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세리코르디아>: 원초적인 욕망과 오싹하고도 성스러운 자비가 뒤엉킨 울울창창한 가을 숲

2025. 7. 25. 04:0035mm

프롤로그

 

 "Buddha's first noble truth is that all life is suffering. It's called "duhkha".'
 'I think you're confused,' I said. 'Duqqa is an Egyptian condiment.'
 Reggie ignored me.
 'It's Sanskit. Suffering is caused by craving, wanting, desire, attachment,' he said.
 'That's unfortunate. Given we are in the business of desire of craving.'
 'Exactly,' he said. 'It keeps us terminally dissatisfied. But it also drives action. Without desire, nothing would get done.'
 'So you're a bad Buddhist.'
 'I guess so. I'm just not sure why you would never want to be hungry. Wanting gives us wheels. Desire is an engine. It powers us.'"Lonely mouth.

 "Why, when her desire was the most natural thing, was she not brave enough to look it in the eye?", Yuzuki, A. (2025). Butter (P. Barton, Trans.). Fourth Estate.

 "People often talked about denial like it was a bad thing. I was unsure how any human being lived without it, at least on a day-to-day basis. It seemed to me that polite society - indeed, all of civilisation - was based on denial. Things would fall apart if we admitted to each other our true opinions; if we laid bare the reality underlying our drives; if we were honest about the compulsions and needs that sit below the skin and on it; if we owned up to the various hungers that make our mouths itch."Lonely mouth.


프랑스 성 소수자 영화계 독보적인 존재로 손꼽히는 알랭 기로디 감독은 전통적인 장르의 틀을 부수고, 관객이 예상치 못한 놀라움을 선사하는 데 도가 텄습니다. [ⓒ Clemens Bilan via Maxppp]

 

 스릴러나 미스터리처럼, 오래도록 극의 역사를 끌어온 형식을 빌릴 때는 옛 작품을 추억하게 하는 자잘한 헌사, 그 자체보다도 새로운 발상과 울타리를 넓히고, 틀을 깨려는 진보적인 힘이 중요합니다. 때로는 그렇게 함으로써 장르의 경계를 넘어, 널리 인정받는 감독이 되기도 하니, 프랑스 성 소수자 영화계의 독보적인 존재로 꼽히는 알랭 기로디는 바로 이러한 측면에서 몹시 복잡한 인물이라 할 만합니다. 그는 엄격하게도 전통적인 틀 안에서 작업할 때 최고로 다층적인 작업물을 내놓습니다. 이야기 서사가 느슨해질수록, 그에 더욱 충실한 모순을 보이고, 극적인 태엽이 더욱 강하게 감길수록, 이야기의 정신과 형식, 미학, 특정한 상징을 더 부각합니다. 12년 전, 제66회 칸 영화제(Festival de Cannes)에 극찬을 받은 <호수의 이방인 (L'Inconnu du lac)>이 보수적인 관객에게 큰 충격을 선사하면서도 그렇게 "최고"가 됐습니다. 그의 신작, <미세리코르디아 (Miséricorde)> 역시, 이 같은 방식으로 객석에 특별한 경험을 전달합니다. <미세리코르디아>는 근본적으로 어딘가 무뚝뚝하지만, 만족스러운 스릴러입니다. 일관성 있으면서도 놀라움으로 가득한, 그런대로 광범위하면서도 논리성을 잃지 않는 줄거리, 문맥에 따라 달리 느껴지는 행동과 등장인물 감정의 미묘한 차이, 심리적인 함의와 짜릿하고 얼얼한 관찰, 미학으로 그 오싹함을 가득 채웁니다. 누군가 실종되고, 숱한 정황 증거가 제시되고, 사랑이 죽음을 초월하고, 고해성사 장면과 같은 종교적 연관성까지 가지며, 앨프리드 히치콕 경(1899-1980)의 향수를 짙게 풍깁니다. 기로디 감독이 대단히 노골적으로 그려내는 성도 중요한 요소입니다. 스스로 세상에 밝힌 동성애자이면서 어릴 적, 농가에서 자란 감독은 프랑스 시골을 배경으로, 욕망의 흐름과 전통이 깃든 장소에 만연한 성 소수자로서 삶의 모습을 담아, 사회적인 금기와 그 경계를 탐색하며 독자적인 세계를 구축해 왔습니다. 진부한 영화 요소나, 또 웬만해서는 다루어지지 않는, 세대를 뛰어넘는 성적인 욕망을 기로디 감독은 <Du soleil pour les gueux(2001년 작, 걸작으로 평가받는 그의 단편)>, <호수의 이방인> 등에서부터 전면에 냈습니다.

 

 

 <미세리코르디아>는 프랑스 남부의 한 마을을 배경으로 합니다. 자신이 믿고 따르던 향년 62세 빵집 주인, 장피에르 리갈(세르주 리샤르가 분했습니다.)의 장례식에 참석하려, 주인공, 제레미 파스토르(펠릭스 키질이 분했습니다.)가 고향으로 돌아와, 영화의 문을 엽니다. 십여 년간 마을을 떠나 있었기에 묵을 곳 없는 그에게 장피에르의 미망인, 마르틴(카트린 프로가 연기했습니다.)이 방을 내주는데, 원래 리갈 부부의 아들인 뱅상(장밥티스트 뒤랑이 연기했습니다.)이 쓰던 방입니다. 제레미의 오랜 친구인 뱅상은 계속 마을에 살면서 아니(타티아나 스피바코바가 분했습니다.)와 결혼해, 킬리안(엘리오 루네타가 분했습니다.)이라는 아들을 두었습니다. 장례식 이후, 제레미는 예정보다 고향에 오래 머물게 되고, 혼자 남은 어머니 집에 불청객이 들어온 데 대해 뱅상이 분개하여, 그를 쫓아내고자 합니다. 왈테르(다비드 아얄라가 분했습니다.)를 향한 "목마른" 제레미의 접근도 뱅상의 화에 기름을 부었습니다. 뱅상은 제레미가 마르틴과 잠자리를 하고 싶어 한다고 '확신에 가까운' 의심을 품습니다. 그러나, 제레미는 동성에게 끌립니다. 마르틴과 대화에서 그가 장피에르를 전부터 사랑했고, 지금도 사랑한다는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제레미의 일과는 특별하지 않아 보입니다. 가끔 마을을 산책하고, 숲에서 버섯(감독은 버섯을 성적인 욕망을 자극하는 도구로 사용한 동시에, 환상적이고도 병적인 모습으로 그렸습니다. 호색적인 신부가 버섯 채집에 열을 올리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으며, 버섯은 여기서 썩어가는 뱅상의 몸이 다른 형태의 생명으로 되살아나는 재생의 요소로도 기능합니다. 버섯이 있어서 뱅상을 묻은 장소를 정확히 찾을 수 있으니, 제레미의 양심, 죄책감이 가리키는 곳이라고도 하겠습니다.)을 찾고, 뱅상과 장난을 칠 뿐입니다. 하지만, 제레미가 리갈의 집에 머무는 동안, 어둡고 은밀한 욕망의 덤불이 평화로워 보이던 마을을 완전히 뒤덮습니다. 뱅상이 실종되며 이야기가 긴박하게 돌아가기 시작하는데, 실은 숲속에서 제레미가 우발적으로 그를 살해했습니다. 제레미는 남아 있는 사람들, 마르틴과 왈테르, 아니, 경찰(기로디 감독은 자기 작품에 경찰 같은 법 집행 기관을 자주 등장시키는데, 이는 주인공 자아가 초자아와 대립하고, 때로 그로부터 제재를 받으면서 연극적인 요소를 더하고, 장르에 어울리는 위협적인 분위기를 조성하는 역할을 합니다.)이 조여오는 의심의 포위망 한가운데서 이 뜻밖의 살인을 은폐하려 전전긍긍합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범죄와 범죄자를 다룬 "필름 누아르(Film noir)"의 외피를 둘렀지만, 알랭 기로디 감독은 '이번에도' 장르의 틀을 보기 좋게 깨뜨려, 자기 작품을 한 단계 위로 올려놓습니다. 마을을 돌아다니는 모두가 서로 다른 욕망을 품은 듯하니, <미세리코르디아>는 이 기이한 가을, 인간의 원초적인 욕망을 탐구하는 일에 관객의 시선을 붙잡아 둡니다.

 

ⓒ Xavier Lambours/ Les Films du Losange

 

 영화가 뒤틀린 살인의 추리극으로 변모한 뒤에도 관객이 오래전부터 간직해 온 갈래 특징에 관한 지식은 거의 쓸모가 없습니다. 제레미는 나뭇가지와 돌로 뱅상을 죽였습니다. 끊임없이 바뀌는 제레미의 거짓말과 그 뒤에 숨은 진실을, 제레미를 잠결에 심문하겠다고 새벽녘에 방문을 열고, 발밑에 접근한 경찰(알랭 기로디 감독의 작품에는 늘, 이와 같이 웃음을 주는 요소도 군데군데 숨어 있습니다.)보다, 관객이 더 잘 압니다. 마을의 성직자, 필리프(자크 드블레가 연기했습니다.)는 의심스러울 만큼 제레미의 발길이 닿는 어디에나 존재하며, 주인공은 그 의중을 읽는 데 어려움을 겪습니다. 못해도, '결정적인' 고해성사와 또 한 번, 경찰이 내려앉은 어둠을 뚫고, 잠긴 문을 열고, 제레미를 찾은 날, 사제관에서 "경악스러운 장면"을 보기 전까지는 말입니다. <미세리코르디아> 미스터리의 핵심은 끝내, 누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왜(살인이 욕망의 바다를 드러내기 위한 설정 정도로만 기능하므로, 그 동기는 영화에서 특히 불필요하게 그려집니다.) 범죄를 저질렀는지가 아니라, 누가, 어떻게 그에게 어떤 '자비(영화의 제목은 라틴어로 자비를 뜻합니다.)'를 베풀지에 달렸습니다. 감독은 이 신작을 통해 자비란 무엇인지 관객에게 묻습니다. 단순한 용서와 관용이 자비인지, 보편적 관념을 넘어서는 개인의 욕망과 선택조차 포용하기가 자비인지.

 알랭 기로디는 예로부터 피카레스크(Picaresque) 형식의 영화를 잘 만들어 왔습니다. 대개 사회적인 지위가 낮은 주인공(감독은 다수의 매체에서 쉽게 무시당하는 노동 계급의 욕구, 관능의 복잡성을 풀어내기가 정치적으로도 중요하다고 믿습니다.)이 부패한 사회에서 재치를 발휘해 살아가는데, 그에게도 도덕적인 결함이 있습니다. 비교적 느슨한 서사 속에, 평범한 언어와 사실적인 묘사로 이야기가 전달됩니다. <미세리코르디아>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발칙하게 전통적인 도덕률을 뒤엎는 방식으로 각자 욕망을 표출하고, 관계를 맺습니다. 그의 세계에서는 흔히, 늘 고결해야 한다고 요구받는 신부조차 자신만의 욕망을 품었습니다. 필리프의 욕망에는 다만, '튀는' 특성이 있습니다. 작중 진상에 가장 근접한 그는 양심의 괴로움에 자수하려다가 종장에는 스스로 해치려고 하는 제레미를 붙잡고, 그렇게 함으로써 뱅상이 살아 돌아올 수 있는지, 자명한 질문을 던집니다(당연히, 불가능합니다.). 죽음보다 괴로운 감옥에 가지 않게 하려고 돕는다며, 경찰에게 자기 치부를 드러내는 거짓말을 서슴지 않더니, 인제는 많이 바라지 않는다며, 제레미에게, 자신을 위해 살아 달라고 '부탁'합니다(앞선 고해성사 장면에조차 장피에르의 옷을 입었던 제레미는 다시, 자기 옷을 입고 이 장면에 섰습니다.). 일반적인 윤리관으로 그의 행동을 판단한다면, 강하게 질타해야 마땅할지 모르나, 동시에 그는 사실상 유일하게 '순수한 사랑'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사랑을 믿는 그는 장피에르의 관을 땅에 묻으며, "장피에르는 여러분을 사랑합니다. 현재형으로 말하겠습니다. 사랑은 영원하니까요."라는 의미심장한 추도사를 건넵니다. 예컨대, 사라진 아들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기로 작정하고, 제레미에 대한 의심을 거두지 못하면서도, 밤에는 꼭 그를 자기 지붕 아래 두고 싶어 하는 마르틴(영화 결말에 그는 결국, 제레미를 자기 침실로 들여, 옆자리에 눕히고, 자기 손을 잡게 허락합니다.)과 달리, 제레미를 향한 필리프의 마음에는 어떠한 경쟁의식이 보이지 않습니다(상대의 등을 보아야 할 때라도 그를 쉽게 양보할 줄 압니다.). 다시, 이러한 면에서는 그가 신부로서, 종교의 조건, 대가 없는 사랑을 보였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제레미는 그에게 전혀 관심이 없어 보입니다만.). 제레미와 뱅상, 필리프의 관계를 "창세기" 카인과 아벨 이야기에 빗대면, 종교적인 색채가 더욱 강해지는데, 욕망, 사랑으로부터 온 필리프의 '자비'가 그와 제레미 사이, 기이한 공생 관계를 형성하여, 전통적인 종교의 가르침을 뒤틀어 버렸다는 점을 생각하면, 또한 역설적입니다. 죄와 속죄, 용서와 단죄의 온 관념이 흔들립니다. 도로를 질주하는 자동차, 한참 동안 누구인지 밝혀지지 않는 운전자(제레미) 시점에서 구릉 지대, 좁은 시골길을 달리는 영화의 첫 장면은 콧노래도,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도 없이, 완전한 침묵 속, 좌우로 크게 꺾이면서 일반적인 영화 문법을 파괴하고, 첫 번째 당혹감, 불편함을 선사합니다(동시에 '그래서' 그 운전자가 누구인지 궁금증을 갖게 하는데, 이는 제레미가 이 시점을 소유한 주체이면서도 물음의 객체가 되도록 합니다. 작중 어떠한 욕망의 주체이고, 또 다른 욕망의 객체인 그라는 점을 다시금 떠올리게 하는 부분입니다.). 이를 밑바탕에 둔 채로 새로운 탐구의 영역으로 관객을 인도하려는 감독의 의도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 Xavier Lambours/ Les Films du Losange

 

 "But forgetting is much easier than people say, and the effects of trauma can be hidden behind fictional migraines, tiredness, and bad moods.", Enriquez, M. (2024). A sunny place for shady people (M. McDowell, Trans.). Granta Books.

 "I hated this idea that people could only be explained with reference to their past, could only function if the secrets that lay within them were exposed and yanked into the light, like freshly netted fish flailing on a wharf. I thought the opposite was true: progress depended on being able to forget - to lay asphalt over the ruins and keep moving."
, Maley, J. (2025). Lonely mouth. Fourth Estate.

 

 <미세리코르디아>의 등장인물들은 여느 미스터리 스릴러, 필름 누아르 장르의 작품 주인공처럼, 그 과거가 베일에 싸여 있습니다. 돌아보면, 제레미를 고향으로 다시 이끈 동력은 성적인 욕망을 자극하는 유대감입니다. 그는 단순히 장피에르의 죽음에 애도의 뜻을 표하기 위해 차를 몰지 않았습니다. 마지막으로 그의 얼굴을 보고, 그 옆에 몸을 누이고, 그 주변의 공기를 들이마시려고 그는 리갈의 집에 왔습니다. 심지어는 그와 뱅상의 관계에도 동성애적 긴장감이 깔려 있다고 할 만합니다. 두 사람이 숲에서 서로 몸을 부딪는 모습(이들이 감독의 전작들에 나오는 노골적인 정사 장면을 대신하여, 성적인 끌림과 신체적인 공격성 사이 긴장감을 팽팽하게 충전합니다.)이나, 뱅상이 새벽같이 일어나서 제레미가 잠자는 침대맡을 서성이는 행동이 그를 은연중 드러냅니다. 뱅상은 묘하게 제레미와 왈테르 사이를 주시하며, 질투심에 가까운 감정도 보입니다. 하지만, 알랭 기로디 감독은 이들의 과거 서사를 읊는 데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보통은 인물의 앞선 행적이 작중 일어나는 일의 동기를 이해하고, 앞으로 행보를 예측하는 데 필요한 단서가 되지만, 기로디 감독에게 과거란, 향수를 불러일으켜서 분위기를 강화하고, 영화관을 나가, 관객마다 다른 추측, 해석을 내놓도록 던져 놓는 장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어제까지 이야기는 그의 영화와 무관합니다. 그는 객석에 앉은 모두가 '현재'에 집중하기를 바랍니다. 제레미가 왈테르를 찾았을 때, 왈테르는 이를 의아해합니다. 예전에 제레미가 자신에게 몹시 나쁘게 굴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뱅상도 이를 알아서, 제레미의 행동을 이상하게 여깁니다.). 하지만, 제레미는 그를 기억하지 못합니다. 설령, 왈테르가 진실을 말하고 있대도, 그는 거리낌 없이 그의 집에서, 그와 파스티스(Pastis)를 나눕니다. 제레미가 숲에서 '마침내' 뱅상을 살해한 데는 그와의 갈등뿐 아니라, 그날, 왈테르와 있었던 일에 대한 분노로 주체가 되지 않은 충동이 강하게 작용했습니다. 영화 종반부에 제레미의 자살 기도를 막은 필리프는 (뱅상을 살해하고, 그 시신을 유기한 데 대한) 죄책감은 시간이 흐르며 작아진다고 말합니다. 결국, 그 또한 과거의 일이 되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 Xavier Lambours/ Les Films du Losange

 

 "The future trails its loose ends into the present until it becomes the present, settles on one or other human flesh, and its flourishing or brazen regime abruptly begins. Whichever happens to be the case. I wonder where we'll be in a year, Katharina once asked her mother. Who replied: We're lucky we don't know.
 
 How long does it take for the dead to be forgotten? … The dead, linked umbilically to the living by their hope for punishment to be exacted. Everything measured itself against these victims, whether it was his father's silence or his own rebelliousness. … was a human being just a container to be filled by time with whatever it happens to have handy? Did you have any control over what you saw in the mirror? Or was one helplessness merely succeded by another? Any confession of guilt meant saying I, and not "human beings" or "one". And there was no shopping street in the Western world where you could purchase such an I.", Erpenbeck, J. (2023). Kairos (M. Hofmann, Trans.). New Directions.

 

 겉으로는 뱅상과 제레미의 갈등이 서사의 중심이 되는 듯하지만, 사실, 그들의 관계는 물론, 왈테르와 뱅상의 관계, 제레미와 왈테르의 관계도 폭력으로 점철돼 있습니다. 알랭 기로디 감독은 성적인 갈망이 충족되지 않고, 자기 욕망의 대상으로부터 거절당하는 인물들을 세웠습니다. 실제로 그러한 거절이 훨씬 자주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제레미와 파스티스를 마시던 중에 뱅상이 찾아오자, 제레미와 같이 있는 모습을 들키기 싫었던 왈테르는 친구를 문전에서 돌려보냈습니다. 제레미(후에 제레미는 술에 취해서 한 행동일 뿐이라고 둘러댔지만, 이는 여지없이, 왈테르를 향한 그의 성적인 욕망을 엿보였습니다.)가 그새 자기 속옷을 입고 나타나자, 이번에는 엽총까지 동원하여 그를 멀리 쫓았습니다. 이어, 제레미는 자기 안의 폭력을 극한으로 끌어내, 뱅상을 해하였습니다. 숲에서 발생한 이 사건이 영화를 계속 앞으로 끌고 가기는 해도, 결국, 여기서 수면 위로 떠오른 뱅상과 제레미의 갈등이 영화의 핵심 쟁점은 아닙니다(다시, 그 자리는 숱한 욕망덩어리들이 채웁니다.). 흥미롭게도 뱅상과 '그 일'이 있기 전, 제레미는 마르틴의 권유로 장피에르의 옷을 입었습니다. 자신이 지금도 아주 좋아한다고 말하는 그의 바지와 스웨터를 입고, 제레미는 주저하지 않고, 속옷과 양말까지 요구했습니다(오래된 욕망에 다가서는 그의 모습으로 보이는데, 옛 사진 속, 늠름하고 건장한 체구를 뽐내던 장피에르의 옷이 제레미에게 꼭 맞는 모습은 앨프리드 히치콕 경의 <현기증 (Vertigo)>을 연상시키기도 합니다.). 그는 고인이 운영해 온 빵집을 인수할지 고민하기도 합니다. 뱅상은 이 전부를 달가워하지 않지만, 결국, 그가 영화 결말부에 '아마도 생전, 장피에르의 자리였을' 마르틴의 옆자리에서 잠을 청한다는 점을 기억하면, 숲에서 뱅상을 해하던 순간, 왈테르의 속옷과 장피에르의 옷을 입은 범인은 제레미이지만, 동시에 장피에르였습니다(아버지가 아들을 해쳤고, 각 인물의 관계가 실타래처럼 얽혔다고 해석한다면, 등장할 때마다 작은 화면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뱅상, 아니와 말을 섞지 않는 킬리안의 모습이 의미심장하기도 합니다.). 영화는 제레미의 삶을 거의 설명하지 않습니다. 툴루즈에서 왔다고 하고, 전 애인에 관한 언급도 있으나, 이러한 세부 사항은 편리하게 짜깁기된 허구에 그칠지도 모릅니다. "돌아온 탕아"처럼 그려지는 그와 마르틴의 관계, 그와 필리프의 관계, 그와 왈테르의 관계가 지난 십 년의 공백을 빠르게 지우고 있으니, 그의 현재는 장피에르가 남긴 잔재와 앞으로 (주변 인물들과) 재현할 수 있는 (장피에르로서, 또한, 일부는 뱅상으로서) 삶의 모습을 위해 '미리', 의도적으로 비워졌습니다.

 

ⓒ Xavier Lambours/ Les Films du Losange

 

 <미세리코르디아>는 여러모로 독특합니다. 알랭 기로디 감독은 훨씬 더 파격적인 전작, <Viens je t'emmène>에서 프랑스 내 이슬람 혐오에 대한 논쟁적인 시각을 제시했는데, 최신작에서 곧장, 자신에게 친숙한 목가적 신비주의 영역으로 돌아왔습니다. <호수의 이방인>, <스테잉 버티컬 (Rester vertical)> 같은 작품과 비교해도, <미세리코르디아>는 기로디 감독의 세계로 진입하는 데 대한 장벽이 낮다는 평가(그렇다고 이 영화의 가치가 다른 작품보다 떨어진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가 많으며, 그가 이 영화에서처럼 가족의 모습을 보여준 적도 거의 없습니다. 그래도 익숙한 면을 찾는다면, 영화의 공간적 배경을 들어야 합니다. 기로디 감독의 여러 작품이 그의 고향, 프랑스 남부 옥시타니에서 촬영됐습니다. <미세리코르디아>의 제레미가 찾은 고향은 생마르시알이라고 하지만, 기로디 감독은 상당수 장면을 그가 자란 아베롱 데파르트망 작은 마을에서 찍었습니다. 외로운 비포장도로와 광활한 황야의 무성한 공허함이 인간적인 접촉의 매 순간, 편집증적이고도 의뭉스러운 암시적 분위기를 더합니다. 많은 사건이 야외에서, 작품을 관통하는 욕망이 시각적으로 발현되는 숲(억압된 본능이 자유로이 풀려나는 공간이며, 동시에 예측할 수 없는 사건이 벌어지는 심리적인, 상징적인 미로입니다.)에서 이루어집니다. 가을철, 낙엽이 두껍게 깔리고, 땅은 비에 젖었습니다. 자욱한 안개가 길을 잃기 쉽게 하고, 이는 진실과 환상의 경계를 모호하게 하여, 이 마을 공동체에서 자기 자리를 되찾으려 하는 제레미의 복잡한 심리와 도덕적인 혼란을 보여 줍니다. 등장인물 행동의 대부분이 완전히 노출된 실외에서 벌어지는 점은 기로디 감독의 세계에서 모든 인간이 벌거벗은 존재라는 점을 기억하게 합니다. 자기 이야기를 잃어버리고, 욕망 앞에 통제력을 잃었다는 점도 자각하지 못하는 이들은 날짐승과 다르지 않습니다. <미세리코르디아> 촬영은 이제,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Portrait de la jeune fille en feu)> 촬영감독으로 유명한 클레르 마통이 맡았습니다. <호수의 이방인>, <스테잉 버티컬>에 이어, 어느덧 세 번째 협업에 나선 기로디 감독과 그는 밤의 어둠을 담아내는 방식에 집중했습니다. 조명 없이, 어둠과 함께 작업하며, 심지어는 달빛에 의지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마통이 담아낸 관능적인 영상이 작품이 내비치는 신비성을 한층 강화합니다.

 

ⓒ Xavier Lambours/ Les Films du Losange

 

 알랭 기로디 감독은 비교적 이름이 덜 알려진 배우를 찾아, 자기 작품의 주역으로 자주 세운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관객은 그 덕에, 어떠한 선입견도 없이 인물의 신비롭고도 이방인 같은 특성에 주의력을 모을 수 있습니다. 제레미 파스트로 배역을 맡은 펠릭스 키질도 <미세리코르디아> 공개 전까지는 대중에 썩 익숙한 얼굴이 아니었습니다. 기로디 감독은 십 년 가까이 그를 지켜봤다고 전하는데, 이 기간에도 키질은 텔레비전 시리즈와 몇몇 영화에서 비중이 상대적으로 크지 않은 역할을 (주로) 해왔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기로디 감독에게는 단순하고, 최대한 절제된 몸짓으로 복잡한 단상을 표현할 줄 아는 배우가 필요했고, 그는 거기 부합했습니다. 제레미는 어린 시절 절친했던 친구, 뱅상을 죽일 만큼 모질면서도 겉으로 천사 같은 탈을 썼습니다. 키질은 그가 어린아이와 같으면서도 성숙한 모습을 지녔고, 순진한 면이 있으면서도 위험한 인물이라고 해석했습니다. 말로써 전달되는 내용이 거의 없이, 괴기스럽고 비밀스러운 영화에서 그 중심의 인물을 그리기 위해, 배우는 서로 다른 관계에서, 각기 다른 태도를 보이려고 노력했다고 합니다. 이는 다시, 제레미와 관계에서 엄격한 노파, 말하자면, 정형적인 미망인의 얼굴과 (역시) 어린아이 같은 순간을 공존시킨 마르틴 역의 카트린 프로(그는 키질과 비교하기 힘들 정도로 유명한 배우이지만, 기로디 감독은 그에게서 지극히 평범한 면도 보인다고 말했습니다.)와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호흡을 빚어냈습니다. 기로디 감독은 작품에 어울리는 배우를 찾아, 맞는 옷을 입히기가 감독의 임무라고 믿습니다. 키질과 프로 선택은 바로 그러한 면에서 아주 적절했습니다. 수상에는 실패했으나, 이 연기로 키질은 올해, 세자르상(César du cinéma)과 뤼미에르상(Prix Lumières) 신인남우상(César de la meilleure révélation masculine / Lumière de la révélation masculine) 후보에 모두 이름을 올려, 앞으로 행보를 더 기대케 했습니다.

 

ⓒ Xavier Lambours/ Les Films du Losange

 

 알랭 기로디의 작품 세계 핵심어인 '욕망'은 왕왕 범죄와 같이 여겨지기도 하고, 어떠한 꾸밈이나 숨김이 없이 드러나는 동성애적인 장면과 마주보기도 합니다. 육체적인 탐닉이 징벌적인 위협과 겹치는 모순으로, 감독은 고루한 도덕 이야기의 제약을 벗어납니다. <미세리코르디아> 주인공인 제레미는 동성에게 끌리며, 그와 같은 성 소수자의 욕망이 극에서 시종일관 다루어지지만, 성 소수자 영화의 범주조차 극복하여, 관객이 이성애와 동성애를 더는 구분 짓지 않게 합니다. 동성애가 '특별하게' 그려지지도 않고, 이성애와 '다르게' 묘사되지도 않습니다. 기로디 감독은 인간 밑바닥에 성과 폭력이 있고, 성은 욕망을, 욕망은 폭력을, 폭력은 죽음을 낳는다고 해석합니다(그런고로 욕망과 죽음이 논리적 모순 없이 이어집니다.). 그가 '인간'이라면, 동성애자인지 이성애자인지, 심지어 양성애자인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성, 폭력, 욕망, 죽음, 그 전부가 뒤얽힌 인간 군상을 관객이 목도하고 있는 까닭입니다. "밑바닥 본능"이 도덕과 충돌(결국, 도덕 또한, 흔들리기 쉬운, 상대적인 기준이기에)하면서 기묘한 형태로, '자비'와 연결되는 순간과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초장에 시신으로만 한 번 등장한 제빵사 고인(물론, 옷가지와 욕망의 '순환'으로, 장피에르의 존재감은 그 한 번 등장에만 국한하지 않았습니다.)과 그의 유가족, 버섯 사업을 하는 한 남자가 나오지만, 빵은 화면에 거의 잡히지 않고, 어느 순간, 언어적으로도 아무런 기능을 하지 않는 듯합니다. 버섯은 욕망과 죽음(제레미가 뱅상을 묻은 곳에서 말하자면, 버섯이 피를 먹고 자랐습니다.)의 은유로서 중요한 장치이지만, 감독이 사전에, 그를 주제로 깊이 공부하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작중 결정적이며, 가히, 인상적인 고해성사 장면(두 사람을 동시에 잡기보다는 각자 얼굴을 근접 촬영하여 밀도를 더한 이 장면은 필리프가 제레미에게 자신의 욕망, 사랑을 고백하며, 그의 짐을 함께 지겠다고 말한 뒤에야 멀어지며 해소합니다.)에 신부인 필리프는 사제의 칸에 제레미를 밀어 넣었고, 귀신같이 무섭고 잔인한 사람이 실은 버림받았지만, 여전히 원기 왕성하고, 사랑스럽습니다. 하나 같이 신선한 충격을 주어 관객을 밀어붙이는데, 이러한 주제적인 복잡성과 통찰력에도 불구하고, 극적인 구성과 예술성,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는 데 성공했으니, <미세리코르디아>는 신경을 곤두세우면서도 그를 간지럼 태웁니다. <호수의 이방인>을 기대한 사람이라도, 기대와 다른 광경이 눈앞에 펼쳐진대도, 기로디 감독의 신작을 미워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 있을 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