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5. 7. 16:00ㆍ35mm
프롤로그
"I went from one to the other holding my sorrow - no, not my sorrow but the incomprehensible nature of this our life - for their inspection. Some people go to priests; others to poetry; I to my friends, I to my own heart, I to seek among phrases and fragments something unbroken - I to whom there is no beauty in moon or tree; to whom the touch of one person with another is all, yet who cannot grasp even that, who am so imperfect, so weak, so unspeakably lonely.", Woolf, V. (1931). The waves. Hogarth Press.
"Most of the big challenges I'll face in life are also little challenges I confront in daily interactions. Trying to be patient. Trying to be kind. Trying to enjoy others' peculiarities and make good use of my own. Trying to be generous or at least humane even when the situation is rote.", Bringley, P. (2023). All the beauty in the world: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and me. Simon & Schuster.
"Something begins, something ends - or it finds its fulfillment. But in the meantime, time pours into life, is braided into it, grows into it, entwines itself with it, but is never one thing: never indifferent, always tuat, always strung between a beginning of which one is not aware because one is too busy with life, and an ending which is in the future, and hence in darkness.", Erpenbeck, J. (2023). Kairos (M. Hofmann, Trans.). New Directions.

"새로운 영화인"과 만남은 영화를 사랑하는 뭇사람의 가슴을 뛰게 합니다. 아직 이름이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숨은 보석"을 발견하기란, 웬만해서는 다른 무언가로 바꾸고 싶지 않은 즐거움입니다. 특히, 그가 불과 수개월 만에 국제 영화계 "유명 인사"로 발돋움한다면, 그 즐거움이 배가 됩니다. 매년, 칸 영화제(Festival de Cannes) 막이 내려가면, 어떤 영화가 무슨 상을 탔는지, 예를 들어, 누가 황금종려상(Palme d'Or)을, 누가 심사위원대상(그랑프리 =Grand Prix)을 품에 안았는지 숱한 매체가 보도하고, 그곳에 이목을 집중시킵니다. 하지만, "새로운 발견"의 기쁨을 찾는 이에게는 경쟁 부문보다 더 유리한 대항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바로, 지난 1969년부터 역사를 이어오는 "감독들의 이 주(Quinzaine des cinéastes)"입니다. 여러 거장이 이 창구를 통해 그 초기작을 선보였으며, 파얄 카파디아도 지난 2021년, "현대 영화의 가장 독특한 형태를 소개하기 위해" 존재하는 이 독립 부문에 장편 데뷔작, <무지의 밤 (A Night of Knowing Nothing)>을 공개했습니다. 곧장 제74회 칸 영화제, 최고의 다큐멘터리 영화에 주어지는 황금눈상(L'Œil d'or)을 거머쥐는 기염을 토한 이 영화는 2015년, 카파디아 감독 모교(Film and Television Institute of India)에서 학생들이 단체로 강의를 거부한 모습을 담아, 나렌드라 모디 행정부에 대하여 인도 전역을 휩쓴 학생 시위 열기(학교를 힌두교 극단주의의 본거지로 삼으려고 했다는 규탄과 함께)를 그려냈습니다. 구체적으로는 "L."이라는 학생이 소원해진 남자 친구에게 쓴 여러 장의 가상 편지를 분노에 차듯 엮어냈으니, "L."의 남자 친구는 그들이 같은 신분 계급에 속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학교를 그만두도록 강요당했으며, "L."과 계속 교제하기를 가족으로부터 허락받지 못했습니다. 이토록 지극히 사적인 이야기는 극에서 다루어지는 훨씬 큰 이야기와 대조를 이루고, 이러한 개인과 정치, 개인과 집단, 소리와 시각 사이 끊임없는 마찰은 인도에서 온 젊은 여성 감독이 이 영화, <무지의 밤>으로 깊은 인상을 남기게 했습니다. 감독은 지난해에도 칸에 신작을 출품했고, 이번에는 경쟁 부문에 들어서 그랑프리까지 손에 넣었습니다. <우리가 빛이라 상상하는 모든 것 (All We Imagines as Light; 감독은 이 인상적인 영화 제목을 화가인 자기 어머니의 작품에서 따왔다고 합니다.)>으로 이룬 쾌거를 다 축하하기도 전에, 올해는 제78회 칸 영화제(오는 13일부터 24일까지 개최됩니다.) 경쟁 부문 심사위원으로 초청된 카파디아 감독입니다.

벽면에 붙은 구로사와 아키라(1910-1998)와 장뤼크 고다르(1930-2022)의 사진을 <무지의 밤>에 등장시켰던 파얄 카파디아 감독은 <우리가 빛이라 상상하는 모든 것>에서 본격적으로 다큐멘터리와 허구의 이야기를 하나로 엮어 냈습니다. 영화는 남부 케랄라주 출신으로, 뭄바이로 옮겨와 간호사로 일하는 두 여성(실제로 이러한 사례가 많다고 합니다.), 프라바(카니 쿠스루티가 분했습니다.)와 아누(디브야 프라바가 분했습니다.)를 관객에게 소개합니다. 이들은 각자 불가능에 가까운 사랑에 묶였습니다. 서로 구체적인 상황이 다르고, 세대도 다르지만, 부동산이 급등하는 뭄바이에서 두 사람은 동거합니다. 카파디아 감독이 세운 또 다른 주인공은 프라바와 아누의 직장 동료, 파르바티(차야 카담이 분했습니다.)입니다. 중년의 미망인인 그는 억척같은 생존력, 고집에도 불구하고, 뭄바이의 고급 주택 사이에서 길을 잃었습니다. 재개발의 희생양이 돼, 집에서 내쫓기기 직전입니다. 파르바티를 고립시킨 건물 가운데 한 곳의 광고판에는 "계급(Class)은 특권입니다."라고 적혀 있습니다. 마치 그 건물이 특권층만을 위한 건축임을 뽐내기라도 하는 듯이. 감독은 사랑과 우정이 가득한 만큼, 어려운 이 세 여성의 삶을 섬세하고도 세련되게 연출해 냈습니다. <우리가 빛이라 상상하는 모든 것>은 삶의 연약함, 소외된 이들에 관한 이야기이자, 이들이 함께 성장해 가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난관에 봉착한 카파디아의 세 여성은 관객에게 동정을 구하지도, 감수성을 더 자극할 심산으로 그 어려움을 구태여 포장하지도 않습니다. 관객은 그저 이들의 내면을 있는 그대로, 이들을 둘러싼 외부 환경의 변화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충분합니다.
프라바 역의 카니 쿠스루티와 아누 역의 디브야 프라바는 실제로 케랄라 출신이며, 파르바티로 분한 노련한 배우, 차야 카담은 영화 후반부를 장식한 러트나기리 촬영지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 고향입니다. 감독은 영화를 편집하면서 이들이 그린 등장인물끼리, 기대를 뛰어넘는 강한 유대감을 형성했음을 깨달았다고 말합니다. 특히, 힌디어와 마라티어를 할 줄 알지만, 말라얄람어는 서툰 파얄 카파디아 감독에게 말라얄람어는 물론, 타밀어와 힌디어, 영어, 심지어는 파리에서 공부해 프랑스어까지 구사할 수 있는 쿠스루티는 든든한 버팀목이 돼 주었습니다. 지난해, 그가 주연한 또 다른 영화, <Girls Will Be Girls>도 호평 일색, 선댄스 영화제(Sundance Film Festival)에서 관객상(Audience Award for World Cinema Dramatic)을 탔습니다. 이 다재다능한 배우는 양친을 따라, 사회운동가로서 여러 인권 운동을 이끌며 목소리를 내는데, 카파디아 감독이 찾은 영화에 이보다 어울리는 주인공도 없습니다.

프라바와 아누, 파르바티, 세 여성 주인공의 서사가 이 영화를 끌어가는 분명한, 주된 원동력이지만, 그 못지않게 중요한 요소를 꼽자면, "발리우드(Bollywood; 뭄바이의 옛 이름인 봄베이와 할리우드의 합성어)의 심장" 뭄바이를 들 수 있습니다. 프라바와 아누가 화면에 모습을 드러내기도 전에 감독은 마치, 전작, <무지의 밤> 등, 다큐멘터리 영화처럼, 뭄바이라는 도시의 소리를 채집하고, 시민들의 바쁜 일상을 포착해 한 폭의 담채화를 그려냈습니다. 다소간 현실이 아닌 꿈이나 환상 따위의 분위기가 느껴지는 도입부는 도시의 수많은 목소리, 소음이 뒤섞여 빚어내는 도시 교향곡의 느낌을 주는 동시에, 지난해, 칸에서 함께 공개된 미겔 고므시 감독의 <그랜드 투어 (Grand Tour)>, 자장커 감독의 <풍류일대 (风流一代)>도 스쳐 가게 합니다. <우리가 빛이라 상상하는 모든 것>은 뭄바이를 "꿈의 도시"로 지칭하고 막을 엽니다. 인도의 최대 도시, 뭄바이는 그 위용을 자랑하는 고층 건물로 빼곡하며, "집집이 못해도 한 명은 뭄바이로 향했습니다."라는 말처럼, '더 나은 삶'을 영위하겠다고 고향을 떠나온 사람으로 가득합니다. 아누의 남자 친구, 시아즈(리두 하룬이 연기했습니다.)는 자기 고향에서와는 달리, 뭄바이에서 저녁(저녁은 해가 지고 어둠이 내려앉는 시간대라는 점이 이 영화의 제목과 극 중 '빛'의 상징성, 그리고 이후 동굴에서 장면을 기억하면, 의미심장합니다.)은 자유를 얻고 꼭 하루가 다시 시작되는 시간과도 같다고, 그래서 자신은 이곳의 저녁을 좋아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파르바티의 고향으로 설정된 러트나기리 근교에서 후반부로 넘어가는 대목에 영화는 이전에 제시한 명제를 스스로 뒤집습니다. 화려한 가네샤 축제(코끼리 신을 기리는 축제로, 가네샤는 지혜와 번영, 행운을 상징하는 신이며, 축제 중에는 코끼리 신상이 거리를 행진하고 물에 담가지는 의식이 열흘가량 이어진다고 합니다.) 뒤에 깔리는 파르바티의 음성은 실은 뭄바이가 "시간을 훔치는 대도시"이며, "착각의 도시"라고 말합니다. 궁전에 살든 도랑에 살든 화를 내서는 안 된다는 "뭄바이 정신"을 들먹이는데, 그 착각 속에 있어야만 미치지 않고 살 수 있다는 묵직한 한 방을 날립니다. 프라바와 아누, 그리고 파르바티의 삶이 그를 증명해 보이고 있습니다.

파얄 카파디아 감독이 차분하게, 어떠한 과장이나 축소도 없이 풀어내는 능력을 발휘하지만(롱 쇼트와 와이드 쇼트로 카메라가 빠지면서 읊조리는 목소리, 장면 해설을 적절히 배치했고, 무엇보다, 분위기를 고조하는 데 음악이 큰 역할을 했습니다.), 사실, 각 등장인물이 뭄바이에서 처한 상황은 가혹하기 그지없습니다. 파르바티는 고 조세희(1942-2022) 작가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에 나오는 난쟁이 일가처럼 철거민이 돼 이십 년 넘게 거주한 뭄바이 집에서 쫓겨날 위기를 맞았습니다. 남편이 먼저 세상을 등지고 홀로 이곳을 지켜왔지만, 그가 그 집에 살았다는 기록, 그들이 말하는 '증거'를 찾을 수가 없습니다. 이는 영화의 전반부를 마무리하고 후반부로 넘어가는 계기가 되기도 합니다. "퇴거 기한"으로 명시된 가네샤 축제 행진 장면으로 뭄바이에서 영화는 끝을 맺고, 파르바티의 고향으로 달리는 기차 안에서 그다음 절반의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한편, 프라바의 남편은 독일로 떠나, 수년째 연락이 닿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프라바가 '가족'이라는 연결 고리를 쉬이 끊어내지는 못합니다. 이는 반항아의 기질을 지닌 듯하지만, 보수적인 힌두교도 부모의 영향력을 완전히 벗어 던지지 못하는 아누도 마찬가집니다. 심지어, 프라바가 병원에서 돌보는 한 노인 환자는 밤마다 죽은 남편의 유령이 찾아온다고 말합니다. 재정적인 독립성도, 그리고 죽음조차도 갈라놓지 못한 가족이라는 개념이 이 여성들을 괴롭히는 굴레입니다. 실은 프라바와 아누도 직업을 좇아 뭄바이로 옮겨왔지만, 이 영화에서 진정 가족을 남겨두고 멀리 떠나 버린 이들은 남자들(파르바티의 남편, 프라바의 남편, 연로한 환자의 죽은 남편)입니다. 프라바의 환자는 약 먹기를 거부하는데, 어둠 속에 유령으로 찾아오는 남편에게라도 전하고 싶은, 오래도록 눌러 담은 말, 고충이 있는지도 모릅니다. 전통적인 가족관은 이 여성들의 '사랑'에도 끊임없이 간섭하려 합니다. 프라바는 생판 알지 못하던 남자와 결혼했고, 지금은 혼자가 됐습니다. 어떻게 그를 감당하는지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는 아누는 시아즈와 한층 더 복잡한 연애를 이어갑니다. 현대에도 세습적인 신분 계급 제도(카스트 바르나)가 힘을 발휘하며, 여성과 남성의 자유 권리가 같을 수 없고(여성의 경제 활동 참여율은 여전히 부진합니다.), 종교적인 갈등까지 얽혀 있는 인도에서 사랑이란, 지극히 정치적입니다. 힌두교도 아누와 이슬람교도 시아즈의 사랑은 이 정치적인 문제에 정면으로 도전해야 하는데, 달걀로 바위를 치는 격입니다.

Why India’s New Ram Temple Is So Important (Gift Article)
Its site is sacred to Hindus, and it also represents the much more recent victory of Hinduism as a political identity.
www.nytimes.com
Under Modi, a Hindu Nationalist Surge Has Further Divided India (Gift Article)
The Hindu right has never been so enfranchised at every level of power. Now, with another term likely for Prime Minister Narendra Modi, minorities are worried.
www.nytimes.com
인도 사회 현실로 한 발짝 나오면, 어느덧 11년 전부터 인도 총리로 재직해 오는 나렌드라 모디(바라티야자나타당 =Bharatiya Janata Party)가 내세우는 "힌두트바(Hindutva)"가 있습니다. 이는 종교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대단히 복잡하게 구성된 인도 사회의 일체성을 강조하며, 이교도, 특히 이슬람교도와 기독교도에 의한 "식민지화"를 경계(영화 속 아누와 시아즈의 사랑은 그런고로 도무지 이루어질 수 없는 일입니다.)하고, 힌두교도의 권리를 증진하는 이념적 방향으로 그려집니다. 일부 학자는 모디가 집권한 2014년 이전까지 인도 사회에서 힌두교 정체성이 눈에 띄는 수준은 아니었는데, 어느 날엔가 평범했던 시민들이 힌두교 근본주의자 집단으로 돌변했다고 말합니다. 모디 정부는 인도 인구 20%에 달하는 종교적인 소수자 집단에 대하여 차별적인 정책과 법 집행을 밀어붙였고, 때로 그 과격한 지지자들은 별다른 죄책감이나 법적인 책임 없이 폭력을 행사하고, 심지어는 상대의 목숨을 앗아가기도 했습니다. 대표적으로 이 년 전, 밴쿠버에서 한 시크교 분리주의자가 살해되자, 캐나다 정부가 그 배후로 인도 정부 요원을 지목한 일이 있었고, 지난해에는 인도 북부, 아요디아에서 수 세기 된 모스크를 허문 자리에 힌두교 신, 람(라마; राम)에게 바치는 새로운 거대 사원이 문을 열기도 했습니다. 사실, 외신에 의해 으레 '자수성가한 인물'로 묘사되는 모디 총리 아래서 (소위 "선진국"이 "글로벌 사우스"의 전략적인 가능성에 주목하는 흐름과 맞물려) 인도는 세계적으로 목소리를 키웠습니다. 그래서 세계 각지로 흩어진 인도계 이민자 사회에 인도에서 종교적인, 정치적인 갈등이 그대로 투영돼 나타나도, 현지에서 그에 대한 주목도나 해결 노력이 부족하다는 비판도 최근, 심심치 않게 제기됩니다. 역사적으로 억압받은 달리트(दलित; 인도 신분 제도에 정의조차 되지 않은 "제도 밖 계급") 공동체 후손들이 신분 차별 금지 운동을 주도하여 토론토, 시애틀, 캘리포니아주 등지의 상류층 힌두교도들과 대립했고, 한때 "통합의 모범"으로 여겨진 공동체들도 그 폭력으로 붕괴하기 일쑤였습니다. 이러한 와중에 최근, 카슈미르에서 끔찍한 사건은 각지 인도인 디아스포라의 긴장감을 더욱 고조시킵니다. 인도의 인접국이면서 오랜 앙숙이며, 반대로 이슬람 극단주의 성향 국가인 파키스탄의 개입이 확실시되는 가운데, 이슬람교도가 아닌 남성 관광객을 표적으로 총기가 난사됐습니다(이십여 명이 목숨을 잃었고, 부상자도 이십 명 남짓입니다.). 이미 인도에서는 마땅한 분노가 들끓으며, 수요일 새벽, 이 주 만에 인도 정부가 파키스탄을 공습하여 최소 여덟 명이 사망했습니다.

나렌드라 모디는 극우 힌두교 국민주의 집단, "라슈트리야 스와얌세박 상(राष्ट्रीय स्वयंसेवक संघ (RSS))" 회원으로, 고향인 구자라트주 행정을 오랫동안 담당했고, 그곳에서 기업에 친화적인 정책과 (당연히) 힌두교 민족주의 이념 장려로 일찍이 이름을 날렸습니다. 오늘 그의 지역구는 갠지스 강변에 있는 고대 도시, 바라나시입니다. 정치적으로나 종교적으로나 그의 색깔을 전국에 널리 퍼뜨리기에 안성맞춤인 장소입니다. 매년, 수백만의 방문객이 관광과 순례, 모크샤(मोक्ष; '성스러운 강가'의 장작더미에서 화장된 영혼이 윤회의 굴레를 벗어난다는 힌두교 신앙입니다.)를 위해 힌두교 성지인 이곳을 찾습니다. 모디는 "어머니" 갠지스강이 그를 정치 활동의 새로운 근거, 바라나시로 불렀다고 말하며, 종교적인 색채를 한껏 강화했습니다. 그가 집권한 뒤로 RSS는 해외 인도인 디아스포라에서 활동을 크게 늘렸습니다. 한편, 모디는 온종일 골목길을 꽉 막는 극심한 교통 체증으로 사업 개발이 어려운 바라나시에서 놀랍도록 빠른 속도로 도로를 건설했고, 가정마다 전기와 에너지 공급망을 개선했습니다. 숱한 논란을 낳기는 했습니다. 예를 들어, 여행객들을 위해 갠지스강에 유람선을 띄우며, 그는 오래도록 그곳에서 벌이를 이어온 뱃사공들의 원망을 샀습니다. 그의 야욕 앞에서는 심지어, 같은 힌두교도라도 두 다리 뻗고 잘 수 없었습니다. 모디는 바라나시의 유명 관광지이기도 한 카시 비슈와나트 사원에서 강가로 닿는 회랑을 건설하려고 수백 가구를 이주시켰고, 그들의 터전을 파괴해 버렸습니다. 그들의 종교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힌두교도든 이슬람교든 하루아침에 쫓겨나기는 매한가지였습니다. 힌두교도 사이에 "매년, 수많은 사람이 영혼의 구원을 구하려고 이곳을 찾아오지만, 정작 여기 사는 우리는 떠나야 한답니다."라는 비극적인 한탄의 목소리가 커진 이유입니다. 영화에서 파르바티 등, 집을 비우고 나가라고 압박당하는 이들이 모여 뭄바이는 "우리가 일으켜 세운 도시"라고 울부짖는 장면과 겹칩니다.

쇼비니즘(Chauvinism; 남을 배척하는, 극단적으로 폐쇄적인 애국심)과 개발주의가 나렌드라 모디가 자기 지역구를 넘어, 전국적으로 힌두교도 유권자들에게 호소하는 지지 기반을 완성한 두 가지 성공 비결입니다. 2019년 하원(लोक सभा) 선거에 그의 정당은 총 543석 중 303석을 얻었고, 연립 정부 구성으로 50여 석의 찬성표를 더 확보하여, 야당을 압도했습니다. 절대적인 우위에 기세가 오를 대로 오른 모디 총리는 자기 탄생이 어떠한 생물학적인 결과가 아닌, "신의 계시"였다고 주장하고, 급기야, 지난해 총선에 단독으로 400석 확보를 자신하기도 했습니다. 꿈은 컸지만, 그대로 이루어지지는 않았습니다. '최신' 선거에 바라티야자나타당은 240석을 얻는 데 그쳤습니다. 뜻을 같이하는 정당들과 "국민민주동맹(राष्ट्रीय जनतांत्रिक गठबंधन)"을 모아, 53석을 더하고, 인도 국민회의(भारतीय राष्ट्रीय कांग्रेस)가 주도하는 반대편, "인도 국가 개발 포괄동맹(भारतीय राष्ट्रीय विकासशील समावेशी गठबंधन)"을 44석 차로 따돌려, 모디가 총리직을 지켰으나, 자존심은 단단히 구겼다고 보는 편이 옳습니다. 사실, 집권한 한 세대 동안 모디 총리와 그의 당은 전제 정치에 가까운 방식으로 국내 거의 모든 주요 기관을 장악하고, 전복했습니다. 정부 기관을 동원해서 정적들을 추적하고, 끝없는 수사에 시달리게 했으며, 정당 계좌를 동결하고, 심지어 투표를 앞두고는 야당 주지사 둘을 투옥하기까지 했습니다. 주요 언론을 정권의 나팔수로 전락시켰고, 금전적인 "당근"과 사법권의 "채찍"을 번갈아 제시하면서 반대파를 외력으로 찍어 눌렀습니다. 오늘날 많은 전제 정치 국가에서와 같이, 모디 총리는 도당정치도 결합했습니다. 작년 초, 최종적으로 '위헌' 결정이 나온 모금 시스템을 구축, 익명의 정치 기부금을 유용하려 했습니다. 그에 대하여 직접 언급하는 부분은 없지만, 파얄 카파디아 감독은 <우리가 빛이라 상상하는 모든 것>을 통해, 이렇게 한층 심화한 인도 사회의 각종 문제를 다시금 들여다보게 합니다. 인도 유권자들은 한창 기세등등한 모디 행정부를 한풀 꺾었고, '반응'하기 시작했습니다. 앞으로는 어떻게 흘러갈지 '꾸준히' 지켜봐야 합니다.

다시, 영화 이야기로. 몬순기(Monsoon; 남서 계절풍이 불어 드는 인도 우기)에 접어든 뭄바이에는 추적추적, 심지어는 열차가 잠길 만큼 쉬지도 않고 비가 내립니다. 누군가의 일상이든 거뜬히 집어삼킬 이곳에서 삶의 무게에 관객은 마치 물먹은 솜뭉치라도 된 듯이 짓눌려 압도당합니다. 작중 전반부 내내 전체적으로 어둡게 그려진 이 대도시의 한결같은, 믿을만한 광원이라고는 휴대전화 불빛과 셀 수 없이 설치된 인간의 조명이 전부입니다. 시아즈가 뭄바이의 저녁을 좋아하는 진짜 이유는 혹시라도 아누와 관계를 들킬까 봐 전전긍긍하는 그가 허락된 자유 가운데 어둠 속에 숨어들 수 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반면, 파르바티의 고향에는 바람이 불지만, 만경창파가 있고, 우거진 나무가 자랍니다. 밤에는 별빛이 빛나고, 낮에는 뭄바이에서 그토록 보기 힘들던 태양이 작열합니다(이러한 시각적인 차이를 만들기 위해 계절이 바뀌기까지 서너 달의 시일을 두고 촬영했습니다.). 일자리가 있고, 모두가 부푼 꿈을 안고 걸음을 옮긴 목적지는 뭄바이지만, 세 명의 주인공, 그리고 시아즈까지 네 사람 모두에게 휴식과 마음의 안정을 제공하는 공간은 러트나기리(주요한 사건들이 프라바와 아누가 낮잠을 청한 뒤에 전개되므로 각박한 현실에서 이룰 수 없는 일이 꿈속에 실현되는 장소로도 볼 수 있습니다.)입니다. 파르바티는 집을 되찾았고, 아누와 시아즈는 '처음으로' 그들의 모습, 관계를 있는 그대로 드러냈으며, 그들의 서로 다른 출신 배경으로 재단을 당하지 않았습니다. 프라바는 '마침내' 오랫동안 그를 괴롭혀 온 남편의 유령에서 벗어났습니다. "시간을 훔치는" 뭄바이에서는 쳇바퀴 돌듯 연속되는 하루하루가 스치듯 지나가, 그 안의 사람들이 여유를 찾기가 어렵습니다. 말라얄람어가 편하고 힌디어는 잘 못하는 의사, 마노이(아시스 네두망가딘디움이 분했습니다.)가 환자에게 "내일 다시 오세요(कल वापस आना)."라고 전하고 싶은데, 자신이 없다고 하자, 프라바가 힌디어에서 '어제'와 '내일'은 같은 단어(कल)를 쓴다며 답을 알려주는 장면이 있습니다. 단순한 언어적인 도움인지, 그 안에 더 큰 뜻을 함축했는지 판단은 관객의 몫입니다(어제고 내일이고 '똑같이 바쁜' 날이 밀려옴을 말로 풀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파얄 카파디아 감독은 뭄바이 시민들의 하루가 어떠한 '일'로부터 거의 자유롭지 못하다는 점에 주목했습니다. 작품 후반부의 분위기는 이와 분명하게 마주 보니, 훨씬 느리게 시간의 태엽이 감기는 러트나기리에서는 꿈속을 유영하듯, 영원처럼 느껴지는 하루를 붙잡을 수 있습니다. 생생하게 들려오는 현장음이 몽환성을 더합니다.

내 꿈에는 말이죠
내가 떠나온 일상의
자잘한 물건들이 나와요
내 희망은
물건이 가득한 또 다른 관일 뿐이에요
어디든 늘 지고 다녀야 하죠
그리고 지금 당신은
밝게 타오르는 이웃집의 불빛
난 그 빛을 보며
밤에도 온기를 느껴요
'빛'은 단연코, 이 영화의 중요한 상징입니다. 마노이는 프라바에게 전해준 한 편의 시에서 프라바를 "이웃집 불빛"에 비유합니다. 그는 그 빛이 있어서 어두운 중에도 따뜻함을 느낍니다. 반면, 영화 후반부에 돌연 나타난 프라바 남편의 환상은 어둠 속에서는 빛을 상상하려 해도 그리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가 너무 오래 빛이 들지 않는 곳에 머물렀기 때문일 터입니다. 이제 막 눈에 보이는 그 '빛'을 그는 손을 뻗어 만지고 싶다고 합니다. 사나흘씩 공장에 틀어박혀 일을 하다가 나오면, 빛에 눈이 멀기 마련입니다. 이는 러트나기리에서 아누와 시아즈가 찾은 동굴 장면을 돌아보게 합니다. 일찍이 여러 연인이 거쳐 간 이 동굴은 인제 아누와 시아즈가 서로 사랑을 확인하고 나가는 장소가 됩니다. 시아즈는 자신들의 사랑이 바다와도 같다고 말라얄람어로 낙서를 남기고, 그들이 헤어지는 편이 서로에게 이로울지 모른다는 현실적인 고민을, 그런데도 함께 있는 동안, 아누가 자신을 그 모든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롭게 한다고 고백합니다. 그렇게 이들의 사랑은 단단해집니다. 아누는 동굴 안, 벽면에 깎아진 조각들을 보고, 그들이 마치 무슨 일이 일어나기를 기다리기라도 하며 영원히 그곳에 갇힌 듯 보인다고 말합니다. 플라톤의 동굴 우화(Allegory of the cave)를 끌어오면, 그들은 속박된 동굴의 주민으로서 그들이 보는 그림자가 실체라고 믿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인간은 이데아(ίδέα)를 보아야 합니다. 동굴에 갇힌 한 사람이 이를 자각하고 동굴 밖으로 나가(눈이 빛에 적응할 시간이 필요하지만), 지금껏 그가 본 전부가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돌아옵니다. 그는 묶여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 이 사실을 알려야 한다는 사명감을 지녔지만, 동굴에 남은 이들은 오히려 그가 거짓을 말한다며 그를 미치광이 취급합니다. 지난해 공개된 아름다운 단편, <알레고리 (Allégorie citadine)>에서 알리체 로르바케르는 여기에 한결 현대적인 시선을 제시합니다. 만일, 동굴 안 사람들이 먼저 도주했다가 돌아온 이의 증언을 믿어 주었다면, 그들을 구속한 쇠사슬을 함께 끊어내고 동굴의 출구로 방향을 돌렸다면, 상황은 반전되고 하나의 '혁명'이 시작됐으리라는 가설입니다. 동시에, 그는 그들을 묶은 쇠사슬이 실재하므로 그들이 보는 모든 장면을 착시로만 치부하기는 충분치 않다고 역설합니다. <우리가 빛이라 상상하는 모든 것>은 이제, 주인공들을 동굴의 속박에서 해방할 '빛'의 가능성을 시사합니다. 프라바, 아누, 파르바티의 우정이, 아누와 시아즈의 사랑이 일상 속 만들어 낸 광선을 투사하여.

"인내와 체념, 슬픔과 불완전한 화해, 강인함과 쓸쓸함은 때로 비슷해 보인다. 어떤 사람의 얼굴과 몸짓에서 그 감정들을 구별하는 건 어렵다고, 어쩌면 당사자도 그것들을 정확히 분리해내지 못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
내가 경험한 모든 것이 결정이 된다. 아무것도 더이상 아프지 않다. 정교한 형상을 펼친 눈송이들 같은 수백 수천의 순간들이 동시에 반짝인다. 어떻게 이게 가능한지 모르겠다. 모든 고통과 기쁨, 사무치는 슬픔과 사랑이 서로에게 섞이지 않은 채 고스란히, 동시에 거대한 성운처럼 하나의 덩어리로 빛나고 있다.", 한강. (2021). 작별하지 않는다. 문학동네.
이 영화의 가장 마법과도 같은 순간을 꼽는다면, 후반부, 러트나기리에서 프라바가 유령에 홀린 듯이 나타난 남편의 환상을 마주하여, 속을 끓이던 말을 마침내 입 밖에 내고, 그에게 가해진 삶의 무게와 당당히 맞서는 장면을 들 수 있습니다. 프라바는 파얄 카파디아 감독이 누구보다 입체적으로 그린 등장인물입니다. 누구에게든 기꺼이 도움을 제공할 사람이지만, 일터에서, 퇴근길에, 한없이 스스로 엄격한 모습을 보이는 "모범생"이기도 합니다. 마노이가 직접 지은 시와 사탕 따위를 건네주며 호감을 표시하고, 심지어는 병원과 곧 종료되는 계약도 프라바가 그의 "뭄바이에 남을 이유"가 돼 준다면, 재고할 수 있다고 전하는데, 프라바는 이를 가열하게 거절하지 않으면서도 독일로 홀로 떠난 남편에 대한 관습적인 죄책감을 가진 듯합니다. 그래서 그가 뭄바이에서 남편을 기다리는지, 그가 진정 돌아오기를 바라는지, (그러한 감정을 느낄 만하다면) 그를 그리워하는지 추측하기 어려운 면이 있습니다. 일전에 보내는 이의 이름 없이 도착했으나, 독일에서 만들어진 제품이라는 단서로 남편이 보냈으리라고 짐작, 확신하는 밥솥도 그는 잘 쓰지 않고, 방 한쪽에 감추듯이 내려놓았습니다. 하지만, 아누가 먼저 잠든 또 어떤 밤에는 프라바가 부엌 바닥에 웅크린 채로 몸을 말아, 그 밥솥을 끌어안습니다. 떠난 남편과 '진짜' 가족, 혹은 단순히 신체적인 접촉에 대한 그리움이 너무도 가득한 나머지, 그가 잔잔하게 폭발시킨 그 모든 복합적인 감정이 보는 이의 가슴을 찌릅니다. 알쏭달쏭한 이 감정선을 감독은 영화 후반부, 마술적 사실주의를 잠시 빌려와, 풀어 줍니다. 프라바가 해변에 머물다가 갑작스럽고도 엉뚱하게 바닷물에 떠밀려 온, 기억을 잃은 한 남성을 살리고, 그렇게 찾은 지역의 의사는 프라바와 그가 구한 남자가 부부지간인 줄로 압니다. 이를 전해 들은 남자가 정말 그러한지 묻지만, 프라바는 '오해'라고 딱 잘라 말합니다. 그러나, 직후에 놀라운 일이 일어나니, 그 남편의 영혼이 프라바가 구한 남자(다시, 가족을 뒤로하고 출국한 이는 남편이지만, 그를 구한 이는 아내인 프라바라는 점이 재밌습니다.)에 빙의하여 나타납니다. 이윽고 연락이 닿지 않던 남편을 실제로 만난 듯, 하고 싶었던 말을 털어놓던 프라바는 실은 이 환상이 자신이 원한 결과가 아니라는 점을 깨닫고, 그에게, 자기 남편에게 다시는 보고 싶지 않다는 말을 돌려주었습니다. 어두운 방에서 장면을 마무리한 카메라는 멋진 풍경을 비춥니다. 영화 초반, 아누가 청진기를 가슴에 가져다 댔을 때 들렸을 심장 소리가 그를 채우며 주의를 끕니다. 프라바의 심장은 막 다시 뛰기 시작했습니다.
에필로그
티끌이 티끌에게 (작아지기로 작정한 인간을 위하여)
- 김선우
내가 티끌 한 점인 걸 알게 되면
유랑의 리듬이 생깁니다
나 하나로 꽉 찼던 방에 은하가 흐르고
아주 많은 다른 것들이 보이게 되죠
드넓은 우주에 한 점 티끌인 당신과 내가
춤추며 떠돌다 서로를 알아챈 여기,
이토록 근사한 사건을 축하합니다
때로 우리라 불러도 좋을 티끌들이
서로를 발견하며 첫눈처럼 반짝일 때
이번 생이라 불리는 정류장이 화사해집니다
가끔 공중파도를 일으키는 티끌들의 스텝,
찰나의 숨결을 불어넣는 다정한 접촉,
영원을 떠올려도 욕되지 않을 역사는
티끌임을 아는 티끌들의 유랑뿐입니다
김선우. (2021). 내 따스한 유령들. 창비.
<우리가 빛이라 상상하는 모든 것>은 다소간 덜 익숙한 배경에, 덜 익숙한 삶의 모습을 한 편의 시로 풀어내는 듯하지만, 현실적인 영상과 상상으로 빚어낸 세상의 틈을 촘촘한 바느질로 꿰매어, 우리 일상을 깊숙이 파고듭니다. "시간을 훔치는 대도시" 뭄바이는 서울을 떠올리게 하며, 세계 각지에서 예술적인 꿈을 안고 찾아오지만, 계속해서 치솟는 지대와 너무도 치열한 경쟁 가운데 홑몸으로 청춘을 내던지도록 하는 베를린 역시 "착각의 도시"입니다. 영화 속, 밤마다 마노이가, 밥솥을 끌어안은 프라바가, 빛이 들지 않는 완전한 어둠 속에서 프라바 남편의 환상이 갖는 그 근원적 고독을 우리도 압니다. 우리는 다시, 다큐멘터리적인 재현과 마술적 사실주의가 교직하는 순간, 서로 기댈 곳이 돼 주며 그 우정으로 황홀한 빛을 내서 몽환 속에 춤추는 프라바와 아누, 파르바티를 보고, '어제'와 같겠지만, 또 다를 '내일'을 살아낼 힘을, 단서를 얻습니다. 마침내 "공중파도"를 일으킬 "티끌들의 스텝"을 기대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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