 때문에 오해를 샀습니다. 토치는 플레어의 이 작업물이 자신과 그룹에 대한 모욕이라고 했습니다. 꼭 그 이름 탓이 아니라도, 플레어는 우익 극단주의에 가까운 가사와 표현으로 일각에서 꾸준히 비판받아 왔습니다.
2008년 5월에 발매된 지도의 세 번째 앨범, <Ich und meine Maske>가 래퍼와 아그로 베를린에 '첫 번째' 독일 음반 순위 1위 기록을 안겼고, 그는 곧 이 다사나단했던 레이블의 마지막 불꽃이 됐습니다. 이듬해 초부터 플레어 등이 아그로 베를린과 계약을 해지하려고 한다는 소문이 돌았고, 머지않아(2009년 4월 1일) "아그로 베를린의 끝"은 현실로 다가왔습니다. 여러 논란이 반복되고, 지도를 제외하면, 이전보다 시장의 벽이 높아졌다고 느끼기도 했습니다. 슈파이헤는 처음부터 "오락으로서 도발"이 아그로 베를린의 색깔이라고 말했습니다. 플레어와 함께한 <Verrückt wie krass>라는 곡(2006년)에서 지도는 여기저기서 욕설을 내뱉고 때로는 과장하기도 한다며, 선을 넘어야 하고, 사람들이 그에 관해 글을 쓰게 만들어야 한다고 노래한 바 있습니다. 이들은 2000년대, 그 어느 때보다 맹렬하게 타오르고 사라진 아그로 베를린이라는 화염병의 성격을 명료하게 드러냅니다.
아그로 베를린의 사실상 해단 이후, 독일에서 그만한 상업적 성공을 연거푸 거둔 갱스터 래퍼를 찾기란 어려워졌습니다. 2013년 2월에 공개된 콜레가(Kollegah)와 파리드 뱅(Farid Bang)의 <Jung, brutal, getausschend 2>가 발매 일 주 만에 팔만 장을 판매, 음반 순위를 석권했고, 이듬해 세상에 나온 콜레가의 네 번째 정규 앨범, <King>이 매우 빠른 속도로 십만 장 넘게 나가며 그의 경력 중 제일 큰돈을 안겨준 작품으로 유명해졌지만, 성차별과 동성애 혐오, 음모론과 반유대주의 발언, 폭행 혐의 형사 재판에서 벌금형 선고 등, 여러 사건으로 끊임없이 구설에 오른 콜레가는 지난달 초, 자신의 열세 번째 정규 앨범인 <Still King> 공개와 함께 결국, 래퍼로서 경력의 끝을 고했습니다. 그는 때로 그 사실을 부인하며, 자기 음악에 "갱스터 랩"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싫어한다지만, 헤센주 프리트베르크에서 태어나고 라인란트팔츠주에서 자라, 뒤셀도르프에 터를 잡고 활동한 콜레가가 아그로 베를린 래퍼들의 유산을 기반으로 사랑받았다는 점은 비교적 자명합니다.
니더작센주의 레어에서 2012년에 결성한 102 보이스(102 Boyz)도 아그로 베를린의 영향을 받아, 오랫동안 독일 힙합의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구역에서 활동한 팀입니다. 창립 시 구성원인 쿠바(Kkuba102)와 스쿠프(Skoob102)에 차포(Chapo102)와 스택스(Stacks102), 아디크트(Addikt102), 듀크(Duke102), 토니(Toni102) 등이 가세, 그룹을 완성했습니다. 각자 개인 활동 영역도 점차 넓혀 왔는데, 기본적으로 이들은 갱스터 랩에 트랩을 섞었습니다. 가사의 주된 주제는 과음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로얄 벙커와 아그로 베를린 등, 베를린 힙합 진영, 넘어서는 독일 힙합을 주름잡았던 레이블들의 힘이 조금씩 빠지던 2000년대 말 이후, 2010년대 초는 스마트폰이 대중에 보급되며 "스마트 혁명"이 본격화한 시기입니다. 이는 구태여 보탤 필요도 없이 음악 산업에도 큰 변화를 불러왔습니다. 아그로 베를린의 래퍼들이 인터넷에서 기승을 부리는 불법 음원 다운로드에 시름하거나, 로얄 벙커와 아그로 베를린 모두, 음반 제작은 그만두고, 대신, 가상 공간에서 활동에 더 공을 들이기 시작한 모습 등이 이 변혁기를 레이블들이 어떻게 맞았는지 보여줍니다. 102 보이스는 사운드클라우드(SoundCloud)에 곡을 올려서 자신들을 알렸습니다. 2007년, 베를린에서 프로젝트를 시작한 이 플랫폼은 잘 알려졌듯이, 대형 레이블의 지원을 받지 않는 "아마추어"도 자유롭게 자기 음악을 공유하고, 자신을 홍보할 수 있는 수단입니다. 시대가 변하고 있습니다.
요즈음 베를린에서 가장 뜨거운 힙합 행사로는 언릴리즈드 베를린(Unreleased Berlin)을 들 수 있습니다. 매달 한 번, 열 명 이상 되는 힙합 음악가가 아직 공개된 적 없는 곡을 청중 앞에 선보입니다. 지난해 발표한 데뷔 정규 앨범, <Glas>로 최고 인기 가수의 반열에 오른 니나 추바(Nina Chuba)가 올 초, 신곡 <NINA> 발매 전에 무대에 올랐고, 미국 남부 힙합의 영향을 받은 유명 래퍼, 트레트만(Trettmann)과 영국의 드릴 래퍼, 헤디 원(Headie One), 에이치(Aitch) 등도 이곳을 찾았습니다. 심지어, 베를린 빌머스도르프에서 성장한 인기 래퍼, 스키 아구(Ski Aggu)는 두 번이나 왔습니다. 물론, 이제 막 자기 얼굴과 자기 음악을 알리고 싶어 하는 신인들도 줄을 잇습니다. 여성과 남성, 스트리트 랩과 팝 랩의 균형이 이 공연 구성의 원칙입니다. 누군가를 차별하는, 혐오를 부추기는 가사만 없다면.
35유로를 내고 공연장을 찾은 관객이 누가 그날 무대에 서는지 모른다는 점이 언릴리즈드 베를린을 특별하게 만듭니다. 그야말로 "깜짝 무대"가 줄줄이 펼쳐지는 셈입니다. 이는 행사를 처음으로 기획한 페데리코 바탈리아와 바우미르 홍 토메 드모라, 메흐메트 퀴취크, "세 친구"가 스탠드업 코미디 쇼에서 영감을 받은 데서 그 이유를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누가 무대에 오르는지 모르면서도 사람들은 행사장을 찾아, 객석에 앉습니다. 그래서 어떠한 준비 없이, '편견 없이' 앉아 있는 "평가단" 앞에서 코미디언은 자기가 준비해 온 농담을 시험해 볼 수 있습니다. 전부 성공적이지는 않아도, 대체로 성공적이라면, 관객은 충분히 웃음 짓습니다. 이러한 전략이 성공적이었다는 사실은 언릴리즈드 베를린이 지금껏 두 차례, 더 큰 공연장으로 옮긴 데서 확실히 드러납니다. 2023년 6월, 제1회 공연에는 200명가량이 행사장을 찾았는데, 그 뒤로 세 친구는 600명을 수용하는 나이트클럽으로, 그다음에는 다시 그 두 배인 1,200명이 메우는 페스트잘 크로이츠베르크로 대관 장소를 바꿔야 했습니다.
미발매 곡이 흘러나오니, "듣자마자 몸을 맡기고 싶을 정도로 짜릿해도" 관객이 그를 따라 부를 수는 없습니다. 여기에, 언릴리즈드 베를린을 찾은 관객에게 금지된 또 하나의 행위는 공연 중에 휴대전화를 꺼내서 녹화/녹음하기입니다. 이는 오늘날, 음악 시장을 뜨겁게 달구는, 인기 있는 거의 모든 공연과 차별화합니다. 화려하게 장식된 테일러 스위프트의 디 에라스 투어(The Eras Tour)는 물론, 올여름에 독일을 찾았던 트래비스 스콧의 콘서트에도 공연 내내 스마트폰을 들고 방방 뛰며 환호하는 관객이 구름떼처럼 몰렸습니다. "FE!N 떼창"도 없고, 공연 후, 관객들이 자랑하듯 올리는 인스타그램 스토리도 없습니다. 그런데, 조금은 놀랍게도, 또 역설적으로, 언릴리즈드 베를린은 소셜 미디어를 타고, 독일의 힙합을 사랑하는 집단에 "꼭 참석해야 하는 행사"로 빠르게 발전했습니다. 언릴리즈드 베를린 공식 인스타그램에 올라오는, "진짜 결정적인 순간"은 교묘하게 빠진 듯한 그 짧은 공연 영상들이 다른 데서는 정보를 주지 않는, 그래서 더 궁금한 그 현장의 분위기로 많은 사람을 끌어모으면서입니다.
세 친구는 모두 음악을 제작했기 때문에 음악가들이 얼마나 많은, 아직 빛을 보지는 못했으나, 보석과도 같은 미공개곡을 갖고 있는지 잘 알았습니다. 언젠가부터 좋은 힙합 행사가 부족해진 베를린 음악 시장에서 그들은 그 미공개곡의 힘을 빌려, 새로운 파장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무명 음악가의, 아직 발매조차 되지 않은 곡을 들으며 뭇사람이 몸을 움직이고 환호하는, 낯설지만 익숙한 광경을 만들며. 힙합이 "하입(Hype)"을 만드는 조금 특별한 방법입니다.
록 음악 평론가로 이름을 날린 에든버러 예술대학(Edinburgh College of Art)의 사이먼 프리스 교수는 인기 있는 음악이 물리적인 경계를 넘어서 정체성의 망을 만든다고 연설합니다. "외국의 것"을 들여왔지만, 그 안에서 새로운 문화를 뻗어 낸 독일 힙합의 발전사는 그를 뒷받침하는 하나의 사례로 손색없습니다. 모두가 그를 이룰 수는 없지만, 누구나 꿈을 꿀 수 있습니다. 오늘도 독일에서는 누군가 힙합을 통해 자기 인생에 새로운 전환점이 찾아오기를 학수고대합니다. 그를 비난할 수 있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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