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의미의 물음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서방의 책임?

2022. 2. 25. 15:00Berlin

ⓒ Valentyn Ogirenko/ Reuters

 

Ukraine maps: Tracking Russia's invasion - BBC News

 

Ukraine maps: Tracking Russia's invasion

Russian troops are in northern districts of the capital Ky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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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년 2월 24일, 새벽.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 대한 "특별 군사 작전"을 개시했습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사흘 전, 자칭 도네츠크 인민공화국과 루간스크 인민공화국의 독립과 주권을 인정한다는 대통령령에 서명, 우크라이나 정부군에 맞서는 분리주의 공화국 반군들에 군사적인 지원을 본격화했습니다. 러시아가 "평화유지군"이라고 주장하는 군대가 순식간에, 한꺼번에 우크라이나 동쪽과 북쪽(벨라루스 협조), 남쪽에서 진군했고, 드네프르강을 낀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의 비행장 등 기반 시설에는 공습이 행하여졌습니다. 영락없는 침략 전쟁의 광경으로, 이는 전제 정치 국가와 민주주의 세계의 느슨한 고리 사이 분쟁에서 촉발한 사실상 첫 번째 전면전입니다. 전제 정치 국가들(예를 들어, 알략산드르 루카셴코의 벨라루스, 중국, 이란, 쿠바, 니콜라스 마두로의 베네수엘라 등)은 오늘날, 세계적인 각종 제재에 맞서, 서로 협력함으로써 고립에서 벗어나고자 하는데, 러시아는 그중에서도 입김이 세고 상징성이 큽니다. 현대적인 도당정치와 독재 정권 결합 형태를 내보인 국가로서나, 민주주의 세계, "서방"과 힘 싸움에서 일반적인 현상을 뒤집고자 하는 선두 주자로서. 우크라이나와 이 전쟁을 통해 푸틴 대통령은 영토를 확장하고자 할 뿐 아니라, 더는 국제 사회의 "오래된 규칙"이 성립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자 합니다.

 우크라이나의 올레흐 랴슈코, 보건장관은 러시아군의 공격 첫날, 민간인 57명이 사망하고 169명이 다쳤다고 보고했습니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에 따르면, 우크라이나군은 137명을 잃었고, 316명의 군인이 다쳤습니다. 러시아는 키이우 등에 공습이 우크라이나 군사 기반 시설을 파괴하려는 조치일 뿐, 민간인을 공격하지는 않았다고 거듭 강조하지만, 현지 언론과 소셜 미디어 등, 다양한 창구를 통해 민간 거주 아파트와 주택 등이 러시아의 미사일 공격에 파괴됐음이 알려졌습니다. 즉,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는 시도에 불과합니다. 유엔 난민 기구의 예비 추산에 따르면, 이미 십만이 넘는 우크라이나인이 피난길에 올랐으며, 몰도바의 마이아 산두 대통령은 4,000명 넘는 피난민이 우크라이나에서 국경을 넘었다고 밝혔습니다.

 미국, 조 바이든 행정부는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을 "침략자"로 규정하고, 러시아에 대한 전격적인 수출 통제를 허가, 달러화와 유로화, 파운드화, 엔화 등을 통한 그들의 거래 능력을 제한했습니다.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등 유럽 연합 회원국도 그에 동조했습니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와 국경을 넘은 뒤, 푸틴 대통령과 통화하여 "우크라이나를 둘러싼 상황에 관한 진지하고 공개적인 의견 교환"을 했으며, 추후 연락망을 유지하기로 합의했습니다. 하지만, 서구 열강의 그 모든 경제 제재가 푸틴 대통령의 다음 행동, 결정에 미칠 영향은 크지 않을 전망입니다. 지난 2014년, 크림 위기 당시에 러시아가 그를 장악하고 국민 투표를 붙여서 최후에 사실상 러시아로 편입시켰을 때도 국제 사회는 (그 모든 조치에도 불구하고) 소극적으로 대응할 뿐, 그를 방관했다는 비판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은 우크라이나가 홀로 남겨졌다며 도움을 호소했고, 안드리 멜니크, 주독 우크라이나 대사는 베를린에서 실질적인 도움을 기대할 수 없었다며, 독일 정부가 벌써 우크라이나를 포기한 듯이 행동한다고 불평했습니다. 바이든 행정부도, 북대서양 조약 기구(NATO)도, 우크라이나 파병은 고려하지 않습니다. 결국, 일각에서 각자 계산기를 두들기는 데만 분주하다고 비판을 가하지만, 무엇보다 확전을 피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 Uriel Sinai/ Getty Images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긴장 상태는 오래됐습니다. 1991년, 소비에트 연방이 붕괴한 뒤로 미국과 유럽의 동맹국들은 '독립한' 우크라이나를 러시아에서 떨어지게 하여 서방에 결합하려는 시도를 계속했습니다. 서쪽의 프랑스부터 독일, 폴란드, 우크라이나, 동쪽으로 러시아까지 이어지는 "안보 지도"가 핵심입니다. 우크라이나를 러시아와 맞닿은 국경의 보루로 삼기 위해, 민주주의 서방은 크게 세 가지 전략을 폈습니다. 하나는 유럽 연합의 확장입니다. 우크라이나를 경제적으로 서방이 끌어안음으로써 그들을 러시아로부터 떼어 내려 했습니다. 이는 발트해 국가들을 상대로 했던 그와 같습니다.

 둘째는 "오렌지 혁명(시위자들이 입은 상의 색깔과 그들이 흔든 깃발 색깔에서 이름이 유래했습니다; 사진)"의 지지입니다. 2004년, 우크라이나에서는 마치, 2003년의 조지아가 "장미 혁명", 2005년의 키르기스스탄이 "튤립 혁명"을 통해 그랬듯, 독재 정권에서 비롯된 정당을 몰아내고 자유 민주 정부를 수립하자는 목소리가 커졌습니다.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직접 지원한, 러시아에 친화적인 빅토르 야누코비치 후보가 다이옥신을 통한 독살 위험까지 이겨낸 빅토르 유셴코 후보를 제치고 그해 11월의 대선에 이겼다고 발표됐지만, 이내 부정 선거 꼬리가 밟혔습니다. 키이우 등지에서 촉발한 대규모 시위로부터 재투표가 이어졌고, 결국, 이듬해 1월, 유셴코가 아슬아슬한 승리를 거두어, 우크라이나 제3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습니다. 야누코비치가 오 년 뒤의 대선에 율리야 티모셴코를 꺾고, 기어이 그 뒤를 이었지만. 친유럽주의 성향의 미헤일 사카슈빌리가 에두아르드 셰바르드나제를 대신하는 결과를 낳은 조지아 장미 혁명과 더불어, 오렌지 혁명은 푸틴 대통령이 러시아에서 대내외 선전에 "색깔 혁명"을 극히 경계하도록 했습니다. 전제 정치 국가의 수장이 민주적인 정부 수립을 부르짖는 민중 운동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기란, 지극히 당연해 보이기도 합니다. 인기 있는 정치 지도자는 외국 꼭두각시로 몰고, 반부패와 민주주의 구호는 혼란과 국가적 불안정성만 일으킨다고 몰아세웠습니다. 2011년, 끝내 러시아에서도 선거 조작에 대한 대규모 시위가 벌어지자, 그는 실로 오렌지 혁명의 "외상 후 스트레스"에 시달렸습니다. 언젠가 자신도 권력에서 밀려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휩싸였으니.

 

ⓒ Jeff J Mitchell/ Getty Images

 

 공격적 현실주의(Offensive realism)의 문을 연 인물이자, 1994년, 우크라이나의 핵무기 포기 선언을 "필연적으로 러시아의 침략에 직면합니다."라며 반대했던 존 미어샤이머 교수(시카고 대학교 국제 정치학)는 미국과 서방이 민주주의를 퍼뜨리는 이유는 그들에게 친화적인 정부가 수립하리라 기대하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러시아가 크림 합병(2014년)을 단행하기 전후 상황을 살핀다면, 2013년 11월, 우크라이나와 유럽 연합은 자유 무역 협정의 전편으로 제휴 협정 체결을 논의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11월 21일, 바로 그 빅토르 야누코비치, 당시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판을 엎었습니다. 후에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발표하기로, 우크라이나는 이때, 러시아로부터 (당장 경제적으로 더 큰 도움이 되는) 150억 달러 규모 차관을 들이기로 했습니다. 12월 1일, (또 한 번) 키이우에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나, 시위대가 시청을 장악하는, 그 유명한 유어로마이단(Євромайдан; 사진)이 시작됩니다. 그는 해를 넘기며 더욱 뜨거워졌고, 특히 2014년 2월에는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며 과격화합니다. 2014년 2월 22일, 마침내 야누코비치 대통령이 쫓겨났습니다. 친서방 과도정부가 수립되는데, 그 직후에 발표된 몇 가지 조처/정책이 푸틴 대통령의 "큰 우려"를 삽니다. 소수 민족 비율이 10%를 넘기는 지역에서 해당 소수 민족의 언어를 공식으로 인정하는 <<국가 언어 정책 기초에 관한 법률>> 폐지가 대표적입니다. 우크라이나 인구 다섯 명 중 한 명이 러시아계인데, 크림반도에서는 그가 다섯 명 중 세 명꼴까지 뜁니다. 20% 정도 차지하는 우크라이나계, 15% 정도 되는 타타르계를 합친 수보다 많습니다. 푸틴 대통령의 시선에, 키이우에서 일이 돌아가는 형세는 러시아에 대한 사회적 반감을 부추겨, 치명적인 갈등을 초래할 수밖에 없는 듯 보였습니다. 특히, 그 악명 높은 이오시프 스탈린 집권기에 강제로 이주를 당했던 크림반도의 타타르인들은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도움을 준 우크라이나 정부에는 우호적이어도, 러시아에 대한 앙금은 뿌리가 너무 깊어, 곪을 만큼 곪았습니다. 이 전부는 푸틴 대통령이 군대를 일으킬 그럴싸한 명분(해당 지역의 러시아인을 사회·정치적 혼란으로부터 보호한다는)을 제공하는 동시에, 일 년 내내 바닷물 표면이 얼어붙지 않는 항구를 손에 넣고자 하는 그의 야욕, 조바심을 자극했습니다. 결국, 소치에서 2014 동계 올림픽이 폐막하고 일주일이 채 안 된 2월 27일, 28일, 러시아군이 움직였습니다. 크림 합병(3월 18일)까지는 한 달이 채 걸리지 않았습니다.

 

ⓒ NATO

 

 

 우크라이나를 통해 러시아를 옥죄기 위한 서방의 마지막 전략, 어쩌면,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제일 심하게 자극하는 하나는 북대서양 조약 기구(North Atlantic Treaty Organization (NATO))의 확장입니다. 북대서양 조약 기구는 1999년과 2004년, 크게 두 걸음을 옮겼습니다. 폴란드와 체코, 헝가리가 먼저 그에 편입됐고, 발트해에 접한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아래로 루마니아와 불가리아가 뒤를 따랐습니다. 여기에 2008년 4월, 루마니아의 수도, 부쿠레슈티에서 열린 정상 회담에는 미국을 위시한 국가들이 조지아와 우크라이나의 가입을 환영한다는 발표문을 쓰기에 이릅니다. 이때야말로 지금껏 키이우가 서방 동맹에 제일 가까웠던 순간이라지만, 사실, 상황은 묘했습니다. 빅토르 유셴코 대통령은 우크라이나 출신 미국인과 두 번째 결혼하여 가정을 꾸리기도 했고, 몇 년 전, 다이옥신 중독으로 "죽다가 살아난" 뒤, 그 배후에 푸틴 대통령과 크렘린이 있다는 의심을 거둔 적이 없습니다. 그는 NATO 회원국이 돼야만 국가 주권을 보장받을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지 못하면, 우크라이나가 영영 모스크바에 의존하는 "반식민지 국가"로 남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혔으므로. 마침, 조지 W. 부시, 당시 미국 대통령도 그를 적극적으로, 단호하게 지원했으니, 그에게는 절호의 기회가 찾아온 듯 보였습니다. 하지만, 독일, 앙겔라 메어클 총리와 프랑스, 니콜라 사르코지 대통령은 과연, NATO 가입을 향한 키이우의 관심이 진지한지 의구심을 거두지 못했습니다. 유셴코 대통령, 그와 연정을 이룬 율리야 티모셴코 총리, 미국에서 날아온 관계자들이 보인 단합과 달리, 우크라이나 내부에서 단결력은 대개 떨어졌습니다. 2007년 9월, 야당 지도자인 빅토르 야누코비치가 의회 선거를 통하여 NATO 가입에 반대하는 운동 선두에 섰고, 다수의 우크라이나인이 거기 동조했습니다. 메어클 정부는 우크라이나 전체 인구의 삼분의 이 정도가 NATO에 대한 부정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고 가정했습니다. 과거, 소비에트 연방의 영광을 위해 아프가니스탄에서 싸운 우크라이나인들이 서방을 위해 중앙아시아 남부로 돌아가서 무기를 쥐어야 할지 불안해한다고. 어떤 면에서는 우크라이나보다 미국이 우크라이나의 NATO 가입을 더 목 빼고 기다린다는 인상을 주었습니다. 우크라이나에서는 군사와 정치, 사법적인 부문에서 NATO 기준에 부합하는 개혁의 차도가 너무 느리기도 했습니다. 다시 크렘린을 탓할 수 있지만, 예를 들어, 국제투명성기구(Transparency International)의 부패 지수에서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와 별반 다르지 않은 수준, 100위권 밖으로, 심지어는 그 순위가 자꾸 하락했습니다.

 

2008년, 부쿠레슈티에서 만난 조지 W. 부시와 앙겔라 메어클(2. bzw. 4. von links). [ⓒ Gerald Herbert/ picture alliance]

 

 부쿠레슈티에서 조지아와 우크라이나를 NATO 회원국으로 받아주자고 보인 그 손짓이 불필요하게 러시아를 자극한다며 독일과 프랑스는 미국에 맞섰습니다. 모든 안건에 만장일치 원칙이 적용되는 기구지만, 사실상 미국 없이는 군사력이 형편없는 가운데, 일종의 차단 소수 유지를 위한 동맹이 필요했습니다. 스페인과 포르투갈, 이탈리아, 베네룩스 국가들, 노르웨이 등이 그 '반대' 의견에 힘을 보탰고, 미국을 지원하던 영국도 동요했습니다. 러시아와 직접 국경을 맞대거나 가까운 동유럽 국가들과 캐나다가 미국과 연대했지만, 트빌리시와 키이우는 NATO에 들지 못했습니다. 오늘, 이 사건을 돌아보며 뭇사람이 "그날,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이 누구도 몰래 시작됐습니다."라고 비약하지만, 조지아와 우크라이나의 NATO 가입이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역린을 건드릴 수 있다는 그 우려에는 설득력이 있었습니다.

 러시아가 독일 재통일을 승인하는 조건으로 NATO 동진을 그만두겠다던 미국의 약속은 소비에트 연방 붕괴를 전후로 "오래된 거짓말"이 된 지 오래입니다. 한때는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러시아도 미국과 동등한 NATO 회원국이 될 수 있다고 했지만, 역시, 그 드라마가 끝난 지 오래입니다. 2008년에 크렘린은 국수주의적 대중영합주의 인사로 분류되는 드미트리 로고진을 브뤼셀로 보냈습니다. 발트해 연안, 크림반도, 우크라이나 영토 대부분이 예로부터 러시아 영토라고 주장한 로고진은 "향수"에 젖은 푸틴 대통령의 정신을 똑똑히 대변했습니다. 모두가 그는 과거의 영광을 되찾는 데 혈안이라고 입을 모으는데, 아직은 그가 그 목표를 어떤 식으로 이루려 하는지 아무도 확신하지 못했습니다.

 조지아와 우크라이나, 특히 우크라이나가 미국의 품에 안긴다면, 러시아는 서쪽의 큰 위협을 느껴야만 했고, 느껴야만 합니다. 우크라이나는 (프랑스의 해외 영토를 제외하고) 러시아 다음으로 유럽에서 면적이 넓으며, 북동쪽 끝에서 모스크바까지 직선거리로 500㎞가 채 안 됩니다. 에스토니아와 라트비아, 리투아니아(칼리닌그라드와) 등도 러시아와 국경을 맞댔으나, 우크라이나와 맞먹는 위협으로 볼 수 없습니다. 러시아는 부쿠레슈티에서 나온 날벼락 같은 발표에 즉각 반응하여, 그를 "직접적인 위협"으로 선포하고 "조지아와 우크라이나의 참여는 전 유럽 안보에 매우 심각한 결과를 초래하는, 엄청난 전략적 실수입니다."라는 성명서를 냈습니다. 그리고 모두가 기억하듯, 최후의 결말은 결국, 전쟁이었습니다. 2008년 8월, 러시아와 조지아 사이 전쟁이 발발했습니다. 비록 그 개전 책임은 조지아에 있으나, 자국 평화유지군이 살해된 뒤로 러시아가 개입, 트빌리시 점령을 목전에 두자, 미국과 NATO가 움직였습니다. 그들 연합 함대가 흑해에 집결해 러시아에 종전을 종용했고, 니콜라 사르코지 대통령 주재의 평화 합의안을 러시아가 받아들였습니다. 연합 함대의 빠른 집결, 전진과 계산에 없던 대치에 이제껏 보지 못한 큰 위기의식이 꿈틀대기 시작했습니다. 누구도 쉬이 긴장을 풀 수 없는.

 

ⓒ Sergei Ilnitsky/ dpa

 

 다시 시계를 돌려 2014년, 크림 합병 직후. 우크라이나를 완전히 무너지게 하고 소비에트 연방을 회복하려 움직이는 대신, 크렘린은 서방에 크게 두 가지 선택지, 가능한 결과를 제시했습니다. 그들이 뒤로 한 발짝 물러나면, 우크라이나가 완충국으로 기능하는 "2014년 2월 22일 이전의 상태"로 돌아갈 수 있지만, 그들이 우크라이나를 품어서 보루로 삼으려는 그 위험한 싸움을 계속한다면, 우크라이나는 망가지고 그 갈등이 '필요한 만큼' 길어질 수 있다고. 분명하고 또렷하며, 동시에 단호한 경고였습니다. 이에 대한 미국과 서방의 행동도 드러난 목적과 성격이 뚜렷했습니다. 크림반도가 러시아의 수중에 떨어지고 사흘 만에 브뤼셀에서 유럽 연합은 우크라이나와 정치 분야 협력 협정을 체결했고, 석 달 뒤에는 자유 무역 협정 등, "넓은 범위의 협력 협정"을 완성했습니다. 러시아와 친한 분리주의 세력이 독립을 요구하던 몰도바에도 금세 손을 뻗쳤습니다.

 

 "미국이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소비에트 연방과 그 세계적인 야망에 맞섰듯,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러시아를 주변국에 대한 그 팽창주의적 야망을 제한하고 외부 세계와 경제적, 정치적인 유대에서 끊어내 고립하며 효과적으로 국제 사회에서 따돌림받는 국가로 만드는 일에 힘을 쏟습니다. 사실상 오바마 대통령은 1947년, 조지 F. 케넌이 처음 제시하고, 소비에트 연방 붕괴까지 미국이 전략의 주안점을 둔 모스크바에 접근 방식(이른바 봉쇄 전략)을 새 시대에 맞게 개조하고 있습니다. 행정부의 최우선 과제는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에서 오래도록 러시아를 지지해 온 중국까지 포함하여 러시아에 대한 국제적인 공감대를 형성하기입니다." - 2014년 4월 19일, <<뉴욕 타임스>>

 

 미국은 이때도 러시아에 대한 경제 제재를 주도했습니다. 러시아 자산을 동결했고, 그곳으로 여행을 제한했습니다. 유럽 연합이 보조를 맞췄습니다. 뒤늦은 대응이라는 지적도 따랐지만, 국제 유가 하락과 맞물려서 러시아의 경제적인 불이익은 수년간 제법 컸습니다. 러시아(그리고 중국)의 팽창주의를 견제하는 "신 봉쇄 전략"은 21세기, 미국의 국제 전략을 상징하는 이름 하나가 됐습니다. 종합할 때, 서구 열강은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친구'를 곳곳에서 줄여나갔습니다. 존 미어샤이머 교수를 비롯한 현실주의 학자들이 주장한 "중립적인 우크라이나"를 세우는 일에는 아무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20세기 유럽, 동북아시아, 페르시아만 순에서 21세기 아시아, 페르시아만, 유럽 순으로 그들의 전략적인 관심, 그 우선순위를 개편한 미국도, 옛 소비에트 연방의 국가들과 각종 협정 체결에 몰두한 유럽 연합도, 그리고 심지어 중심에 선 우크라이나조차도 그 논의에는 극도로 소극적이었습니다. 우크라이나는 2019년 2월, NATO와 유럽 연합 가입을 국가의 최우선 과제로 설정하는 개헌을 단행하기에 이릅니다. 크렘린이 절대 반길 리 없었습니다. 희극인 출신으로, 취임 전까지 정치권에서 공부 경험이 부족했던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은 그가 요직에 앉힌 동료 희극인, 극작가, 배우, 연출가 출신 인사들, 흔히 말하는 그의 측근들과 위기에 지혜로이 대처하지 못했다고 비판받습니다. 그간 서방과 친하게 지내며 몇 번의 큰 사건 대응에 유연함을 보이고, 크림반도의 타타르인 등에 인근 헤르손주로 이주를 권하는 등 행보로 (빅토르 야누코비치 이후 페트로 포로셴코 정부의 온갖 부정부패에 절망한) 국내 지지를 얻었지만, 최근에는 러시아와 전쟁을 피하기 위한 노력이 부족했다는 의견도 다시 절반을 넘습니다. 가뜩이나 우크라이나계와 러시아계, 루마니아계, 몰도바계, 헝가리계, 불가리아계 등, 다양한 인종이 뒤섞인 국가에서 선거를 거듭할수록 러시아와 친한 인사에 몰표를 던지는 (주로) 동부와 그 반대 경향의 (주로) 서부가 극명하게 갈려서 평행선을 달리는데, 갈등은 봉합되지 않고, 양측은 서로 점점 더 달라지고, 멀어집니다. 전쟁은 두말할 필요 없이, 장기적인 관점에서 이를 가속합니다. 러시아계 우크라이나인 비율이 높고, 그에 따라 러시아어 사용 비중이 큰 돈강 서쪽, 예로부터 광공업이 크게 발달한 돈바스에서 자칭 도네츠크 인민공화국과 루간스크 인민공화국을 중심으로 우크라이나 동부에 위기가 발생한 지도 여러 해입니다. 러시아에 의해 설정된 인위적인 영토 분쟁과 주권 다툼에 줄곧 발목이 묶였습니다. 크림 위기 후 팔 년, 긴장감은 거의 꺾이지 않았습니다.

 

노르트 스트림 1, 노르트 스트림 2 경로를 나타낸 그림. [ⓒ macpixxel for GIS]

 

 며칠 새, 떨어지던 국제 유가가 반등했습니다. 러시아는 그간, 막대한 가스를 유럽으로 공급하며 '힘'을 키웠습니다. 21세기의 지정학적인 힘, '국력'은 "경제력을 얼마나 휘두를 수 있는지"가 아니라, "얼마나 고통을 버틸 수 있는지"가 결정합니다. 무역 상대, 석유와 가스를 제공하는 상대, 첨단 물품을 사 가는 상대가 하루아침에 무시 못 할 '적'이 됩니다. 1970년, 서독과 소비에트 연방 고위 관계자들이 만나서 공산주의 동쪽에서 자본주의 서쪽으로 가스 파이프라인(= 노르트 스트림 1)을 설치하기로 합의한 이래, 냉전의 세계 질서 가운데 이전까지 목재와 곡물 등 일부 품목, 인적 교류 정도로 극히 제한됐던 서유럽과 소비에트 연방 사이 경제적인 거래가 폭발적으로 증가했습니다. 빌리 브란트의 동방 정책(Ostpolitik), 에곤 바의 "친선을 통한 변화(Wandel durch Annäherung)"에서 90년대쯤, 대중에 더 친숙한 "거래를 통한 변화(Wandel durch Handel)"로 전이하면서. 노르트 스트림 1 협상을 주도한 서독 정치인들은 비용이 많이 들고 영구적인, 하루아침에 철거되기를 상상하기 어렵고, 특정 정치 지도자의 입맛에 맞게 개조할 수도 없는 이 파이프라인이 장기 계약으로 예측할 수 있고, 그에 따라, 각종 우여곡절에 대비할 수 있는 (서방과 러시아, 당시 소비에트 연방의) 관계를 연다고 생각했습니다. 리처드 닉슨(소비에트 연방이 거래에 응하고 브란트 총리, 바 등과 대화하는 진의가 서독을 NATO에서 떼어 내려는 속셈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지미 카터(소비에트 연방에서 반체제 인사 두 명이 투옥된 데 대하여 독일로 미국의 파이프라인 기술 수출을 거부했습니다), 로널드 레이건(1981년, 폴란드에서 계엄령이 선포되자, 파이프라인을 설치하는 데 필요한 자재 수출을 규제했고, 미국 기업의 사업 참여를 막았으며, 관계된 해외 기업들의 국내 활동도 금지했습니다) 행정부를 거치며 미국은 그가 못마땅한 눈치를 숨기지 않았지만, 경제적인 상호 의존성이야말로 총성 없이 유럽을 지켜줄 열쇠라고 서독은 믿었습니다. 그렇게 완공된 가스 파이프라인은 독일뿐 아니라, 사실상 대륙 내 모든 국가를 수혜국으로 만들었습니다. 부쿠레슈티에서, 그리고 지난 며칠, 블라디미르 푸틴에 대하여 목소리 높이기에 "소극적"인 독일과 일부 동맹국이 러시아에서 경제적인 이익에만 관심을 둔다고 비판받은/비판받는 배경입니다.

 

ⓒ Valentyn Ogirenko/ Reuters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에너지 자원을 확보하는 문제에서 그들에게 상당 부분 의존하는 유럽 열강의 취약함을 잘 알았기에, 민스크 협정을 깨면서까지, 결국, 우크라이나에 들어갔습니다. 2014년 9월(Minsk I)과 이듬해 2월(Minsk II), 크게 두 번에 걸쳐서 체결된 민스크 협정의 골자는 중재에 나선 유럽 안보 협력 기구(Organization for Security and Co-operation in Europe =OSCE) 감시 아래, 돈바스 전쟁(유어로마이단 이후, 돈바스에서 일어난 우크라이나 정부군과 분리주의 반정부군 사이 전쟁)의 즉각적인 휴전과 우크라이나 영토에서 불법적인 무장 집단, 무기, 용병 철수, 돈바스에서 자치권 인정, 지속적인 점검을 통한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국경 지대에서 안보 보장 등이었습니다. "돈바스에서 자치권 인정" 내용을 이행하지 않으려고 한 우크라이나도 떳떳하지 않기는 매한가지라는 지적에 일리가 있으나, 군사력을 동원하는 데 비할 바는 아닙니다. 소비에트 연방 붕괴 직후, 국가 재건을 맡은 다수의 관계자는 "거래를 통한 변화" 원칙에 공감했습니다. 외부로부터 깊고 빠른 관여, 참여가 중앙에서 계획하여 내리는 그 오래된, 망가진 체제를 깨뜨리고 새로운 정치적, 경제적 국가 원칙을 세우는 데 도움이 된다고 기대했습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푸틴도 그 좌익 경제학자들처럼 자국 경제 체계의 개조 필요성, "잘 먹고 잘사는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는 명제에 공감했으나, 한편으로 그는 이미 그때부터, 소비에트 제국의 향수에 빠져, "위대한 러시아 되찾기" 목표에 심취했습니다. 확실히 그는 새로운 윤리관 위에 소비에트 사회 세우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냉전 종식 이후, 과거보다 많은 국가가 국제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양극 체제가 대두했는데, 보편적인 가치가 약화하고, 패권국으로서 미국의 주도권(Hegemony)에 대한 도전은 거세졌습니다. 푸틴 대통령의 러시아는 미국과 서방 동맹이 지우는 "퇴폐적이고 간섭적인" 가치들에 대한 반대파의 선도자로서 입지를 공고히 하려 합니다. 역설적으로, 말리에서 군부 독재를 유지하는 데 예브게니 프리고진의 바그너 그룹(러시아의 민간 군사 집단; 용병 집단)이 개입하는 등, 러시아야말로 이웃국에 대한 진정한 위협이 되고 있지만. 그런고로 푸틴 대통령이 그 야욕을 전면에 드러낸 러시아군의 실시간 움직임이 아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수준은 아니라고 할 만합니다. 다만, 그 우려 또는 예상보다 훨씬 과감한 진군은 그가 "그렇게 크게 걸음을 옮기더라도" 우크라이나에서 전면전을 원하지 않는 미국과 NATO가 사실상 우크라이나를 포기함으로써 곳곳에서 불신을 사고 끝내는 붕괴, 무력화하며, 자기 야망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고 판단했다고 해석합니다. 지난해, 아프가니스탄에서 보인 미국의 무력함은 분명히 그를 더 독려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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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1997년부터 2001년까지 빌 클린턴 행정부의 국무장관으로 재직하며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시작을 지켜본 매들린 올브라이트는 2022년 2월 24일 자 <<뉴욕 타임스>>에 기고한 사설을 통해 우크라이나에 대한 러시아의 대대적인 침공이 "역사적인 실책"이 될 수 있다고 경고했습니다. 그가 전략가로서 기질을 발휘하며 끊임없이 강조해 온 "러시아의 위대함"을 되찾는 대신, 푸틴 대통령의 선택은 조 바이든 행정부가 러시아를 더욱 국제 사회에서 고립시키고, 경제적으로 마비시키며, 전략적으로 노출되도록 서방 동맹을 확대하고 강화하도록 만들기 때문입니다. 제재란, 근본적으로 한계가 없습니다. 오랫동안 미국은 러시아에 대한 국제 사회의 경제적인 제재를 이끌어 왔지만, "새는 고리"는 아름아름 존재했습니다. 이전보다 대담한 조처로 그 누출 개소를 막기 시작하면, 상대가 체감하는 수위가 높아지기 마련입니다.

 만만치 않은 우크라이나인들의 저항도 러시아를 당황하게 할 수 있습니다.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은 현대 우크라이나가 미국과 유럽 동맹국들의 정치적인 분열이 심화한 가운데, 제대로 된 보호를 받지 못하면, "허울 좋은" 민주주의를 수호하려 싸우는 대신, 자기 요구 앞에 고개를 숙이리라고 멋대로 가정했습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에서는 지난 2015년, IRI(International Republican Institute)의 설문 결과에 따라, 만일 그들이 단 하나의 국제 경제 연합체에만 가입할 수 있다면, 그는 유럽 연합이 되어야 한다는 데 국민 의견이 (비록 지역마다 그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모였고, 북대서양 조약 기구에 참여를 놓고는 오데사주(51% 반대), 하르키우주(45% 반대), 미콜라이우주(46% 반대) 등, 러시아와 친한 남부와 동부에서 대개 반대 여론이 거셌으나, 전체 22개 주 중 16개 주에서 찬성 목소리가 우세했습니다. 특히, 테르노필주(85%)와 르비우주(83%), 이바노프란키우스크주(77%)에서는 그 찬성 여론이 전체 사분의 삼을 넘어, 각 10%가 채 안 된 반대 여론을 압도했습니다. 갈등이 양극화했다면, 항상 반대쪽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어느 한쪽 편만 들어서는, 유리하게 독단 해석해서는 궁극적인 문제 해결에 다가설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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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그의 좁은 유대 관계에 모두 영향을 미칠 광범위한 제재는 이미 시작됐습니다. 유럽 내 미국의 절친한 우방이나, 지난 세기부터 러시아와도 특별한 관계를 쌓은 독일은 전쟁이 본격화하기도 전부터 다소 난처한 처지에 놓였습니다. 독일인들은 거래와 외교가 1989년에 베를린 장벽을 허물고, 이듬해, 자국을 다시 하나로 만들어 주었다고 믿습니다. 친선과 거래가 러시아와 유럽의 관계를 정상화하는 데도 도움이 되리라고 확신한 이유입니다. 노르트 스트림 1 사업이 시행된 후로 독일은 서유럽의 가스 허브(Hub)가 됐습니다. 지난해, 1,570억㎥ 수준의 러시아산 가스가 유럽 의회 국가로 흘러들었는데, 그중 오분의 이 남짓이 노르트 스트림 1를 통했으며, 이는 우크라이나 땅을 횡단하는 운송로를 넘어, 최대 규모에 해당했습니다. 러시아서부터 발트해 해저를 지나, 독일로 들어오는 연장 1,230㎞의 또 다른 파이프라인, 노르트 스트림 2 사업도 어느덧 십 년 가까이 진행됐습니다. 러시아산 가스는 90% 넘는 가스를 수입하는 독일에 두말할 필요 없는, 제일 중요한 공급처입니다. 동유럽 국가들과 미국(노르트 스트림 때문에 우크라이나 영토를 통해서 서유럽으로 수입되는 러시아산 가스 규모가 줄면서, 우크라이나가 챙기는 비용이 줄어든다는 우려를 내비쳤습니다)이 노르트 스트림 사업에 반대하는 태도를 고수했지만, 그를 유지하고 확장하기가 "에너지 안보"에 필요하다고 판단한 독일은 사업에 대한 제재를 풀고, 타협안을 찾으려고 동분서주해 왔습니다. 하지만, 돌아온 결과는 뜻밖이며, 만만찮게 당혹스럽습니다. 인제, 독일은 막대한 양의 가스를 사들이면서 푸틴 대통령의 전쟁 자금 곳간을 풍족히 해주었다는 비판에 직면합니다. 독일은 지난달, "과연 러시아를 말릴 의향이나 있는지" 미국으로부터 의심받았고, 러시아와 필요 이상으로 밀접한 관계에 발목 잡혀, 그들을 도우러 오기 주저하는 듯한 인상으로 동부 유럽에 혼란을 주었습니다. 러시아에 대한 모호한 태도가 대외적인 독이 됩니다. 게다가, 올라프 숄츠, 연방 총리와 그의 독일 사회민주당(Sozialdemokratische Partei Deutschlands =SPD)은 러시아로부터 상당한 정치 자금을 지원받는다는 의혹과 (심지어 알렉세이 나발니 독살 미수 사태 이후에도) 노르트 스트림 2 사업에 유독 적극성을 보여 온 행보 따위로 국내에서조차 질타받습니다. 단, 우크라이나에 대한 전면적인 침공은 그 전부를 뒤엎을 만큼 심각한 사안임이 분명합니다. 일단, 숄츠 총리는 "에너지 독립"을 선언, 푸틴 대통령의 계산에서 벗어나며, 난처한 정국을 정면 돌파하기로 했습니다. 미국의 압박에 버티다 못한 결정이라는 조소도 나오나, 노르트 스트림 2 승인 절차가 중단됐습니다. 중국이라는 거대한 가스 판매처를 확보했으며, 중국, 튀르키예, 이란, 북한 등, 전쟁 자금을 채워줄 국가는 여전히 존재하지만, "상호 의존성"에 따라, 노르트 스트림은 크렘린에도 매우 중요한 수입원이므로, 그 사업의 중단은 국제 금융통신망인 스위프트에서 차단과 함께, 러시아에 대한 서방의 핵심 제재, 상징적인 제재가 될 만합니다. NATO가 공식적인 파병을 일축했으나, 우크라이나인들이 자국을 지키겠다는 뜨거움으로 불탄다면, 그렇게 할 수 있도록 지원은 해야 합니다. 독일로서도 1945년 이후 처음으로, 군사적인 변곡점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책임에 대한 반성으로 군축에 소극적이기도 했고, 그나마 운영조차 어딘가 방만했다는 의혹이 있는데, 숄츠 내각이 이 진퇴양난의 길을 벗어날 공동의 강한 의지와 지도력을 증명해야 하는 시간이 찾아오는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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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각에서는 객관적인 전력 차와 "교과서적인 침공"에 키이우 함락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으리라고 보지만, 이오시프 스탈린 체제 옛 소비에트 연방 시절, 홀로도모르(Голодомор; 1932-33년에 추정 250만-350만 우크라이나인의 목숨을 앗아간 대기근)로 너무도 끔찍한 비극을 겪은 우크라이나인지라, 장기화할수록 점점 더 피비린내 나는 재앙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는 전쟁에 크렘린도 엄청난 물자와 인명을 걸어야 합니다. 현대의 전쟁은 중세의 전쟁과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대부분 국지적인 시장에서 거래가 이루어지던 과거와 달리, 복잡하게 얽힌 관계가 사업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오늘날에는 전쟁, 그리고 그에 따른 국제 사회로부터 따돌림, 경제 제재를 통해 그 관계를 한 번 잃으면, 전후, 경제적으로 재기하기까지 엄청난 비용(재화와 시간, 노력 등)이 듭니다. 농업 비중은 줄었고, 현대 산업 구조는 대부분 기반 시설을 요구합니다. 전쟁은 그를 파괴하므로, 정복이 더는 돈이 되지 않는 시대이기도 합니다. 이러나저러나 전쟁은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과 러시아에 어떠한 해법이 될 수도, 득이 될 수도 없습니다. 도리어, 그 몰락만 앞당길 뿐. 그 어떤 배경의 일로도 이와 같은 일방적인 침략 전쟁은 정당화할 수 없습니다. 한참 늦었다는 지적이 나오더라도 우크라이나를 둘러싼 상황을 다시 검토할 때, 선결 조건은 전쟁의 멈춤이어야 합니다.

 코로나 범유행 이후,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은 필시 세계적인 경제난을 초래합니다. 물가가 폭등하고, 전쟁이 장기화하면, 보호 무역 장벽이 높아지기 쉽습니다. 그야말로 승자 없는 시합의 시작입니다. 에너지 안보를 위한 유럽 연합의 채널 다각화는 가속합니다. 이미 회원국끼리 새로운 가스 연결망을 구축하고, 양지향성 흐름을 만들고, 법률 개정으로 시장의 자유도를 키우고 있습니다. 남부 유럽은 아나톨리아 횡단 가스 수송관(Trans-Anatolian Natural Gas Pipeline =TANAP)과 아드리아 횡단 수송관(Trans Adriatic Pipeline =TAP) 등으로 아제르바이잔과 닿았고, 미국에서 들어오는 막대한 양의 액화천연가스(Liquefied Natural Gas =LNG)도 러시아산 가스에 대한 대안으로서 선택지를 제공합니다. 2030년 이후 탈탄소화 기조 강화를 위한 야심 찬 계획도 있는 만큼, 전면 중지된 노르트 스트림 2 사업의 상업성이 실은 애초부터 의심받기도 했습니다. 앙겔라 메어클 내각에서 상대적으로 독일의 에너지 전환 속도가 늦었다는 시선이 우세하나, 독일의 가스 수입량도 코로나19 창궐 이후로 떨어졌습니다. 당장 에너지 가격이 치솟아, 유럽 열강에서 곡소리가 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매우 중요한 거래 상대를 잃어버린 러시아의 처지가 그보다 낫다고 단언할 수 없습니다. 당장 가스도 사 주고, 이달 초에는 공동 성명으로 지원 사격도 해주었지만, 마찬가지로 패권국의 야심을 품은 중국과 (필연적인) "정산 단계"에 이르면, 그 관계조차 빠르게 냉랭해질지니.

 유럽에서 전쟁 발발 가능성을 애써 일축하며, "위험하지만, 불분명하고, 심각하지만, 재앙적이지는 않습니다."라던 보름 전의 안이함을 뒤로하고, 지금은 모두가 '평화'를 되찾기 위해 책임을 다해야 합니다. 하룻밤 사이, 당연하다고 믿고 싶었던 그 가치가 대가 없이 주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더는 이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불안감이 빠르게 현실로 치환됩니다. 너도나도 부르짖는 "일상"의 단면을 더는 빼앗기지 않으려, 대화의 기회와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이른 이야기일 수도, 뒤늦은 공명일 수도 있습니다. 우크라이나 홀로는 힘들지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