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아이러니, 동베를린 축구의 지독한 개성

2020. 3. 31. 16:00Berlin

겨울의 베를린은 추위와 우중충한, 낮게 깔린 안개의 연속으로 악명이 높습니다. [ⓒ jgseins__jh]

 

 누구든지 겨울의 베를린에 처음 발을 들이면, "춥다."라고 느낍니다. 사실, 해가 높이, 아주 길게 뜨는 여름철 몇 달을 제외하고는, 도시 구석구석에서, 심심치 않게, 맹렬한 추위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 정도가 심히 강렬하여, 몇몇 학자는 마치, 도시를 둘러싼 격동의 역사가 떠오르게 한다고 할 만큼, '의미심장'합니다. 과장을 일부 보태자면, "실로 역사적이고도 정치적인 추위"라고 부를 만합니다. 마찬가지로 널리 소문이 난 영국의 부슬부슬 내리는 비나, 말 그대로 극한의 북극 폭풍과는 또 달라서, 베를린에서는 그 우중충한 날씨, 낮게 깔린 안개 속 바람을 피할 길이 없습니다.

 지금에야 클라우스 보베라이트(SPD), 전 시장의 유명한 말을 따라, "가난하지만, 매력적인 도시"라는 인상을 쌓고, 유럽 전역에서 창의적으로 사고할 줄 아는 예술가를 불러들이며, "젊은 도시"로 성장해 가지만, 불과 30년 전까지만 해도, 베를린은 온갖 사회적인 문제와 음모, 비밀스러운 공작을 다루는 창작물의 배경으로 안성맞춤인 땅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20세기 초반에는 알프레트 되블린의 <<베를린 알렉산더플라츠 (Berlin Alexanderplatz)>>라는 현대 문학 걸작이 탄생, 가상의 중심인물인 프란츠 비버코프의 삶을 빌려, 대도시에서 다양한 차원의, 격랑의 현대인을 그렸다면, 그로부터 삼십여 년 뒤에는 존 르카레의 <<죽은 자에게서 걸려 온 전화 (Call for the Dead)>>, <<고귀한 살인 (A Murder of Quality)>>,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 (The Spy Who Came in from the Cold)>>가 차례로 세상에 나와, 냉전 시기, 하나이지만, 사실은 둘로 나뉜 도시에서 동서 긴장 상황을 감정이 대개 묻어나지 않는, 비정한 언어로 풀어냈습니다.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 후반부, 주인공인 알렉 리머스는 결국, 연이은 사건 중 그가 수행해 온 공작의 실체가 실은 "더럽고", "비열"하다는 진실과 마주하는데, 작품 속에서 그가 지나온 도시의 그 어두운 역사는 강력한 고정관념과 정체 모를 선입견을 낳아, 이 거대한 배경의 다양한 표현과 문화, 색채를 집어삼켰습니다. 오늘, 베를린의 추위는 이곳을 찾는 많은 이에게 '과거의 냉수'로써 작용하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아직도 혹자는 베를린을 들어, "고정관념의 도시"라고 말합니다.

 

1990년의 독일 재통일 전까지 서독과 동독 대표팀이 맞붙은 유일한 한판, 1974 FIFA 월드컵 서독 당시, 조별 단계 최종전, 함부르크의 폴크스파크슈타디온에 입장하는 양 팀 선수단. 이날 경기는 위르겐 슈파바서(10번 선수)의 선제 결승 골을 잘 지킨 동독 대표팀의 승리로 끝났지만, 바로 다음 단계에 그들의 여정에 마침표가 찍혔다면, 대회를 주최한 서독의 대표팀은 대회 우승, 지금까지 남아있는, 두 번째 별을 가슴에 새길 수 있었습니다. [ⓒ IMAGO/ Magic (li.); IMAGO/ Frinke (re.)]

 

 <<베를린 알렉산더플라츠>>뿐 아니라,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의 주요 무대도 동쪽입니다. 이곳에서는 축구도, 그 배경이 되는 공간의 어두운 역사적 분위기에서 거의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동쪽, 오버리가에서 벌어진 온갖 불법적인 행각과 "공정하지 못한 경쟁을 장려하는" 축구 경기는 이내, 해가 지는 쪽의 관찰자들로부터 "이해하기 힘들다.", "사뭇 충격적이다."라는 반응을 끌어냈습니다.

 동독은 "노동자의 나라", "소작인의 나라"로 자국을 칭했지만, 여가와 문화의 정신은 다분히 부르주아적이라는 모순이 있었습니다. 1961년, 베를린 장벽 축조를 단행한, 그 악명 높은 중앙위원회 제1서기, 발터 울브리히트(1893-1973)는 인민들이 무산계급에 더 어울리는 축구를 즐기며 시간을 보내기보다, 교양 있는 문학 작품을 읽고, 고전 음악을 음미하기를 바랐습니다. 단,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될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고, 300만 동독 인구가 체제에 등을 돌려, 국경 넘기를 선택하며, 다시, 그중 80%가 베를린에서 일어나는 "베를린 문제"가 사회주의 세력을 강타한 시기, 울브리히트와 에리히 호네커, 에리히 밀케 등, 독일 사회주의통일당(Sozialistische Einheitspartei Deutschlands (SED)) 요인들이 그들 자신과 가족의 안전을 위해, 반트리츠에 지은 발트지드룽(Waldsiedlung)에서 "울타리를 두른 자유" 속에 살았음을 기억하면, 이러한 여가 문화에서 나타나는 모순 정도는 그곳에서 일어나는 만사 가운데 비교적 평범해 보였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영원히 배척하기에 축구라는 종목과 스포츠의 "활용 가치"는 너무도 컸습니다. 머지않아, 제법 큰 변화의 물결이 찾아옵니다. 때로 이탈리아의 학자들은 축구가 베니토 무솔리니와 "파시스모 클라시코(Fascismo classico)" 체제 유지에 얼마나 도움이 됐는지 이야기하곤 하지만, 축구라는 종목을 사회 질서와 정치적인 권력을 지키는 데 하나의 수단으로 삼는 효과에 대한 논쟁은 영원히 지속됩니다. 아돌프 히틀러조차 1936 베를린 올림픽에 축구와 같이 복잡 미묘하고 "아름다운" 종목에서 "아리아인의 일방적인 우월성"을 드러내기란 불가능에 가깝다는 진실에 부닥쳤고, 냉전 시기, 사회주의 진영을 이끈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 소련에서는 오히려, 자유를 갈망하는 이들의 집결지 구실을 한 FC 스파르타크 모스크바가 민중의 최고 인기 구단으로 떠올랐습니다. 1990년의 독일 재통일 이전까지 서독과 동독 대표팀이 맞붙은 유일한 한판으로 남은 1974 FIFA 월드컵 서독, 조별 단계 최종전에서 동독 대표팀의 그 유명한 승리 장면 직후, 서독 사람들도 동독의 축구란, 내부적으로 SED와 슈타지의 힘을 과시하기 위한 선전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그들의 눈에 동쪽에서 축구는 (비록 자신들을 꺾었으나) '무의미한 오락'처럼 보일 따름이었습니다.

 

마기타 구멜은 세계 기록을 보유했고,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기도 했지만, 그의 경력에서 성공을 금지약물인 투리나볼 없이 논할 수 없습니다. 그는 동독에서 SED가 스포츠에 가진 비틀린 가치관을 보이는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 IMAGO/ Pressfoto Baumann]

 

 흔히, 역사는 승자의 서술이라고 하나, SED 고위 관계자들이 스포츠의 잠재성에 주목한 그즈음, 동독에서 그를 어떻게 다루었는지를 살피면, 서독 사람들의 눈이 아주 틀리지는 않았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1956년부터 세 번의 연속된 대회에 올림픽 독일 연합 선수단 일원으로 운동선수들을 파견해 온 동독은 1968 멕시코 시티 올림픽에 처음으로 자국 대표 선수단이 참가한 이래, 스포츠가, 건국 때부터 그들을 괴롭혀 온 국가적 불안감을 떨칠 강력한 탈출구가 돼 주리라고 기대했습니다. 에리히 호네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기 있는 운동선수들은 다른 이들에게 선망의 대상입니다. 우리 새로운 세대는 스포츠 분야에 몸담습니다. 경쟁적인 스포츠와 대중 스포츠, 학교에서 체계적인 체육이 어우러져, 우리 사회주의 국가의 위신에 이바지했고, 그로부터 타국에 매우 인정받았습니다."

 

 그의 말에서 SED가 스포츠 경기에 가진 비틀린 사고관에 관한 단서를 엿볼 수 있습니다. 1961년부터 1988년까지, 최장기간, 체조 및 스포츠 연맹(Deutscher Turn- und Sportbund (DTSB))을 이끈 만프레트 에발트의 지휘로 동독은 '승리'와 그에 따라붙는다고 믿은 '대외적 인정'에 집착하기 시작했습니다. 에발트는 스포츠를 "완벽을 향한 끊임없는 추구를 정당화하는 계급 투쟁에서 이기기 위한 수단"으로 인식했습니다. 어린 선수의 교육 이수나, 가정 환경보다, 강도 높은 훈련 수행을 우선하는 결과로 이어졌고, 금지약물 주입, 도핑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동독은 (그 작은 영토에서) 독일 재통일 이전까지 203개의 금색 메달을 비롯해, 총 755번, 올림픽 종목에 입상하는 결과적인 '쾌거'를 이루었지만, 만연한 도핑 추문으로 인해, 그 전부를 '순수하게' 인정받기는 어렵습니다.

 1968년의 올림픽에 포환던지기 종목에서 여자 선수로는 최초로 "19미터의 벽"을 깨고 새로운 세계 기록을 세운 마기타 구멜이 동독의 "얼룩진 스포츠 성과"를 대표합니다. 구멜은 SED 덕에, "인민의 영웅" 중 하나로 추앙을 받았지만, 실은, 금메달을 목에 걸기 약 석 달 전부터 꾸준히 투리나볼(Turinabol =Chlorodehydromethyltestosterone =4-chloro-17β-hydroxy17α-methylandrosta-1,4-dien-3-one (IUPAC))을 투여했습니다. 단백동화 스테로이드 일종인 투리나볼은 심각한 부상이나 수술 이후 재활을 돕기 위해 개발됐으나, 빠른 근육 성장을 보장하는 금지약물로 분류됩니다. 구멜도 이 약의 힘을 빌려, 무려, 올림픽 경기에서, 두 달 전, 자기 연습 기록에서 2m를 향상했습니다.

 

1987년, BFC 디나모의 오버리가 우승을 치하하러 걸음을 한 에리히 밀케가 발데마르 크지엔치크, 크리스티안 바크스 등 선수단과 악수하는 장면. BFC 디나모는 이즈음, 역사상 최고 영광의 시대를 구가했지만, "슈타지 클럽"이라는 오명은 벗지 못했습니다. [ⓒ IMAGO/ Camera 4]

 

 SED의 승리, 기록에 관한 집착과 그 목적 달성을 위한 그릇된 가치관은 두말할 나위 없이, 축구 경기장에서도 드러났습니다. 스포츠에 관한 한, 저명한 언론인 겸 작가, 울리 헤세는 동독에서 축구를 "이상한 세계"로 그립니다.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까지, 동독 오버리가에서 BFC 디나모가 이루어 낸 뭇 성과는 역설적으로, 현실 사회주의가 웬만한 자본주의 체제 못지않은 압도적인 독점의 질서를 구축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동독에서 여느 체육 종목이 그러했듯, 표면적으로 그곳의 축구는 온 인민의 "평등과 연대"를 상징했지만, 그 안의 선수들은 "트랙 슈트를 입은 체제의 얼굴"로서, 그 영광을 드러내야 하는 의무를 졌습니다. SED 담당자들은 매주, BFC 디나모 선수단에 "올바른" 사상 교육을 제공했습니다. 국가안전부, 슈타지(Staatssicherheit (STASI))가 다른, 동독의 온 계층에 그랬듯, 선수들의 삶을 감시하고, 때로 거기 개입했고, 심지어는 서쪽으로 옮겨 간 선수 암살의 배후로 지목되기도 했습니다. 비록, 축구를 체제 유지를 위한 수단, 정치적인 홍보물로 삼으려던 SED, 슈타지의 시도, 노력이 아무런 효과도 내지 못했다고 단정 짓기는 어려울지 모르나, 그 자체가 대체로 완전할 수 없었음은 자명합니다. 재통일이 이루어진 직후, 동독에서 인기를 끌던 안드레아스 톰과 토마스 돌, 마티아스 자머 등이 너도나도 서독 클럽으로 옮겨버린 데는 복잡한 이유가 있습니다.

 이 이야기의 배경은 다시, 장벽 너머, 동쪽의 베를린입니다. 베를린은 동독에서 바로 이 모순적이면서도 혼란스러우며, 실로 이상한 세계의 아름다운 경기를 하나로 특정 짓는, 지극히 역설적이고도 어려운 사례의 "가장 주목할 만한 줄기"로 남아있습니다. 서로 다른 정신을 가진 두 개 큰 클럽이 그중에서도 핵심에 놓였으니, 슈타지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최고 영화로운 시기를 구가한 BFC 디나모와 체제에 저항하다가 그로 인해 박해를 받은 "강철대오", 1. FC 우니온 베를린입니다.

 

팔코 괴츠(li.)는 FC 포어베어츠 베를린 유소년팀에서 공을 차다가, 클럽이 다른 도시로 이전되자, BFC 디나모에 입단했고, 그곳에서 총 12년을 뛰었습니다. [ⓒ IMAGO/ Kruczynski]

 

 메이저리그의 "악의 제국" 뉴욕 양키스부터, 빌 벨리첵 감독과 탐 브레이디가 이끌어, 한 시대를 호령한 NFL의 뉴잉글랜드 패트리어츠, 1970년대, NHL 무대를 주름잡은 필라델피아 플라이어스 "왕조"에 이르기까지, 거대한 스포츠판에는 언제나 "공공의 적"이 도사려 왔습니다. 냉전 시기, 동독 오버리가에서는 BFC 디나모가 이 대열에 합류할 만했습니다. 이들은 '연속된 성공'을 얻었고, "동독 최고의 클럽"이라는 명성을 자랑했지만, 동시에, "오물로 가득한, 허황한 이름"을 쥐었음에 분명합니다.

 클럽은 "슈티지-돼지(Stasi-Schweine)"라고 불렸고, 바로 그 어마어마한 악명의 국가 정보기관 이름을 따, "FC 슈타지"라고 손가락질을 당했습니다. 괜히 따라붙은 수사가 아니었으니, 실제로 BFC 디마모가 누린 거의 모든 영예는 슈타지의 심판 매수와 "선수 빼 오기", 경기 조작 등 만행에 대한 의혹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에리히 밀케는 정치권력뿐 아니라, 스포츠에서 '성공의 역사'도 동베를린에 쌓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BFC 디나모의 열렬한 지지자이자, 명예 회장도 자처한 그는, 물론, '자기가 원하는 팀'이 그를 누리기도 바랐습니다. 육군 스포츠 클럽(ASK 포어베어츠 베를린) 소속으로 1958년과 1960년, 1962년, 1965년, 총 네 차례, 동독에서 축구 최고 무대를 제패한 FC 포어베어츠 베를린(1965년 이후에 ASK 포어베어츠 베를린에서 분리됐습니다)을 프랑크푸르트안데어오더로 보내버린 밀케는 전국 각지에서 실력 있는 선수를 긁어모아, 자기 전리품을 완성했습니다. 베를린에서 처음으로 축구화 끈을 묶어, FC 포어베어츠 베를린 유소년 클럽에 입단했다가, 조직이 이전된 뒤로, BFC 디나모에서 데뷔한 팔코 괴츠는 이 시기, 동독에서 계약서에 명시된 내용 따위는 하등 중요하지 않았다며, 밀케의 사람들이 졉근해 오면, 유망한 선수에게는 "FC 슈타지"를 위해 뛰거나, 경쟁적인 경력을 거기서 끝맺을 선택지밖에 주어지지 않았다고 증언합니다. 극단에는 밀케가 매우 좋아했으나, 기회를 노려, 서독으로 넘어간 루츠 아이겐도르프가 "의심스러운 교통사고"로 운명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서쪽에서 선수의 일거수일투족이 비밀 경찰에 감시받던 터입니다. 한편, 슈타지의 힘이 자신이나 가족에게 미칠까 하는 두려움에 떤 심판들도 BFC 디나모에 유리한, "이상한" 판정을 자주 내렸고, 괴츠 등, 일부 선수가 "부끄러운 승리"를 더하게 도왔습니다. 결국, 1979년부터 십 년 연속으로 오버리가 정상에 오른 기록은, 표면적으로는 어마어마하지만, 사실, 말 그대로 "거짓 같은 일"이었습니다.

 

매일 같이 분주한 베를린 교통의 요지, 알렉산더플라츠. 1980년대, BFC 디나모를 따르는 무리와 1. FC 우니온 베를린을 따르는 무리가 서로 만나기만 하면, 으르렁거리기 일쑤였고, 알렉산더플라츠와 프리드리히슈트라세 등지에서는 격렬한 물리적 충돌을 빚기도 했습니다. 강철대오 단원들의 "서구 훌리건 주의"에 맞선 BFC 디나모의 "하드코어" 집단은 "스킨헤드 스타일"을 채택했고, 그로부터 "네오나치"라는 악명을 얻었습니다. [ⓒ jgseins__jh]

 

 에리히 밀케의 "수도 지배 시기", BFC 디나모의 가장 강력한 경쟁자는 (1981년에 세 명의 소속 선수가 "공화국 이탈 혐의"로 11개월형을 선고받는 등, 어려움도 겪었지만) 한스 모드로, 만프레트 셸러, 빌리 뉘페네게어 등, 세 명의 지역 정치인과 슈타지의 호어스트 뵘 등에게 지원받아 명맥을 유지한 SG 디나모 드레스덴이었습니다. 그 클럽에서 활동했던 선수들은 당시, BFC 디나모가 "공공의 적"이 됐다고 말합니다. 정치적인 성향과는 관계없이, 단지 BFC 디나모라는 클럽을 사랑한 평범한 이들이 사방에서 날아드는 공격을 버텨내기란, 몹시 어려웠습니다. 그들이 하나둘, 클럽을 떠나면서, "FC 슈타지"는 또 다른 집단의 행동으로 대표되기 시작합니다.

 1980년대 중반, 동베를린의 일부 과격한 축구 광신도들이 "스킨헤드 스타일"을 채택했습니다. 삭발한 머리에, 강렬한 인상의 겉옷을 걸치고 등장해, 호전적인 성격을 보인 이들은 BFC 디나모에 "네오나치"의 이름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통일 이후에 공개된 이들의 고백에 따르면, 이때 BFC 다나모를 따른 대다수는 사실, 정치에 관하여 거의 알지 못했다고 하지만, 수년간, 축구와 훌리건 주의, 우익 극단주의 구조의 역학 관계를 다루어 온 작가, 로버트 클라우스는 일찍이 이 무리의 권력은 "네오나치"로 불린 극우주의자들에게 있었다고 말합니다. "할아버지께서는 무장친위대에, 아버지께서는 슈타지에, 그리고 나는 BFC 디나모에 속했다네!" 무시무시한 구호를 외치던 이들은 알렉산더플라츠 등지에서 경쟁 클럽 팬들과 물리적인 충돌을 빚기도 했는데, 대개, "도발을 위한 도발"이었습니다.

 SED와 슈타지는 동베를린에서 이러한 소동을 잘 알았지만, 그들에 대하여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할지 몰랐고, 그래서 방관했습니다. 매번, 모든 혐의를 부인하기에 급급했습니다. 파시즘에 반하는 사회주의 국가에서 그러한 극우 하위 문화가 탄생했다는 사실을 외면하고 싶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덕분에 문제는 점점 더 크고 복잡해졌습니다. BFC 디나모 지지자는 베를린에서 '강성 극우세력'의 대명사로 쓰이기 시작했습니다. 재통일 이후, 도시 대표 클럽의 위상은 거의 모든 영역에서 1. FC 우니온 베를린으로 넘어갔고, 에리히 밀케의 욕심과 같이 망가진 곳을 떠나, 강철대오에 흡수되는 이들도 생겼습니다.

 

지난해, 2. 분데스리가 3위를 차지한 뒤, VfB 슈투트가르트와 승강 플레이오프에 승리한 1. FC 우니온 베를린은 감격스러운, 클럽 역사상 첫 '분데스리가에서 시즌'을 나는 중입니다. [ⓒ jgseins__jh]

 

 BFC 디나모와 정반대 극단에 있었던 1. FC 우니온 베를린은 오버리가 내, 노동자 독립성과 현실도피를 추구하는 민간 반대 세력의 보루이자, 전형으로 자리를 지켰습니다. 1980년대, 강철대오는 동베를린에서 권력의 불의에 정면으로 대항하는 대중 문화 시위의 새로운 대명사로 떠올랐고, 슈타디온 안 데어 알텐 푀어스테라이는 체제에 불복하는 이들에게 피난처를 제공했습니다. 슈타지의 끊임없는 감시와 외압에도 불구하고, 그 단원들은 끄떡없었으며, 당장 대회에서 최고의 성적을 기대하기는 어려웠어도, 보다 넓은 관점에서, 그들은 이 싸움의 최종 승자가 됐습니다. 비밀정보원들이 클럽의 어두운 면을 들추려고 팬 사회 중심으로 침투해 와도, 클럽은 동베를린 사람들로부터 굳건한 지지와 사랑을 받았고, "FC 슈타지"와 견주어도 뒤떨어지지 않을 만큼 많은 수가 이들 응원석을 가득 메웠습니다. 오히려, 이만 명 가까운 관중을 불러들이고, 원정 경기가 있을 때마다 이삼천의 인파를 동원한 쪽은 1. FC 우니온 베를린입니다. 지금도 강철대오는 분데스리가 최고 수준의 충성심을 자랑하는데, 이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착시의 역사"가 아닙니다. 이들이 동베를린에서 "동원력"만은 부동의 1위였고, BFC 디나모의 강성 집단은 강한 응집력과 물리적 도발로써 그 머릿수 열세를 극복할 방법을 찾았습니다.

 1. FC 우니온 베를린이 서서히 실제적인 BFC 디나모의 대항마로 부상하던 시기, 두 클럽의 대결 구도가 극에 달하자, 그만큼 양쪽 팬 집단의 충돌도 잦아졌습니다. 급진적인 성향의 강철대오 단원들이 서구 훌리건 주의에 비로소 눈을 뜬 1980년대, 이들의 힘은 동독의 정치 지도자들 눈에 "몹시 우려스러운 수준에 도달한 듯" 보일 정도로 강했습니다. 초기 훌리건 주의 태동이 그러하듯, 동베를린 축구 클럽의 강성 지지자들이 모방한 "동독판 훌리건 주의"는 일은 덜 키우면서, 국가 압제에 최대한 강경하게 맞서 싸우기 위한 몸부림의 형태로 나타났습니다. 이는 당시, 불만을 품은 수많은 베를린 시민이 "다시는 낮의 빛을 보지 못할 위험 없이" 반국가적인 정서를 표현할 가장 단순하면서도 완벽한 방법이었습니다.

 

시간을 달려, 지난 2018년, 다시 서로를 마주한 1. FC 우니온 베를린과 BFC 디나모의 경기 사진. 한때, 동베를린을 넘어, 동독에서 제일 거칠고 뜨거웠던 두 팀의 서로를 향한 경쟁 의식을 기억하는 이들은 이 둘의 시합을 "오스트-클라시커(Ost-Klassiker)"라고 부르며, "다른 시간선"의 열기를 회고합니다. [ⓒ Sebastian Kahnert]

 

 다만, 세상사 모두가 그렇듯, 이 시기, 동베를린에서 성행한 축구 문화를 따라가다 보면, 선과 악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지점이 존재합니다. 비슷한 시기에 영국 런던이나 글래스고의 거리를 괴롭히던 폭력과 비참한 형태의 행동들만큼이나 이곳에서 일어난 찬란한 혁명의 열기는, 여러 면에서, 추악한 얼굴을 하기도 했습니다. "슈타지 퇴출"을 외친 강철대오 단원들의 다음 행동은 BFC 디나모에 대한 인종적인 비난을 쏟아내기였습니다. 터키인들과 유대인들을 경쟁 클럽의 "악의 축"으로 몰아세운 이들은 그들을 노골적으로, 원색적으로, 힐난했습니다. 잘못된 상대 행동에 대한 정당한 비판은 점점 사라지고, 종장에는 공격적인 말의 감정과 상처만 남았습니다. "FC 슈타지"를 둘러싼 무리는 모두가 자신들을 헐뜯으려고 하지만, 사실, 자신들은 그러한 상황을 즐긴다며, 기꺼이, 극단으로 향하는 가속 페달을 밟았습니다.

 물론, 최근 들어, 옛 동독 지역들을 기반으로 다시금 세력을 확장해 나가는 네오나치즘의 뿌리를 온전히 "오스트 클라시커"에서 찾겠다고 말하기는 논리의 비약이 심하지만, 본질적으로, 이즈음, 두 클럽의 강성 지지층을 중심으로 동베를린에서 성행한 "동독판 훌리건 주의" 정신은 오늘날, 독일을 위한 대안(Alternative für Deutschland (AfD))이 간직한 그와 분명, 비슷한 인상을 줍니다. 강철대오 단원들의 해석으로 재탄생한 그들의 훌리건 주의는 부당한 권력 소유에 대한 정치적 반대에서 출발했지만, 금세, 편협한 시각으로 변질될 위험성도 그 초장에 내포하고 있었습니다. 클럽 역사의 "낭만적인 고정관념"이 그 "추한 얼굴"까지 완전히 덮어버리지는 않도록 경계할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이들의 주된 부르짖음은 결국, 통일을 향한 바람이었고, 자유를 향한 갈망이었습니다. 역시나 승자에 의해 기술된 역사책에서, 이들에게 또 한 번, 악당의 가면이 씌워졌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 그림자의 역사조차 분명히 짚어야 하는 이유는, 기울어질 대로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BFC 디나모가 쓸어 담은 영광을 정당화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교묘하고도 명확하게 정의된 듯한 선악의 기준선을 흐리고,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직관, 기억하기 위함입니다.

 

"광기". [ⓒ jgseins__jh]

 

 동베를린 축구 문화의 독특한 개성은 지금도 간과할 수 없습니다. 1974년, 서독인들의 눈동자에 비친 그들의 모습이 어떠했는지와는 별개로, 동독에서는 프란츠 베켄바우어와 게르트 뮐러, 제프 마이어, 파울 브라이트너, 귄터 네처 등, 서독 "축구 영웅들"에 열광하고, "(동서 구분 없는) 독일의 우승"에 즐거워했으며, FC 바이에른 뮌헨과 헤르타 BSC 등, 서독 클럽들도 적잖은 인기를 구가했지만, 물리적인 벽이 서 있던 시기, 동쪽에서 스포츠와 정치 문화에 관한 가장 매혹적인 통찰력은 결국, 동독만의 이야기를 가진, 옛 동독 지역 클럽들에서 나옵니다. 누군가는 그를 보고, "이상한 세계"로 증언했지만, 옛 동독 지역 사람들의 기억 속에 축구는 "언제나 똑같이 이상한 나라의 정신"에서 "그나마 매혹적인 측면"으로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21세기, BFC 디나모는 지난날의 영광을 자랑할 권리를 박탈당한 채, 벌써 몇 년째 레기오날리가 노르도스트에서 고전합니다. 체제에 대한 도발과 저항으로 시작된 운동이 격화하고, 베를린 장벽마저 무너진 뒤에는 클럽을 시내 극우 세력, 네오나치와 훌리건, 그리고 지저분한 범죄 조직이 모이는 장소로 만들었습니다. 그들이 피라미드의 하층, 음지에 숨어서 세력을 키울, 기생할 매개로 이보다 좋은 이야기가 없기 때문입니다. 재통일 이후, 갈수록 심각해지는 각종 폭력 사건이 이 "회색 지대"에 검은 물감을 덧칠했습니다. 오늘, 클럽은 온갖 추잡한 의혹으로 가득했던 과거를 부정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양극화한 우리 사회의 어두운 단면이 우익 극단주의 세력으로 그려지듯, 그가 클럽의 일부도 채우고 있지만, BFC 디나모가 그들만의 조직은 아니라는 점, 한때 "무인지대"였던 이곳에도 해가 들 창이 있다는 점을 알아달라고 호소합니다.

 베를린의 클럽들은 실제로, 이 도시를 배경으로 하는 다양한 문학적 창작물만큼이나, 그들의 어두운 과거에 대한 드러난 진실, 그로부터 파생되는 다양한 이야깃거리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춥고, 용서받지 못했으며, 불편하고, 매혹적이며, 최근에는 "힙"합니다. 아름답고, 때로는 추하며, 때로는 흐릿하고, 또 때로는 그 무엇보다 명확합니다. 그가 곧 축구이며, 역사이고, 베를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