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겔라 메어클은 그랬습니다

2024. 11. 29. 21:00Berlin

2020년, 연방의회에서 앙겔라 메어클 총리와 크리스티안 린트너(re. unten). [ⓒ Kay Nietfeld/ picture alliance]

 

 전 독일연방공화국 총리, 앙겔라 메어클이 도널드 트럼프, 블라디미르 푸틴을 상대한 자신의 경험, 프리드리히 메르츠와 자유민주당(Freie Demokratische Partei (FDP))을 향한 자신의 견해, 그리고 자신이 저지른 실수에 관한 물음에 답합니다.

 일흔의 앙겔라 메어클은 자서전을 쓴 바로 그곳, 베를린 미테의 낡은 아파트에서 사람들을 맞습니다. 그는 아직 그 인쇄본을 가진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역주: 그의 자서전, <<Freiheit>>는 <<슈피겔>>과 면담을 마친 지난 26일, 화요일에 출판됐습니다)로서, 자기 책을 자랑스럽게 보여 줍니다. 이 크고 두꺼운 책은 700쪽에 달하며, 메어클의 동반자이자 보좌관인 베아테 바우만이 공동 집필했습니다. 면담 중 그도 동석했지만, 그는 거의 개입하지 않았습니다. 전 총리는 흥에 겨워 자신과 책에 관해 설명하고 싶어 합니다. 단, 현재 정치적 지형을 먼저 짚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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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주: 아래로 질문자의 말(굵은 글씨)과 앙겔라 메어클의 답변이 교차하며 이어집니다.

 

총리님, 세계는 위기의 굴레에 빠져서 휘청이고 있어요. 많은 독일인이 미래를 우려하는데, 당신도 그런가요?

 저는 근본적으로 낙관적인 사람이지만, 사람들이 우려할 만도 합니다. 총리로서 제 임기를 돌아보면, 초기 이 년은 총리로서 기본적인 업무를 익혔고, 그 이후로 많은 위기가 닥쳤습니다. 우리는 실제로 그때부터 갈등의 숫자가 증가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외부에서 판단하시기에, 오늘날 정치가 더 어려워졌을까요?

 인터넷에서 새로운 사회적 소통이 가능해지면서 회색 음영을 보고 타협할 줄 아는 능력에 대하여 흑백 논리가 점점 우세를 굳힙니다. 모든 상황을 하나로 묶고, 유럽을 하나로 뭉치게 하는 데 전보다 큰 노력이 필요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언젠가 제게 서로 다른 의견을 다루는 방법에 관하여 조언하신 적이 있습니다. "구부리고, 구부리고, 구부리십시오. 단, 깨지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제 시대에도 그렇게 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인제는 상황이 더 어려워졌습니다.

 

미국 대선 전에 완성한 회고록을 곧 출판해요. 거기서 당신은 카멀라 해리스의 성공을 진심으로 기원하는데, 도널드 트럼프의 당선 소식을 듣고는 어떤 생각이 들었나요?

 여론 조사가 '또' 틀렸습니다. 해리스 씨가 가까스로 승리할 수 있다는 보도가 얼마나 많은 매체 면을 채웠습니까? 그렇게 여섯 시에 일찍 일어나서 휴대전화를 보면…

 

그러면요?

 유감스럽습니다. 2016년에 힐러리 클린턴이 못 이긴 일이 이미 제게는 실망스러웠습니다. 저는 그와 다른 결과를 바랐습니다.

 

G7 정상회담을 위해 방문한 2018년 캐나다에서 앙겔라 메어클과 도널드 트럼프. [ⓒ Jesco Denzel/ Bundesregierung/ DPA]

 

트럼프에 관해 어떤 생각을 갖고 계시나요?

 정치계 누군가가 상호 이로운 상황은 허용하지 않고, 대신, 언제나 승자와 패자만 두려 한다면, 그는 다자주의(Multilateralismus)에 있어 대단히 어려운 과제입니다.

 

인제 당신은 현직의 제약에서 벗어났으니, 더 명확히 해줄 수 있을 듯한데요.

 그는 절대 저와 맞지 않았습니다. 저는 아마 동독에서 보낸 시절로부터 영향을 받기도 했을 텐데, 행간 읽는 법을 배웠습니다. 명확성을 찾으며 서로를 능가하기가 정치적 미덕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너무 많은 나쁜 일이 일어날 수 있으므로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최상급을 낭비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는 분명히 이에 대하여 다르게 생각하는데) 트럼프와 같은 공간에 있는 기분이 어땠나요?

 전형적인 장면이 있었습니다. 2017년에 백악관을 방문했을 때 저는 그에게 사진기자들과 악수하라고 설득했습니다. 왜냐하면, 건설적인 방식으로 생각건대, 그들이 그러한 그림을 원한다는 점을 그가 알아채지 못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물론, 그의 거절은 계산된 거절이었습니다.

 

트럼프를 상대하기 위해 독일연방공화국 총리는 무얼 알아야 하나요?

 트럼프는 매우 호기심이 많았고, 모든 세부 사항을 정확히 알고 싶어했습니다. 그러나, 자기 실리를 좇고, 자신은 강화하고 상대는 약화하는 근거의 논점을 찾기 위할 뿐입니다. 방에 사람이 많을수록 승자가 되고자 하는 그의 열망은 더욱 커졌습니다. 당신은 그와 심심풀이로 이야기 나눌 수 없습니다. 매 만남은 '당신 또는 나'의 경쟁입니다.

 

책에서 당신은 부동산 재벌로 시작한 그의 정치 성향을 "각 부동산은 한 번만 부여받을 수 있었습니다. 만일 당신이 얻지 못했다면, 다른 누군가가 그를 얻었습니다."라고 설명했어요. 다른 정부 수뇌들도 이에 적응해야 할까요?

 무슨 일이 있어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러지 못하면, 정치적으로 그 무엇도 성취할 수 없습니다.

 

그는 세계 평화에 대한 위협이 되나요?

 그는 전 세계, 특히 다자주의에 대한 도전입니다. 지금 우리를 기다리는 일을 진정 과소평가해서는 안 됩니다. 당장 이 대통령 뒤에는 달러화를 통해 세계 통화 시스템에도 매우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세계에서 제일 강력한 경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미국으로부터 받는 제재의 영향에 비하면, 우리가 더는 미국 기업들과 거래하지 않겠다고 말하기는 실로 우습습니다.

 

트럼프에 의한 도전이 2016년과 비교하여 더욱 거세졌나요?

 인제는 막대한 자본력을 갖춘 실리콘 밸리의 대기업들과 그가 맺은 동맹이 눈에 띕니다.

 

트럼프가 당국 수장으로 앉히고 싶어 하는 억만장자, 일론 머스크를 암시하시는군요.

 그와 같은 사람이 지구 저궤도를 도는 전체 인공위성 60%의 소유자라면, 우리는 정치적인 문제 외에도 그에 대한 엄청난 우려를 품게 됩니다.

 

머스크가 그의 기업 제국과 그의 소셜 미디어 플랫폼인 X가 도달하는 반경으로 트럼프보다 더 큰 위협이 될까요?

 그렇게까지 비약하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정치는 힘 있는 자와 일반 시민 사이에서 사회적인 균형을 제공해야 합니다. 금융 위기와 유럽 국가 부채 위기, 대공황 시기에 정치는 상황을 바로잡을 수 있는 마지막 권위자였습니다. 이 마지막 권위자가 자본력으로든 기술적인 역량을 통해서든 기업으로부터 너무 큰 영향을 받는다면, 이는 우리 모두에게 전례 없는 도전이 될 터입니다.

 

거대한 인터넷 플랫폼에 대하여 정치는 무력한가요?

 아닙니다. 민주주의 체제에서 정치는 절대로 기업에 대하여 무력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곳에서, 예를 들어, 독일을 위한 대안(Alternative für Deutschland (AfD))이 소셜 미디어로 조장하는 분노에 균형추를 맞추기는 중요합니다.

 

분노가 핵심어예요. 올라프 숄츠가 신호등 연합(역주: 적색의 독일 사회민주당 =Sozialdemokratische Partei Deutschlands (SPD), 황색의 FDP, 그리고 녹색의 동맹 90/녹색당 =Bündnis 90/Die Grünen (Grüne))의 와해를 발표했을 때, 그는 연정 상대인 크리스티안 린트너(역주: FDP 당대표이자, 올라프 숄츠 내각의 연방 재무부 장관)를 날카롭게 공격했어요. 그가 속이 좁다면서 신뢰를 저버렸다고 비난했죠. 반대로 린트너는 총리가 그의 취임 선서를 어기도록 종용했다고 불평했어요. 이 일련의 사건을 보며 어떤 생각이 들었나요?

 바로 든 생각은 "남자들이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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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주: 넓은 정치 스펙트럼에서 중도좌파로 분류되는 SPD, 좌파인 그뤼네, 중도우파인 FDP가 뭉쳤습니다. 이 연정이 서로 가장 빈번하게 으르렁거린 부문이 바로, 경제입니다. 일례로, 중국산 전기차 광풍에 밀려, 오랫동안 독일 경제를 상징하는 얼굴 중 하나였던 자동차 기업들이 연중 난관에 부딪히자, 크리스티안 린트너는 기업 감세와 규제 완화 등을 해법으로 제시했습니다. 연정에 참여하는 나머지 두 정당은 여기 반대했는데, FDP는 굴하지 않고 이달 초, 해당 정책을 담은 독자 보고서를 발표했습니다. 이 문건의 공개와 함께, 린트너와 당이 올라프 숄츠 총리의 역린을 건드렸다는 분석이 퍼졌습니다.

 

그를 보고 일반적인 남성성을 떠올린 이유는 무엇인가요?

 예를 들어, 상황을 지나치게 개인적으로 받아들이는 점입니다. 정치에서는 그를 최대한 피해야 합니다.

 

숄츠처럼 분노에 찬 연설을 하고 싶다는 유혹에 빠진 적이 있나요?

 여성 총리로서, 그리고 남성 총리들도 마찬가지인데, 서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격렬한 상황에 놓입니다. 여기에 늘 냉정하고 일정한 균형이 잡힌 방식으로 대응하기란, 비인간적입니다. 여러 감정을 느끼지만, 사무실 벽에 대고 소리치는 편이 독일 대중에게 그렇게 하기보다 낫습니다. 총리로서 저도 며칠씩 마음 상태를 다잡을 수 없었지만, 분노는 접어두고, 제가 앞으로 나아가는지 확인해야 했습니다.

 

올라프 숄츠가 대중에게 자신을 드러내는 그 방식으로 그 지위의 품격을 떨어뜨렸나요?

 대표적인 예로 품위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저였다면, 그런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독일연방공화국 총리는 헌법기관인 연방 정부를 이끕니다. 그 직위에는 품격이 있고, 그가 항상 당신을 인도해야 합니다.

 

올라프 숄츠가 마침내 지도력을 보여 주었다는 반응도 있었는데요.

 정도를 벗어나서 명확한 태도를 보여주면, 무엇보다 아군은 늘 훌륭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효과는 대개 오래 지속되지 않으며, 여기서도 그렇다고 봅니다. 올라프 숄츠가 그렇게 노골적으로 발언했을 때, 청중은 이미 약간의 불안감을 느꼈습니다. 몇몇 사람은 '맙소사', 우리 총리가 저리 통제 불능이라면, 우리나라는 또 얼마나 나쁜지 생각했습니다.

 

당신과 FDP의 연정도 조화롭지는 못하여, 결국, 2013년에 FDP가 연방의회에서 쫓겨났어요. 책에서 당신은 "정부 여당과 야당이 동시에 되려는 시도는 잘 되기 어렵습니다."라고 썼죠?

 FDP와 같이 작은 연정 상대, 연방 수준의 바이에른 기독교 사회 연합(Christlich-Soziale Union in Bayern (CSU)), 그리고 오랫동안, 그뤼네와 공동선을 시야에 두기는 항상 어렵습니다. 그들은 때로 모든 정치 스펙트럼이나 온 연방 공화국을 감싸지 않고, 그 지지자들에게 무언가 특별함을 제공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FDP의 책임이 아니라는 말인가요? 린트너와 자유당 지도부가 몇 달간 연정을 무너뜨리려고 분명한 시도를 해 왔다고 알려졌는데요.

 그에 관해 제가 자세히 언급할 수는 없습니다. 대신, 저는 FDP를 쉬운 연정 상대로 본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존재하고, 정치는 현실을 직시하는 데서 시작합니다.

 

2017년에 당신은 그뤼네, 자유당과 자메이카 연정(역주: 독일 기독교 민주 연합 =Christlich Demokratische Union Deutschlands (CDU), CSU '우니온'의 검은색과 그뤼네의 녹색, FDP의 황색 연합)을 구성하는 데 실패했어요. 신호등 드라마와 돌아보며, 당신은 그에 만족하시나요?

 아닙니다, 아닙니다. 연정이 어떻게 작동할지는 예단할 수 없습니다. 자메이카 연정에도 일이 많았을 테고, 저는 다양한 상대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내야 했을 터입니다. 그러나, 린트너 씨가 (자메이카 연정 구성을) 원하지 않았기에 그러한 질문이 성립하지 않았습니다.

 

당신의 자서전은 700쪽에 달하는데, 400면에 총리로서 당신의 16년을 다뤘어요. 당신의 전임자 중 일부는 훨씬 짧은 임기를 지나고 여러 권의 긴 책을 집필했죠. 왜 당신은 이 정도로 제한했나요?

 우리가 이 책과 다른 접근법을 가졌기 때문으로, 서문에도 적었습니다. 저는 인제 일흔이고, 동독에서 35년, 정계에서 35년을 보냈습니다. 겉보기에 두 개의 삶이지만, 사실은 하나의 삶으로, 전반전 없이는 후반전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든 두 권의 책이 나오는 일을 피하고 싶었습니다. 그러지 않으면, 일부는 동독에서 시간에 관해서만 읽고, 다른 일부는 정치인으로서 시간에 관해서만 읽을 테니. 그리고 700쪽이면, 읽기 자료로 충분하지 않습니까?

 

글쎄, 가격 차이는 크게 나죠. 우리는 헬무트 콜이나 버락 오바마와 당신의 관계에 관해 새로운 점을 거의 알지 못해요. 프랑스와 중국 이야기가 일부 전개되고, 이스라엘을 제외하면, 중동 이야기는 공백이에요. 책을 빨리 닫고 싶었나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의 원래 꿈은 심지어 500쪽에 불과했습니다. 무언가를 이해하기 쉽게 하려고 끝없이 글을 쓸 필요는 없습니다. 그리고, 맞습니다. 베아테 바우만과 저는 특히 1990년 이후 제 정치 활동에 관한 부분에서 상당히 제약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총리직이 오늘날 직면한 주요 논쟁거리에 관한 질문을 피하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책에서 다루어지지 않은 내용이나, 자신이 좋아하는 주제에 관하여 더 많이 읽고 싶어 하는 사람들을 우리가 실망하게 하리라는 점을 압니다. 하지만, 우리는 역사가만을 위해 이 책을 쓰지 않았습니다. 우리 목표는 평범한 사람도 이해할 수 있게, 역사적 사실을 중심으로 정치를 전달하기입니다.

 

우리는 당신이 CDU와 사이에서 진정 행복했던 순간을 하나만 묘사한 점을 발견했어요. 바로, 2000년에 의장으로 선출됐을 때죠. "저는 CDU와 저 사이에 그토록 하나가 된 느낌을 주는 당대회를 다시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매우 특별한 순간이었습니다. 당 지도자의 삶에서 그러한 순간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하지만, 저는 CDU에서 늘 편안함을 느꼈습니다. 18년 동안 저를 지지해 주었는데, 함께한 당원들의 의리, 연대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습니다. 저는 매 당대회에 참석해서 저녁 시간에 사람들과 같이 식사하고 오래도록 이야기 나누기를 즐겼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당내 경쟁자들이 당신에 대하여 어떻게 행동했는지도 설명했어요. 안데스 모임(역주: 서독 출신 남성, 주로 가톨릭교도 정치인들의 비공개 모임)이 당신을 "산재" 취급했다고. 이 CDU는 영원히 당신에게 낯설게 남아 있나요?

 정당은 권력 기구이고, 그를 위한 암투가 존재합니다. 저는 안데스 모임조차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80년대 중반부터 거기 있었고, 헬무트 콜의 퇴임 시기를 도모하고자 했는데, 그들 시선에는 기대보다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러다가 독일 통일이 이루어졌고, 정치 자금 추문(역주: 90년대에 CDU 정치인들이 기부금 은닉과 해외 금융계좌를 통한 불법적인 전신 송금 등으로 자금을 조달했다는 추문으로, 이 혐의가 제기된 뒤에 헬무트 콜과 발터 라이슬러 키프, 볼프강 슈보이블레 등, 당내 유력 인사들이 몰락하고, 앙겔라 메어클과 롤란트 코흐 등이 득세했다고 평가됩니다)으로 수혜까지 입은 여성이 갑자기 튀어나왔습니다. 단, 그렇다고 제 정당이 제게 멀게 느껴지지는 않습니다.

 

2022년, 베를린에서 연방 총리 헬무트 콜 재단 설립 기념 행사에 참석하여 서로를 마주한 앙겔라 메어클과 프리드리히 메르츠. [ⓒ Political-Moments/ IMAGO]

 

한편, CDU는 "메어클 시대"에서 완전히 등을 돌렸어요.

 거대한 스펙트럼을 지닌 대중 정당이 저와 함께 18년을 보내고, 다른 성향을 지닌 사람을 염원하기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몇 주 전, CDU가 주최한 제 생일 파티에 저는 프리드리히 메르츠의 성공을 빌면서 CDU는 제 정당이라고 말했습니다. 비록 오늘은 초점이 다르고, 제 기준에 때때로 무언가 빠졌더라도 그러합니다.

 

메르츠에 관하여 당신은 이렇게 썼어요. "실은 처음부터 문제가 있었습니다. 우리 두 사람 다 당의 수장이 되고 싶어 했습니다." 메르츠는 2002년, 당신이 원내 대표직을 빼앗자, "매우 실망했습니다."라고 했어요. 그를 대하는 중에 당신이 실수라도 했나요?

 아닙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그는 분명히 자신이 속았다고 느꼈어요. CDU의 제일 중요한 얼굴 하나를 잡아야 하지 않았나요?

 당시 그의 판단이었습니다. 저도 2002년, 총리 후보 경선에서 에드문트 슈토이버에게 패했는데, 제게는 그를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저는 CDU 일부 정파가 내내 발목 잡기만 하면, 우리가 선거에 절대 이기지 못하리라는 점을 깨달았습니다. 슈토이버는 우니온을 더 잘 하나로 묶을 수 있었습니다. 저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와 같은 통찰력을 기대했습니다.

 

메르츠는 연방 정부에서 일한 경험이 없고, 때로는 다소 성미가 급한 듯 보여요. 그가 총리가 될 수 있을까요?

 그는 앞으로 그를 증명할 수 있는 선거 운동을 벌여야 합니다.

 

우리는 당신이 그를 그 직책을 맡을 만한 사람으로 신뢰하는지 알고 싶어요.

 이 정도까지 온 사람은 누구나 그럴 만한 몇 가지 자질을 갖추고 있어야 합니다. 예, 이유 없이 총리 후보가 되지는 않습니다.

 

당신의 여성 됨은 책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당신의 외모는 조롱당했어요. 우리가 여기서 당신에게 주어진 그 혐오스러운 명칭을 재차 언급하지는 않겠지만.

 정치 활동 초기에 저는 제가 직면한 적대감에 대하여 종종, 아주 혼란스러웠습니다. 하지만, 바우만 씨는 제게 당시 노동부 장관이었던 노어베어트 블륌(역주: 그는 장기 요양 보험에 관한 열띤 옹호나, 그 유명한 "연금은 안전합니다(Die Rente ist sicher)." 발언 등, 독특한 목소리로 그 시기에 종종 거친 조롱, 힐난의 대상이 됐습니다)이 얼마나 적대적인 대우를 받는지 보라고 말했습니다. 또, "배(die Birne; 배나무 열매)"라고 불린 헬무트 콜을 생각해 보십시오. 돌아보면, 그때 제가 자기연민에 사로잡히지 않은 점에 참 감사합니다. 정치는 연민에 빠진 사람들을 위한 적합한 활동 영역이 아닙니다. 저는 보편적으로 누군가 멋진 경력을 쌓고 싶다면, 너무 예민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특별히 여성으로서 연방 정부를 이끌고 싶다는 동기가 당신에게 있었나요?

 저는 그 일을 원했고, 여성으로서도 그랬습니다. 하지만, 저는 제가 여성으로서 거대한 상징적 표현이 되리라는 생각은 많이 하지 않았습니다. 때때로 여성들에게도 실망했습니다. 제 경험에 비추어, 우리가 '항상' 서로 연대감을 나타내지는 않습니다.

 

당신은 한 번도 스스로 여성 또는 (심지어) 페미니스트라고 소개하지 않은 듯한데, 맞나요?

 그렇습니다. 단, 그가 특별히 의도된 전략은 아니었습니다. 여성 됨에 관하여 말하지 말라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저는 매일 같이 "국민 여러분, 제가 여러분께 한 번 더 상기시켜 드리겠습니다. 저는 여성입니다."라고 말해야겠다고 생각한 적이 없습니다. 동독에서 저는 제 일터의 유일한 여성 과학자였고, 저 외에 여성 사무직도 한 명뿐이었습니다. 그런고로 저는 많은 남성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움직였습니다.

 

당신의 여성으로서 정체성과 동독 출신으로서 정체성 중 어느 쪽이 당신에게 더 큰 영향을 주었나요?

 우리는 글을 쓰면서 그에 관해 자주 이야기했습니다. 저는 동독인으로서 제 정체성이 더 뚜렷했다고 봅니다. 동독에서 삶은 진실되기 위하여 끊임없는, 어느 정도 용기가 필요했습니다. 저보다 훨씬 컸던 저항군의 용기를 말하려 함이 아닙니다. 제게는 그가 괴로움에 빠지지 않고 (현실을) 이겨내는 데 관한 문제였습니다. 후에 저는 종종 연방의회의 제 동료들을 비롯한 서독인들을 보며 자문했습니다. 만일, 국가 보안 당국(슈타지)이 그들에게 접근하려 했다면, 그들은 어떻게 했을지. 그들이 지금 이야기하듯이 용감했을지.

 

임기가 막을 내리기 직전에 당신은 당신의 동독 출신이 족쇄로 여겨졌다는 점을 비판했어요. 책에서는 수년간 동독에서 당신의 삶을 자기 검열을 통해서만(nur >>mit der Schere im Kopf<<) 이야기할 수 있었다고 했죠. 그래도 동독에서 보낸 시간이 당신에게 부담이 됐나요?

 제게 그 시간은 내던져야 할 짐이 아니었고, 오히려 제 삶의 일부였습니다. 저는 통일 이후 몇 년간, 1992년 10월 3일, 한 행사에서 제가 그에 관해 언급한 뒤부터, 언론인들이 수행한 마르크스-레닌주의에 관한 제 대학 의무 과제 사냥에 염증이 났습니다. 그들의 표어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과제물이 어디 있습니까? 그가 무어라고 썼습니까? 인제 우리가 그를 입수했습니다! 몇몇 언론의 눈에는 동독에서 제 삶이 한낱 추문 거리로만 비쳤습니다. 그러나 제게는 그러한 덜 중요한, 또 다른 전쟁터에 설 시간과 기운이 없었습니다.

 

동쪽에서는 당신이 총리로 재직하는 동안, 정치 지형도가 극적으로 변했어요. 오늘날, AfD가 모든 곳에 정착했고, SPD는 여러 군데서 두 자릿수 득표를 위해 분투하며, 동맹 자라 바겐크네히트(Bündnis Sahra Wagenknecht (BSW))는 어느 진영에도 들어맞지 않죠. 튀링엔, 브란덴부르크, 작센을 보세요. 연정이 점차 복잡해지고, 때로는 불가능해져요.

 연정을 구성할 수 있는 사람들이 스스로 그 가능성을 깨뜨리지 않기가 더 중요합니다.

 

당신은 검은색과 녹색(역주: 우니온과 그뤼네)의 연정을 희망하시나요?

 저는 무언가 근본적인 문제를 우려합니다. 마쿠스 죄더와 CSU, CDU 내 다른 인사들이 그뤼네를 그런 식으로 깎아내리기는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뤼네는 매우 다른 견해를 가졌으며, 저는 확실히 그 당이 아닌, CDU의 당원입니다. 그러나, 특히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과 슐레스비히홀슈타인 그리고 바덴뷔르템베르크에서 검은색과 녹색 연정이 활동하고 있으며, 이들이 '가장 성공적이지 않은 연방 주'가 아니므로, 연정을 이룰 가능성을 열어 두어야 합니다.

 

시리아 난민과 앙겔라 메어클. [ⓒ Bernd Von Jutrczenka / picture alliance]

 

당신은 책에서 정치인들이 AfD에 대하여 쉴 새 없이 이야기해서는 안 되며, 문제의 실질적인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고 그들을 수사적으로 앞서려고만 해서도 안 된다고 했어요. CDU를 겨냥한 내용인가요?

 아닙니다. 이는 모두를, 특히 정부를 이끄는 정당들을 향합니다. 그들은 과반의 힘을 가졌을 때, 날마다 무언가를 바꾸자고 요구할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너무 많은 난민이 들어온다고 목소리를 높이면, 사람들이 AfD가 아닌, 자신들을 찍으리라고 믿는 듯 보입니다. 그는 틀렸고, 그 반대입니다.

 

졸링엔에서 이슬람주의자가 세 명을 살해한 사건(역주: 지난 8월 23일에 발생한 사건)처럼 불편한 주제에 관해서는 침묵을 지키기를 바라는 듯 들리는데요?

 그런 뜻이 아닙니다. 졸링엔에서 벌어진 사건은 끔찍하며, 당연히 정당들은 구체적으로 무얼 더 잘할지 이야기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슬람 테러리스트가 몇 주 동안이나 모든 정치적 의제, 특히 연설을 장악한다면, 그는 문제를 해결하는 데나 AfD에 반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당신은 2015년 새해 전야(2015년 12월 31일)에 쾰른에서 발생한 대규모 성범죄와 2016년에 베를린 브라이트샤이트플라츠에서 벌어진 이슬람주의자들의 공격에 관하여 직접 글을 썼어요. 다만, 논리적인 결론에 이르기는 주저하죠?

 그렇지 않습니다. 그 장에는 해결 방법에 관한 설명도 있습니다. 단, 우익 극단주의에 대한 싸움이 국가사회주의 지하조직(Nationalsozialistischer Untergrund)의 끔찍한 테러를 막지 못했듯이, 이민에 관한 모든 정책적인 노력이 이슬람주의 공격을 종식하지는 못했습니다.

 

이러한 범죄는 열린 사회가 그 인류애를 위하여 지급해야 하는 대가일까요?

 제가 보기에 그렇게 말하기는 냉소적이지만, 모든 자유 사회에서는 경악스러운 범죄가 일어납니다. 우리 사회에서도 그가 단지 이민으로 시작되지는 않았습니다. 법치에 필요한 엄격함과 더불어, 우리가 자유와 인간 존엄성의 가치를 테러리스트들에게 빼앗기지 않는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그리하지 않으면, 그들이 이기므로.

 

가해자가 원래 우리 사회 구성원인지, 아니면, 보호받으려고 우리를 찾아왔는지는 중요하지 않은가요?

 단, 그래서 우리는 불법적인 이민이 넘쳐나지 않도록, 누가 우리에게 오는지를 정확히 알기 위해, 주시해야 합니다.

 

하지만, 당신은 2015년 9월 첫 번째 주말, 헝가리에 발이 묶인 난민들을 독일로 받아주겠다고, 정확히 그 반대의 결정을 했어요. 훨씬 더 많은 사람이 이후에 효과적인 통제 없이 들어왔죠.

 당시, 저는 그러지 않으면, 유럽에서 우리의 위대한 가치와 인간 존엄성에 관한 일요일 연설의 모든 신뢰성을 포기하게 된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예를 들어, 독일 국경에 물대포를 설치한다는 발상은 끔찍했고, 궁극적인 해결책이 되지도 못했습니다.

 

책에서 당신은 그때 상황을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기 직전의 프라하 주재 서독 대사관 상황과 비교했어요. 수천 명의 동독인이 국가를 탈출해서 서쪽으로 가겠다며 그곳으로 피난했죠. 당신은 동독에서 과거 때문에 2015년에 난민들과 연대를 보였나요?

 제 행동에 관한 두 가지 해석이 늘 존재했습니다. 하나는 제가 어떻게든 국제 연합 사무총장이 되기를 원해서, 가능한 한 많은 국가에서 제 인기를 높이려고 모두 독일로 들어올 수 있도록 해 주었다고, 다른 하나는 제가 동독에서 외상을 겪는 바람에 국경 문제에 감상적이었다고 말합니다. 둘 다 터무니없습니다. 물론, 대사관의 동독 난민들이 특별 열차를 타고 드레스덴을 거쳐서 떠나던 때의 모습이 머릿속에 떠오르기는 했습니다. 하지만, 그 기억이 2015년의 주요 요인은 아니었습니다.

 

독일을 최대한 봉쇄했다면, 일부 이슬람주의자들의 범죄가 발생하지 않았으리라는 사실이 부담스러운가요?

 저는 항상 너무 많은 이민과 이슬람주의 테러에 대한 사람들의 두려움을 심각하게 받아들였습니다. 축제장에 가서 누군가 당신을 뒤에서 칼로 찌를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들면, 그 순간, 당장은 그러한 위협이 존재하지 않는대도 몹시 불안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지나치게 인색하고 모질지는 않은지 걱정하는 무리도 있습니다. 총리로서 저는 두 집단을 모두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국경을 열어 두기로 하고 며칠 뒤에 당신은 슈판다우의 초기 수용소를 방문했어요. 유명한 셀피가 탄생한 곳인데, 당신은 이 때문에 난민 행렬을 부추겼다고 비난당했어요.

 친절한 얼굴이 보인다고 고향을 떠나고자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저는 여럿의 동독으로부터 난민을 압니다. 그중 헬무트 콜과 악수하는 가능성을 보고 길을 나선 이는 아무도 없습니다.

 

순진한 생각이 아닌가요? 당신은 독재 국가에서 온 사람들에게 '접촉할 수 있는 총리'로 자신을 보였어요.

 누군가 자기 땅을 포기하고 가족과 친구를 남겨둔 채 떠나왔다면, 그 체류 허가 여부와 관계없이 그에게 친절하게 대하기가 당연합니다. 이 연방공화국에서 최고의 삶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지도 않습니다.

 

내무부에서는 머지않아 국경을 다시 폐쇄하는 방안이 검토됐어요. 시행 계획이 준비됐고, 망명 신청자들도 거부돼야 했어요. 당신에 의해 그 계획이 저지됐죠.

 당시에는 어떠한 시행 계획/작전 명령도 보지 못했고, 나중에야 그를 읽었습니다. 저는 당시, 토마스 드메지에르 내무장관에게 국경 통제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나, (무조건적인) 거부는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누군가 망명을 신청하면, 그 내용을 확인해야 합니다.

 

오늘 우니온은 바로 이 해결책, 그러니까 망명 신청자를 국경에서 막는 방법을 주장하고 있어요.

 저는 여전히 그렇게 하기가 옳지 않다고 봅니다. 우리는 국경 통제와 효과 있는 다른 여러 안을 도입했습니다. 하지만, 독일 국경에서 난민들을 돌려보내면, 모두 괜찮아지리라는 가정은 환상입니다. 유럽 연합이 국경을 초월하여 이 문제를 함께 해결해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자유로운 여행이 위협받고 단일 시장 상황이 나빠집니다. 그는 예측할 수 없는 결과를 수반하는, 유럽 통합에 대한 약간의 반전이 됩니다.

 

당신의 유명한 문장이 "우리는 해낼 수 있습니다(역주: 2015년 8월 31일에 드레스덴 난민 수용소를 방문하고 연방 기자 회견에 앙겔라 메어클 총리가 외친 >>Wir schaffen das<<)!"예요. 돌이켜보면, 당신 또한 환상이 있었다고 할까요? 들어오는 사람의 수에 관해, 그들을 받아들이는 데 드는 노력과 비용에 관해?

 매일 일만 명이 들어올 수는 없음을 알았습니다. 유럽 연합과 튀르키예의 협정 협상(역주: 유럽 연합이 튀르키예에 경제적 대가와 외교적 호의를 제공하는 대신, 튀르키예 해안 경비 강화, 그리스와 국경을 넘는 시리아 난민 차단 약속을 받아낸 2015년의 협상)을 주도한 이유입니다. 또, 이민으로 인한 문제들도 발생했지만, 우리는 우리나라가 할 수 있는 일을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2010년에 정치인 메어클은 "다문화주의(Multikulti)"가 완전히 실패했다고 말했는데요.

 제가 그러한 말을 하게 했던 분노를 저는 오늘, 더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다양한 문화가 어떠한 전면적인 노력도 없이 공존할 수 있다는 생각은 참으로 비참하게 실패했습니다.

 

전면적인 노력이요? 수용하는 사회의 책무처럼 들리네요.

 그렇습니다. 수용하는 사회의 개방성과 사회 변화를 향한 의지 없이는 어떠한 통합도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전제 조건은 다른 문화를 향한 최소한의 지식으로, 제가 이미 거기 관심이 있어야 합니다.

 

2000년, 블라디미르 푸틴과 만난 앙겔라 메어클. [ⓒ action press]

 

오늘날 당신의 정치적인 유산에 관해 이야기한다면, 러시아에 대한 정책과 에너지 정책이 특히 비판받아요. 블라디미르 푸틴부터 시작해 보죠. 이 전직 KGB 요원이 당신이 동독에서 만난 슈타지 요원들을 떠올리게 했다는 말이 사실인가요?

 그는 독일어로는 주로 조용히 말했습니다. 슈타지 사람들도 그렇게 하곤 했습니다. 그 점이 제 눈에 띄었습니다.

 

당신은 푸틴을 2000년에 처음 만났어요. 그때부터 그는 자기 계획을 따랐나요, 아니면, 갈수록 급진화했나요?

 저는 그에 대하여 어떠한 환상도 가져본 적이 없습니다. 그는 늘 독재적인 성향을 지녔고, 종종 그의 독선이 저를 화나게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가 2000년에 취임했을 때부터 언젠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리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는 우리, 서방이 항상, 모든 일을 올바르게 처리했는지 자문해야 하는 도약입니다.

 

우리가 그렇게(항상, 모든 일을 올바로 처리) 했나요?

 그에 관해서는 제가 모호함 없이 대답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분명히 하자면, 우크라이나에 대한 푸틴의 급습을 정당화할 근거는 없었고, 없습니다. 단, 서구의 더 큰 단결이 있었다면, 확실히 더 좋았을 터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그래야 했던 만큼 강하지 못했습니다.

 

당신, 자신도 거기 이바지했어요. 미국과 일부 동유럽 국가들은 2008년, 부쿠레슈티에서 열린 북대서양 조약 기구(North Atlantic Treaty Organization (NATO)) 정상회담에 우크라이나가 국방 동맹에 가입할 수 있는 길 열기를 원했는데, 당신은 그를 저지했죠.

 부쿠레슈티에서는 NATO 가입 후보로서 우크라이나와 조지아를 위한 실행계획을 채택하는 안이 논의됐습니다. 저는 이 안건이 그 실행계획을 채택한 뒤로 수년이 될 수 있는, (두 국가의) NATO 가입까지 시간을 고려하지 않은 (막연한) 희망에 기초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임시적인 지위가 푸틴 대통령에 대한 억제책이 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2008년에 NATO 국가들이 군사적으로 개입할 수 있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지 않다면, 우크라이나와 NATO에 어떤 결과가 있었으리라고 보십니까? 저는 그 점을 고려했습니다.

 

그래서 NATO를 쪼개셨나요?

 그 반대입니다. 왜 미국의 태도가 정해진 뒤에 그와 다른 생각을 가지면, 전부 분열을 조장하는 이로 간주합니까? 그때 저는 회원국 후보로서 지위를 주는 데는 반대했지만, 언젠가 우크라이나와 조지아가 NATO에 가입하리라는 원칙적 보장의 타협안에는 동의했습니다. 우리 혼자 그를 고집하지도 않았습니다. 프랑스와 다른 여러 국가가 우리와 뜻을 같이했습니다.

 

2008년 부쿠레슈티에서 행동 때문에 당신이 이번 전쟁의 희생양이 되고 있다고 느끼시나요?

 단순한 느낌이 아니라, 사실이 그렇습니다. 예를 들어, 볼로디미르 젤렌스키는 (민간인을 상대로 한 러시아군의) 끔찍한 학살극 이후에 사르코지, 전 프랑스 대통령과 제게 부차로 오라고 요구했습니다. 부쿠레슈티에서 보인 우리 태도가 부차에서 죽음에 책임이 있다는 분명한 주장이었습니다.

 

그가 부당하다고 생각하시나요?

 저는 그가 거의 삼 년의 전쟁 기간에 보여 준 용기와 결단력으로 미루어, 젤렌스키를 존경합니다. 다만, 부쿠레슈티에서 일에 관해서는 그에게 동의하지 않습니다. 저는 2008년 부쿠레슈티에서도, 끊임없이 경고했습니다. 푸틴은 (물론 저는 거기 동조하지 않습니다만) 소비에트 연방 붕괴를 20세기 최대의 지정학적 재앙으로 여깁니다. 그로부터 그는 러시아가 실존적 위협을 겪는다고 결론짓고, 가능한 한, 갈등을 조장하여 소비에트 연방에 속했던 다른 공화국들을 억누르려 했습니다. 제 경고가 맞았습니다. 2008년에 푸틴이 조지아를 침공했으니.

 

당신은 푸틴에게 우크라이나가 NATO 회원국이 되는 데 대한 실질적인 거부권을 주지 않았나요?

 주지 않았습니다. 그는 가당찮은 이야기였고, 지금도 그러합니다.

 

당시에 푸틴이 무얼 할 수 있는지 그리 분명하게 인식했다면, 당신은 어째서 아무런 결론을 도출하고 행동하지 않았나요?

 사실, 그렇게 했습니다. 제 관점에서는 러시아와 갈등을 평화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노력이 필수였습니다. 동시에 우리는 NATO 이중전략 결정(역주: 1979년, NATO가 소비에트 연방의 트럭 이동식 중거리 탄도 핵미사일 배치에 따른 핵 억제력 공백을 메우고 무기 체계를 현대화한다는 명목으로 서유럽에 준중거리 핵탄두 미사일 198기와 순항 미사일 464기를 배치하겠다고 발표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소비에트 연방과 바르샤바 조약 기구에 유럽에서 준중거리 및 중거리 핵미사일을 상호 제한하자고 한 결정)처럼 억제 원칙도 강화해 왔습니다. 2014년, 웨일스에서 열린 NATO 정상회담에 모든 회원국이 국내총생산의 최소 2%를 방위비로 지출해야 한다는 목표가 설정됐습니다. 그에 따라 추진하는 열정이 제한적이었음은 인정합니다.

 

무엇이 당신의 열정을 꺾었나요?

 독일에서는 정말, CDU 탓이 아니었습니다. 제 국방장관들은 연정 상대인 SPD와 수백 번 논의했습니다. 군사용 드론 구매에 관해, 독일 내 미국산 핵탄두 현대화에 관해. 자세한 내용은 줄이겠습니다.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내각을 이끄는 총리였어요.

 예, 분명히 제가 수상이었지만, 민주주의에서 수상은 그럴 만한 이유로 (힘의) 제약이 따릅니다.

 

한편으로 당신은 푸틴을 절대 과소평가하려 하지 않았어요. 다른 한편으로 당신은 그의 공격성에 대하여 효과적으로 예방하지 못했고, 독일의 국방력을 강화하거나, 우크라이나에 무기를 공급하거나, 러시아산 가스에의 의존을 끝내지도 못했죠. 이러한 근본적인 모순을 책은 풀어내지 못하는데요.

 제가 이 글을 쓰는 중에도 이 토론이 그로써 끝나지 않으리라는 두려움이 일었습니다. 오늘날, 많은 중요한 측면이 잊힙니다. 예를 들어, 우크라이나와 폴란드는 러시아산 가스가 자국 영토를 통과해서 운송되고 그에 관한 대가를 받는 한, 우리가 러시아산 가스를 수입하는 데 근본적으로 반대하지 않았습니다.

 

2014년 크림반도 합병 이후에도 당신이 노르트 스트림 2를 통한 가스 운송으로 푸틴의 전쟁 자금을 채워주려 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러시아는 노르트 스트림 2로 흐르는 가스 없이 전쟁을 시작했습니다. 오늘, 다른 국가들이 푸틴의 전쟁 자금을 채웁니다. 우리가 그때 모든 경제적 관계를 끊었다면, 그때 이러한 일이 일어났을 터입니다.

 

오늘날에도 노르트 스트림 2 사업을 중단하지 않기로 한 결정이 옳았다고 생각하시나요?

 저는 저의 결정들을 옹호합니다. 저는 독일 경제를 위하여 비용 효율적인 가스를 확보하기가 제 임무 중 하나라고 여겼습니다. 인제 우리는 우리나라를 위한 값비싼 에너지 가격의 결과를 보고 있습니다. 러시아와 가스 거래를 중단하는 데 다수표를 확보하지 못했을 테고, 재계에서 지지도 전혀 없었을 터입니다. 저는 또, 노르트 스트림 2가 정치적으로 합리적이라고 봤습니다. 일부 역사가가 수정주의자라고 부르는, 푸틴과 같은 사람과 냉전 이후 새로운 질서 속에 어떻게 유대감을 형성할 수 있었습니까? 그가 번영을 함께 나누도록 노력함으로써입니다.

 

오늘, 당신은 이 파이프라인이 실수라고 말하기가 왜 그리 어려운가요?

 저는 현재 발생한 상황을 막으려고 전심을 다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2015년의 민스크 협정에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동부 영토 진출을 저지하려 했습니다. 그때 우리가 푸틴에게도 중요한, 모든 경제적인 연결망을 끊겠다고 말하기는 얼토당토않다고 봤습니다. 게다가 저는 유럽에서 독자 노선을 걷지 않겠다고 하기도 했습니다. 적어도 몇 가지 제재는 가해야 한다고 유럽 연합의 동반자들을 설득하기만도 충분히 어려웠습니다.

 

크림 합병 이후, 무기를 공급하여 우크라이나를 지원하는 데 반대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우크라이나 동부에서 러시아군을 군사적으로 몰아내야 하는지에 관해 우크라이나에서 큰 논쟁이 있었습니다. 저는 성공할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우크라이나인들을 아무런 방책 없이 내버려둘 수 없다는 점은 이해했습니다. 종국에 우리는 독일에서 어떠한 무기도 보내지 않았지만, NATO의 모든 노력을 지지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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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는 외교적인 새로운 계획이 적절한 시기에 시작돼야 한다고 쓰여 있어요. "언제 그 시점이 올지 우크라이나 홀로 결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가 키이우의 의지에 반하는 평화까지 아우르나요?

 제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그가 아닙니다. 우리가 공동선을 위해 우크라이나를 지원한다면, 우리는 또한 전쟁을 끝내기 위한 모든 단계를 함께 밟아야 합니다.

 

ⓒ Peter Rigaud/ DER SPIEGEL

 

임기 막바지에 당신의 위기 관리가 칭찬받았죠. 그러나, 메어클 시대는 디지털화의 부족, 사회 기반 시설의 낙후, 늦어진 에너지 전환 등, 놓쳐 버린 기회 중 하나이기도 했어요. 이러한 주제들이 책에서 다루어졌지만, 우리는 그 설명을 찾을 수 없었어요.

 저는 16년 동안 총리를 지냈습니다. 국가의 모든 강점과 약점이 그러므로 어느 정도는 제몫입니다. 물론, 전부 최고 수준의 성공에 이르지는 못했고, 심지어 때때로 부족하기도 했습니다. 연방 정부와 주정부가 협력해야 하는 연방주의에는 언제나 문제가 있습니다. 디지털화는 도시 행정 최고 책임자부터 연방 총리에 이르기까지 공통 노선을 탈 때만 작동합니다. 제가 재직하는 동안에는 그가 결여했습니다. 예, 그러므로 당신은 "메어클은 그랬어요."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앞으로 당신의 계획은 무엇인가요?

 여행, 친구들 만나기, 독서, 휴식 등, 멋진 일이 많습니다. 저는 또, 이 책을 젊은층과 민주주의에 관해, 연방공화국 역사에 관해, 타협의 의미에 관해 이야기하는 출발점으로 사용하기를 충분히 상상할 수 있습니다. 저는 모든 정치인이 자문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이 정적이나 같은 당내 다른 의견에 대하여 얼마나 관대한지. 정치인들이 모범을 보여야만, 서로 다시 귀를 기울이려는 사람들의 의지가 커질 수 있습니다.

 

당신의 측근인 에바 크리스티안센은 버락 오바마 재단이 어떻게 운영되는지 알아보려고 미국으로 떠났어요. 당신도 비슷한 무언가를 계획하고 있나요? 결국, 이 책 덕에 당신은 아마도 곧 백만장자가 될 텐데…

 저는 오바마처럼 큰 일을 벌일 수 없습니다만, 한 번 지켜봅시다.

 

총리님, 이 면담에 응해주셔서 감사드려요.


Amann, M., & Wiegrefe, K. (2024, November 23). >>Ja, da können Sie sagen: Die Merkel war's<<. Der Spiegel, 48, 14-22. https://www.spiegel.de/politik/deutschland/memoiren-von-angela-merkel-so-denkt-die-ex-kanzlerin-ueber-olaf-scholz-friedrich-merz-donald-trump-wladimir-putin-a-ecfb16e9-1ab9-452a-99e7-d5efa712caa6?giftToken=1aedf5f9-7dcc-4d19-972d-017187251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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