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6. 24. 01:00ㆍ#HaHoHe
14년 전 여름, 런던으로 떠나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던 약관의 소년이 마침내 오늘, 서른 줄은 진작에 넘긴 역전의 용사가 되어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헤르타 BSC가 케빈프린스 보아텡과 일 년 계약에 합의했습니다. 그는 다음 시즌, 이곳에서 등에 27번을 새기고 뜁니다. 베를린에서 데뷔하던 때 달았던 번호입니다. 그 지난 세월, 굴지의 클럽에서 활약하며 숱한 경험을 쌓고 돌아온 "오래된 재능"은 이곳에서 최근까지 사미 케디라가 맡았던, 선수단 선참자로서 분대를 이끌고, 동료들에게 용기를 주는 역할을 이어받습니다. 꼭 한 달 전, TSG 1899 호펜하임과 방문 경기에 마지막으로 축구화 끈을 조여 맸던 케디라는 종아리 문제로 인해, 베를린의 노파를 위해 그리 많은 경기에 나서지 못했지만, 그 세계적인 명성과 강력한 존재감만으로 젊고 불안정한 선수단에 꼭 필요한 버팀목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가 하는 말 한마디 한마디에 그만한 무게가 실렸습니다. 팀을 위한 헌신과 열정, 전문성과 집중력. 케디라가 본을 보였던 이 가치들을 이제, "돌아온 탕아"가 솔선하여 제공해야 합니다. 독일 축구 최고 기대주에 주어지는 프리츠 발터 메달을 휩쓸었던 프린스(2005년 18세 이하 부문 동메달; 2006년 19세 이하 부문 금메달)는 AC 밀란, FC 샬케 04, FC 바르셀로나와 같이 이름 있고 거대한 클럽에 몸담았지만, 세계 최고의 선수는 되지 못했습니다. 지금껏 그의 경력은 그야말로 파란만장하여, 온갖 굴곡으로 가득했으니, VfB 슈투트가르트와 레알 마드리드 CF, 유벤투스 FC를 거치며 무수히 많은 우승배를 들어 올리고(프린스에게도 내세울 만한 정상의 순간들은 있었지만), 심지어는 2014년, 세계 축구를 제패한 전차 군단의 일원이기도 했던 케디라와 비교하면, 사실, 여러 끗 부족합니다. 프린스는 어린 나이에 반복적으로 대중 매체에 노출됨으로써 탄생하는 과대광고가 아직 유혹을 떨칠 정도로 성숙하지 못한 선수에게 얼마나 센 독이 될 수 있는지 몸소 보여 주었습니다. 베를린은 쉬지 않는 언론을 가진 대도시이며, 바야흐로 누구나 창작 활동에 뛰어들 수 있는 뉴 미디어 시대입니다. 한때, 베를린에서 축구와 사랑에 빠진 꼬마들의 영웅이었고, 인기인이었던 그는, 결국 알을 완전히 깨고 나오지 못한, 미완성된 재능의 밑그림으로서, 한참 후배들에게 케디라와는 다른 성격의 지지대가 돼 줄 수 있습니다.
케빈프린스 보아텡은 줄곧 "친정"에서 이복동생인 제롬 보아텡과 함께 선수 생활을 마무리하고 싶다고 말해 왔습니다. 지난해 봄, 보아텡 형제는 각자 소셜 미디어 계정을 빌려, 합동으로 생방송을 진행하며 이 같은 "꿈"을 전 세계 축구광 앞에서 공개적으로 밝혔습니다. 헤르타 BSC도 이 계획에 대한 반대 목소리를 내지는 않았으니, 프레디 보비치에 앞서서 헤르타 BSC 운동 부서 전무이사로 일한 미하엘 프레츠가 재작년 11월, <<t-online>>과 인터뷰에 언젠가, 그들의 선수로서 경력이 마무리되면, "이상적인 지도자 후보"로서 보아텡 형제의 복귀 가능성을 배제하고 싶지 않다고 했고, 지난해에는 <<빌트>>와 만나, "두 사람이 여전히 베를린, 그리고 헤르타 BSC와 긴밀한 유대감을 갖고 있어서 기쁩니다. 그들은 베를린 출신이며, 각자 경력 중 많은 성취를 이루었고, 세상을 경험했습니다. 언젠가 두 사람이 이 위대한 도시로 돌아온다면, 무척 행복하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적절한 때"가 이르면, 대화하겠다는 의례적인 말로 비치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 클럽은 두 선수의 복귀에 열린 태도를 가졌습니다. 이달부터 프레츠의 사무실을 차지한 보비치는 프린스와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에서 DFB-포칼 우승의 영광을 함께했습니다. 지난 시즌, AC 밀란에서 뛰던 시절에 연을 맺은 실비오 베를루스코니의 AC 몬차에 합류했던 프린스가 이제는 보비치 전무이사와 인연의 끈으로, 이전부터 바라온 대로, 슈프레아테너의 대기 공간에 입장합니다. 이탈리아에서 250만 유로가량 연봉을 받았다고 전해지는 프린스는 베를린에서는 제법 큰 폭으로 삭감된 급여를 챙깁니다. 덕분에, 설사 그가 경기장에서 별 도움을 주지 못하는 일이 발생하더라도, 클럽으로서는 급여 측면에서 사미 케디라와 함께하던 때보다 부담을 일부 덜었습니다. 선수는 오늘, 향수를 자극하는, 대단히 감성적인 말을 남겼습니다.
"헤르타 BSC는 제게 단순한 클럽이 아닙니다. 저는 무언가를 갚기 위해 이곳에 왔습니다. 수년간 많은 여행을 했고 많이 배웠지만, 그 모두, 제 경력 전체를 이 클럽에 빚졌습니다. 헤르타 BSC가 항상 제 마음속에 있다는 사실을 잊은 적이 없습니다."
2005년 8월 13일, 올림피아슈타디온 베를린. 49,000명 넘는 관중 앞에서 채 스물이 되지 않은 헤르타 BSC 유소년 아카데미 최고 기대주가 첫선을 보였으니, 그가 바로 케빈프린스 보아텡입니다. 그는 초장부터 대단한 인기를 구가했으며, 독특한 "펑키(funky)" 개성과 출중한 재능으로 그 유명세를 선풍적인 수준까지 올려놓았습니다. 크리스토프 다움에게 수학한 팔코 괴츠가 당시, 헤르타 BSC 지휘봉을 잡고 있었습니다. 그는 변화무쌍한 경기 전략 변화로 잘 알려진 감독입니다. 프린스가 독일 축구계의 기대와 주목을 끌면서 등장한 이 시기, 괴츠 감독은 기교 넘치는 "체너(Zehner)"가 수놓으며 독일 프로 축구 최상위 무대에서 유행하던 다이아몬드 1442 대형을 주력으로 활용하고, 상황과 상대에 따라 여러 전형을 섞었습니다. 그 이전 몇 년간, 토르벤 마륵스가 주로 담당해 온 허리선 오른쪽에서 공격력의 저하가 풀어야 할 과제였습니다. 마르셀리뉴가 주야장천 경기장 중앙에서 공을 만지고, 그를 오래 소유하다 보니, 측면을 파괴한 뒤, 깊은 곳에서 가운데로 감아올리는 공격의 시도가 상대적으로 적기도 했지만, 수비에는 성실히 도움을 줄 수 있으나, 기술이나 속도 따위가 아쉬운 마륵스가 팀 공격 전술의 다각화에 많은 도움을 제공하지 못했습니다. 괴츠 감독은 매일, 중원에서 역동성과 공격성을 올리려고 궁리했는데, 한쪽이 계속해서 죽어 버리니, 고민이 깊었습니다. 도중에 호베르투 핀투(2001년부터 2004년까지)나 바르토시 카르반(2002년부터 2004년까지) 등이 마륵스에게 도전하기도 했지만, 핀투는 투박해서, 카르반은 분데스리가 환경에 잘 적응하지 못해서, 경쟁에 못 이겼습니다. 결국, 이따금 훈련장에서 동료들의 눈을 뒤집는, "놀라운 순간"을 연출하며 발밑의 공을 잘 다루는 프린스가 이 자리에서 상황을 바꾸어 놓을 적임자로 보였습니다. 실제로, 기회를 잡은 프린스는 제 기량을 발휘하기 시작했고, 이에, 괴츠 감독이 직접 밝힌 "기본 대형" 다이아몬드 1442 대형에서 그는 대개, 왼쪽의 지우베르투와 합을 맞추며, 위의 이을드라이 바슈튀르크, 아래의 니코 코바치와 같이, 가운데 뼈대를 이루고 뛰었습니다. 지우베르투도 동향인 마르셀리뉴와는 달리,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었으나, 다재다능하고 성실한 선수여서, 괴츠 감독이 그와 프린스를 부리며 다양한 시도를 할 수 있었습니다. 데뷔 시즌, 프린스는 분데스리가 21경기에 두 골을 넣고, 세 개 도움을 더했습니다.
이듬해에도 케빈프린스 보아텡은 분데스리가 21경기에 두 골과 다섯 개 도움을 기록하며 활약했습니다. 동생인 제롬 보아텡이 데뷔한 시즌이기도 한데, 보아텡 형제는 서로 번갈아서 자리를 비운 탓에 꼭 두 경기에만 같이 뛰었습니다. 제롬이 선발 출전하여 90분 경기 시간을 모두 소화한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와 스물다섯째 경기, 막 부상을 털고 돌아온 프린스가 교체 출전하여 잔디를 밟았고, 그다음 FC 에네르기 코트부스와 경기에는 형과 아우가 함께 선발 출전했습니다. 프린스가 다쳐서 빠진 겨울 이적 시장에 헤르타 BSC는 당시, 브라질에서 이름을 날리던 미네이루를 자유계약으로 영입하기도 했습니다. 브라질 국가대표 선수로 2006 FIFA 월드컵 독일에 참가하기도 했던 선수인데, 복귀한 프린스는 이 선수와 경쟁에도 밀리지 않았습니다. 다만, 올림피아슈타디온 베를린에서 그의 뜨거운 인기가 오래가지는 못했습니다. 주변에서 부추기는 분위기 속, 한껏 어깨가 부풀어 오른 그가 빠르게 야심을 드러내고 좇기로 하며, 금세 팀을 옮겨 버렸기 때문입니다. 2007년 여름, 당시로서는 절대 적지 않은 700만 유로가량 이적 대가에 프린스는 토트넘 홋스퍼 FC로 이적했습니다. 그의 경력 중 첫 번째 이적이었지만, 사실, 그는 경력 내내 팀을 옮겨 다닐 운명이었습니다. 잉글랜드와 이탈리아, 스페인, 튀르키예, 그리고 다시 독일. "정착"이란, 그의 사전에 빠진 말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과거에는 때로 기이한 행동이나 일화로 주목받기도 했던 케빈프린스 보아텡은 시간이 지나며, 점차, 무엇이 가장 중요한지 깨달았다고 말합니다. 그의 주변인들도 프린스가 이전의 실수들로부터 많이 배워서 더 나은 사람이 됐다고 증언합니다. 이사회 의장으로서 임기 12년 중 클럽을 일곱 번이나 유럽 클럽 대항전에 진출시켰으며, 프린스의 시작을 직접 목격한 디터 회네스는 그가 분대를 이끄는 선수로서 갖추어야 하는 자질을 모두 가졌다며, 그는 여러 클럽을 거치는 동안 성숙했고, 잔디 위에서 여전히, 대단히 매력적인 선수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프린스가 헤르타 BSC의 "절대적인 자산"이 되리라고 덧붙였습니다.
지난 일 년간 AC 몬차에서 케빈프린스 보아텡은 세리에 B 24경기, 1,701분의 경기 시간을 소화하며 다섯 골(페널티킥 세 골 포함)과 네 개 도움을 기록했습니다. 아직 선수로 뛰던 때, 중원에서 다재다능함을 바탕으로 AC 밀란과 SS 라치오 등에서 굵직한 경력을 쌓은 크리스티안 브로키 감독(세리에 A 승격에 실패하여 클럽을 떠납니다)은 시즌 초반, 다이아몬드 1442 대형을 쓰다가 1433 대형으로 변화를 택했습니다. 프린스는 유벤투스 FC 출신의 날개 공격수, 다니 모타 카르발류의 반대편, 곧, 오른쪽 날개 공격수 자리에 자주 배치됐습니다. 물론, 브로키 감독이 프린스를 거기 두며 "전통적인 날개 공격수"에게 기대하는 빠른 돌파에 이은, 깊은 곳에서 크로스 따위를 주문하지는 않았습니다. 가끔, 젊은 시절, 그의 번뜩이는 천재성이 엿보이는 순간도 있었지만, 전체적인 활동량이나 기동력이 몹시 떨어져 버린 탓입니다. 뒤쪽에서부터 공격 단위의 문을 열며, AC 몬차는 골키퍼부터 명목상 12323 형태를 만들었습니다. 좌우 측면 수비수가 두 명의 중앙 수비수보다 반 칸 정도 위로 올라서고, 역삼각형 중원의 맨 아래 꼭짓점으로 선 선수, 주로 안드레아 바르베리스가 그 가운데서 공을 받았습니다. 허리 삼각형의 나머지 두 선수는 좌우로 넓게 찢어져서 측면 공간에 숫자를 지원했는데, 특히,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로부터 임대 이적한 다비데 프라테시가 오른쪽 너른 공간, 옆줄에 바짝 붙어서 폭을 제공하곤 했습니다. 그가 바이어 04 레버쿠젠과 1. FSV 마인츠 05 유니폼을 입고 분데스리가를 누비기도 했던 줄리오 도나티와 서로 자리까지 바꿔 가며 오른쪽에서 공격을 거의 전담해 준 덕에, 프린스는 자유를 얻었습니다. 그는 경기장 가운데로 자주 좁혀, 사실상 "트레콰르티스타(Trequartista)"의 옷을 입었습니다. 전방부터 14141 대형으로 수비 단위에 나설 때조차 그가 가운데 남고, 프라테시가 오른쪽 측면을 맡는 경우가 더러 있었습니다. 신체적인 경합과 중앙에서 압박의 강도, 속도가 최고 수준인 분데스리가에서 지금의 프린스가 버틸 수 있을지, 살아남을 수 있을지 많은 이가 의심하는데, 그 눈초리가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지는 이유입니다. 뒷심이 떨어진 AC 몬차가 시즌 말미에 이기지 못하는 경기를 계속하자, 브로키 감독은 1352 대형으로 재차 변화를 꾀했습니다. 여기서는 프린스가 최전방에 자주 나섰습니다.
케빈프린스 보아텡은 선수로서 그와 함께 잔디를 밟기도 했던 다르더이 팔, 현 헤르타 BSC 감독과 그에게 프랑크푸르트암마인에서 특별한 기억을 가져다준 프레디 보비치 전무이사가 자신에게 무얼 기대하는지 잘 압니다. 대기실에서 장악력을 뽐내는 그는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에서도 단숨에 구심점이 돼, 팀에 강력한 정신력을 장착시킨 뒤, 역사적인 DFB-포칼 우승의 순간, 그 중심에 섰습니다. 프린스는 자신이 어릴 때, "베테랑"으로서 그와 같은 역할을 한 니코 코바치를 매우 존경한다고 여러 차례 밝혔습니다. 코바치는 베를린 프린스의 집에서 불과 몇백 미터 떨어진 곳에서 자랐고, 보아텡 가족과 서로 잘 알았습니다. 약육강식의 법칙이 경기장 안팎에서 모두 적용되는 빈민가 출신, 프린스는 코바치가 우러러 받듦을 받는 프로 선수가 되는 과정을 옆에서 지켜봤습니다. 그 덕분인지, 열다섯의 나이 차에도 둘은 가까운 친구입니다. 코바치는 프린스가 분데스리가에 처음으로 선을 보인 한 해가 저문 2006년 여름, 만료된 헤르타 BSC와 계약서를 다시 쓰는 대신, "순수한 축구의 즐거움"을 찾겠다며 잘츠부르크로 떠났습니다. 그리고 12년 뒤, 코바치는 프린스와 선수단을 지도하는 감독으로서 독수리 군단 역사에 한 획을 그었습니다. 잔디 밖에서도 빈민가, 다문화 배경의 어린 베를린 소년들에게 닮고 싶은 얼굴이 되고자 하는 프린스는 다양한 문화권에서 쌓은 자기 경험을 이제 조던 토루나리가, 막시밀리안 미텔슈테트, 다르더이 마르톤 등에게 전해 주어야 합니다. 그는 자기 한쪽 팔에 완장이 채워지는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고 각오를 다집니다. 프린스의 바람대로 언젠가 그가 제롬과 함께 올림피아슈타디온 베를린에서 축구화를 벗기 위해서라도, 당장 그와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의 연봉을 받으며 해외 진출을 타진하는 동생이 돌아오기까지, 그는 최선을 다합니다. 프린스와 베를린 노파의 설레는 시작은 아쉽게도 너무 빨리 막을 내렸지만, 14년 만의 재회는 훨씬 더 많은 이야깃거리를 만들고 아름다운 결말을 맞을 수 있기를 도시의 축구광들이 바랍니다. Willkommen Zuhause, Pri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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