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의 축구 - 벽을 넘어서

2020. 11. 14. 08:00Bundesliga

ⓒ jgseins__jh

 

 '카바레의 도시'이자 '힙스터의 도시'인 베를린에서는 어디를 가나, 도시의 '새로운 얼굴'을 만날 수 있습니다. 지하철역의 이름 푯말조차도 그 꾸밈새가 모두 달라, 각자의 개성을 강하게 드러내고 있으며, 각각의 장소에서 풍겨오는 음식의 냄새나 들려오는 음악의 선율, 관광객을 맞는 건축물의 양식까지도 제각각입니다. 아돌프 히틀러 치하의 나치 독일을 겪었고, 역사적으로도 이웃한 국가들, 특히 프랑스와 크고 작은 전쟁, 그 한복판에 자주 위치했으며, 냉전의 아픔을 경험한 뒤 정립된 그 짙은 '역사의 고정관념' 속, 이제는 끊임없이 변화를 향해 나아가는 젊은 도시입니다. 다양한 언어, 다양한 피부색, 다양한 생활 양식이 뒤섞여 공존하는 베를린은 독일에서 가장 큰 도시이자 수도이지만, 재정적으로도 산업적으로도 그리고 심지어는 축구에 있어도, '강자'와는 거리가 멉니다. 꽤 오랫동안, 이 도시를 대표해 온 표현이 클라우스 보베라이트 전 시장(SPD)의 "가난하지만, 매력적인 도시"일 정도입니다. 그런 베를린에 뿌리를 내린 채 살아가는 사람, 일명 "베를리너"에게 축구란, 음악을 제외한다면, 자기가 속한 공동체를 여러 방식으로 대변할 수 있는 제일 쉬운/대중적인 방식으로 자리하고 있습니다. 1965-66 시즌, 독일 프로축구 최상위 대회 역대 최악의 팀으로 기록(시즌 내내 15골을 넣는 동안 108번 실점을 하며 이 승 사 무 28패를 기록)된 노이쾰른의 타즈마니아 베를린부터 1880년대에 창단하여, 세 차례, 독일 축구 가장 높은 자리에 오른 남서쪽의 빅토리아 베를린, 전통적으로 베를린 북동쪽에서 강세를 보여 왔으며, 독일이 서와 동으로 양분돼 있던 시기, "슈타지 클럽"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기도 했으나, 여전히, 도시 축구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는 '중요한 클럽' BFC 디나모, 처음으로 올림피아슈타디온 베를린의 80,000명 관중 앞에서 분데스리가 경기를 치른 블라우바이스 90 베를린, 처음 "빅 시티 클럽"을 주창하고 나섰다가, 재정적으로 붕괴해 버린 '그 유명한' 테니스 보루시아 베를린 등, 독일연방공화국의 수도에는 대단히 많은 축구팀이 등록돼 있으며, 그중 어느 팀을 지지하는지가 그가 어디에 살고, 누구와 친하며, 심지어는 어떤 사람인가를 드러내 보이는 하나의 근거로, 이곳에서는 기능합니다. 축구를 사랑하는 베를린 사람들의 외침은 하나입니다.

 

 "타이틀을 원한다면, 뮌헨이나 도르트문트로 가라. 그러나, 진짜 축구의 문화를 즐기겠다면? 이곳으로 오라! 우리는 우리의 심장을 가졌고, 우리의 정신을 가졌으며, 우리의 클럽을 가졌고, 우리의 도시를 가졌다. 그러므로 타이틀에 관한 이야기 따위는 집어치워라!"

 

포츠다머 플라츠를 찾은 어느 날, 그날따라 유난히 더 눈에 띄었던 '통일정'. 분단, 냉전의 아픔과 통일, '하나 된 베를린'의 기쁨을 역사의 시간차를 둔 채 모두 맛보았던 이곳에 지금까지 통일을 이루지 못한 대한민국 전통 양식의 정자가 세워진 일은 특기할 만한 사건입니다. [ⓒ jgseins__jh]

 

 도시를 둘로 갈라 버렸던 냉전의 아픔은 아직 다 가시지 않았으며, 그때의 아픔을 기억하는 사람이 하나라도 남아 있는 한, 하루가 멀다고 긴장 속에 살아야 했던 그 끔찍한 잔상은 이 땅에서 사라지지 않습니다. 인종적으로도 다르지 않았고, 종교가 다르지도 않았던 사람들이 순전히 '정치적인 이념의 이유만으로' 벽을 사이에 두고 떨어져 살아야 했던 30년. 1961년, 동베를린의 지속적인 '고급 인력 유출'을 막는다는 명목으로 벽이 들어선 이래, 서쪽의 사람들과 동쪽의 사람들은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되었고, 실체를 가진 벽이 무너져 내린 지금도, 그 벽은 버티고 서 있습니다. "Mauer im Kopf." 사람들의 머릿속에. 바깥에서 보기에 이 도시의 사람들은 꽤 독특한 삶을 사는 듯 보일 수 있는데, 웬만해서는 자기 생활권을 벗어나, 도시 내 다른 편으로 "여행하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서쪽에서 태어나, 동쪽의 쾨페니크나 마찬 등지에 평생토록 가 보지 않는 사람도 있고, 물론, 그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첼렌도르프에서 태어나고 빌머스도르프에서 자라, 크로이츠베르크를 사실상 활동 범위의 동쪽 끝자락 정도로 인식하는 개인적인 경험을 듭니다. 인위적으로 서로 분리되어 살아온 이곳 사람들은 여전히 그 "머릿속의 벽" 때문에 '다른 사람, 다른 장소, 다른 무언가'에 대한 알지 못할 경계심이나 편견에 사로잡힌 경우가 더러 있습니다. 그러나, 과거의 아픔을 모두 헤아리지 못하되, 더 개방적이라고 자부하는 젊은 세대, '새로운' 세대의 등장으로 도시는 조금씩 활기를 되찾고 있으며, 과거의 아픔이라는 옛 기억 또한 어떤 영역에서는 조금씩 흐릿해지는 느낌이 있습니다. 최근에는 축구판에서도 비슷한 변화가 감지되는데, 분데스리가에서 겨루는 '가장 큰 클럽 둘' 때문입니다. 베스트엔트의 '베를린,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국가의 심장에서도 제일 큰 클럽' 헤르타 BSC와 쾨페니크의 '클럽 그 이상의 클럽, 그러나 온 도시를 대표하기가 꼭 목표는 아니라고 말하는' 1. FC 우니온 베를린이 바로 그 두 주인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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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랜 변화와 역경을 '함께' 견뎌온 두 클럽의 팬들 사이에는 어딘가 정체를 알기 힘든 우정이 싹터 있습니다. 헤르타 BSC를 사랑하는 축구광 집단과 1. FC 우니온 베를린을 끌어가는 축구광 집단은 '벽'이 들어서 있는 동안, 그 벽 너머의 "친구"에게 경기장 입장료 명목으로 25유로가량 작은 돈을 지원하는 등 방법으로 나름 끈끈한 유대 관계를 유지해 왔습니다. 사실, 두 클럽의 사뭇 대비되는 경기장 모습이 두 클럽의 상반된 정신, 정체성을 관통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헤르타 BSC가 시에 경기당 30만 유로, 매년, 500만 유로에 가까운 (만만치 않은) 임대료를 내고 사용하는 올림피아슈타디온 베를린은 나치 시대, 베르너 마히와 알베르트 슈페어의 설계작답게, 호화스럽고 거대한 '브루탈리스트' 경기장으로, 이곳을 찾는 이들이 마치 로마, 이탈리아로 이동해, 콜로세움에 들어서는 듯한 느낌을 받도록 합니다. 처음으로 경기장에 발을 디디는 순간, 그 규모와 분위기에 압도당하기 마련입니다. 이곳에서 경기가 있는 날이면, S-Bahn을 타고 바로 앞까지 이를 수 있어, 베를린 각지에서 관중이 모입니다. 알렉산더플라츠를 거치면, 시 동편에서라도 접근할 수 있습니다. 그에 반해, 1. FC 우니온 베를린의 슈타디온 안 데어 알텐 푀어스테라이는 작고 귀여운 '브리티시스타일' 경기장입니다. 그 이름에서도 유추할 수 있듯, 숲 한가운데 위치해, 역에서부터 그 안으로 제법 걸어 들어가야 하며, 경기장에 들어서면, 삼면이 입석으로 돼 있고, 올림피아슈타디온 베를린과 같은 "역사적인 육상 트랙" 따위가 없어, 팬들은 잔디와 매우 가까운 곳에서(종합경기장인 올림피아슈타디온 베를린에서는 그 육상 트랙이 관중석과 잔디의 거리를 꽤 멀게 하여, 불편함이 있습니다) 경기를 즐깁니다. 경기장을 재건축하던 때, 클럽은 돈이 없었고, 이에 팬들이 그들의 14만 시간을 '대가 없이' 들여, 직접 콘크리트를 바르고, 벽돌을 날랐습니다. "우리 손으로 올린 경기장"이라는 주인 의식이 유독 강한 이유일 터입니다. 이러한 큰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 아픈 '분단의 시기'에 두 공동체 구성원이 쌓은 우정은 더욱 특별하다고 할 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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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에야 양 클럽이 실로 어마어마한 열기의 '베를린 더비'를 펼치는 두 주체로 자리를 잡았지만, 전통적으로 강철대오의 가장 강력한 경쟁 상대는 BFC 디나모였고, 헤르타 BSC는 테니스 보루시아 베를린과 타즈마니아 베를린, 그리고 심지어는 FC 샬케 04(이유는 아무도 모르지만, 헤르타 BSC를 사랑하는 모두가 FC 샬케 04를 싫어한다고 이야기합니다)를 더 의식해 왔습니다. 두 팀이 처음으로 같은 위상의 대회에서 맞대결을 펼치기는 지난 2010-11 시즌의 일인데, 그때는 두 클럽 모두, 2. 분데스리가에 속해 있었습니다. 이때만 해도 '그 누구도' 두 클럽의 만남을 축하해야 할지, 아니면, 각자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전부를 걸고 싸워야 할지 알지 못했습니다. 두 클럽의 경쟁의식은 사실, 실체가 없는 '껍데기'에 불과했기 때문입니다. 서로 힘들 때 손을 뻗는 친구에 오히려 가까웠지, 이를 갈며 쳐다보는 상대가 아니었습니다. 1. FC 우니온 베를린이 후반기, 올림피아슈타디온 베를린에서 펼쳐진 경기에서 2 대 1로 승리를 가져가며, 그 시즌, '일 승 일 무'의 상대 전적 우위를 점했는데, 경기장에서 '그날', 강철대오의 인기 있는 선수, 토어스텐 마투슈카의 '중요한 골'이 들어가자, 원정 응원석에서 홍염이 터져 나왔습니다. 일종의 선전포고나 다름없습니다. 그때부터 헤르타 BSC와 1. FC 우니온 베를린의 본격적인 경쟁 구도가 잡혔습니다. 두 공동체 구성원은 도시 축구판을 싸고도는 공기의 흐름이 심상치 않음을 처음 피부로 느꼈습니다. 두 팀이 다시 2. 분데스리가에서 마주친 지난 2012-13 시즌, 이번에는 헤르타 BSC가 슈타디온 안 데어 알텐 푀어스테라이에서 2 대 1 승리를 통해, 똑같은 '일 승 일 무'의 우위를 챙겼는데, 한 1. FC 우니온 베를린 선수가 "'서쪽 놈들(Wessi)'이 우리 경기장에서 승리를 축하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자꾸만 구역질이 납니다."라고 말해, 두 팀의 경쟁의식은 더욱 뜨거워지고 말았습니다. 그가 이어져, 또 쌓이고 쌓여, 지난 시즌, 두 클럽이 '분데스리가에서 역사상 첫 번째 베를린 더비'를 펼치게 되었을 때, 한꺼번에 폭발하여, '아수라장', '누란지세의 밤'을 만들었습니다. 2019년 11월의 첫 번째 토요일, 슈타디온 안 데어 알텐 푀어스테라이 곳곳에서 터진 홍염이 도시의 밤을 붉게 물들였습니다. 경기 종료를 알리는 호각 소리가 울린 뒤에는 양쪽 관중 사이에 물리적인 정면충돌도 빚어질 뻔했습니다. 강철대오의 홈 관중 스무 명가량이 가면을 쓰고 잔디를 가로질러, 원정 응원석으로 내달리는 바람에, 라파우 기키에비츠(현 FC 아우크스부르크 소속 골키퍼)를 비롯한 몇몇 선수가 무단으로 넘어온 이들을 저지하지 못했다면, 자칫 더 큰 사고나 싸움이 일 수 있었습니다.

 

올림피아슈타디온 베를린, 오스트커브(헤르타 BSC 안방 응원석). 베를린 사람들은 공동체의 친구들, '가족'과 만나고, 웃고 떠들며 즐기기 위해, 주말마다 이곳을 찾습니다. [ⓒ jgseins__jh]

 

 베를린 사람들이 주말마다 경기장을 찾는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그곳에 친구들이 있고, '가족'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짧은 역사, 근방의 역사만 보고 자란 어린 세대는 당장에 침 뱉을 수 있는 적, 혐오의 대상을 만드는 데 혈안이 되어 '건강한 경쟁의식'이 되기를 바랐던 '실체 없는 경쟁의식'을 '더 뜨거운 무언가'로 만들려 하고 있습니다. 지난 시즌, 분데스리가에서 헤르타 BSC와 1. FC 우니온 베를린의 전반기 경기만 봐도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 주에 베를린 주요 신문 일 면에는 편을 가르는 내용이나 분열을 조장하는 메시지가 일절 실리지 않았습니다. 요는 "어쨌든 이번 주말, 베를린이 이깁니다."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경기가 끝나고, 1. FC 우니온 베를린의 디어크 칭글러 회장은 관중들의 범죄와 사회적 행동이 경기의 지속을 위협했으며, 그는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성격을 띠었다고 공식 성명서를 냈고, 선수 시절, 헤르타 BSC에서 뛰며 많이 사랑받았던 악셀 크루제도 "부끄럽고 또 부끄러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도시는 이제 그 오랜 아픔과 고정관념, 상처를 딛고 일어설 때가 됐습니다. 분열과 혐오, 화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날, 안방 응원석에서 잔디 위로 홍염이 날아들자, 순간, 경기장에는 침묵이 흘렀습니다. 모두가 뒤를 돌아보았고, 일이 시작된 방향을 찾아 욕설을 퍼부었습니다. "우리의 축구를 망치지 말라!"라고. 경기장에서는 죽도록 싸우고 자존심을 챙겨야 한다지만, 실은 헤르타 BSC와 1. FC 우니온 베를린의 경기는 정치적인 대결도 아니고, '서베를린과 동베를린의 맞부딪힘'도 아닙니다. 형제간의 '기분 좋은 경쟁 관계'에서 끝나야만 합니다. 경기 종료를 알리는 호각 소리가 울리고 나면, 우리는 서베를린도 동베를린도 아닌, 그 오랜 세월 꿈꿔왔던 '베를린'에 발을 딛고 서 있습니다. 새로운 무언가를 창조하고 물결을 바꾸어 나가려는 열정은 존중받아 마땅하나, 베를린의 축구, 그 뒤에 자리한 '축구의 문화'를 계승하는 일도 그 못지않게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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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테(동)와 크로이츠베르크(서)의 옛 동서 베를린 경계, 치머슈트라세와 코흐슈트라세 사이, 프리드리히슈트라세에는 연합군과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맹(소련) 군대의 검문소(1961-1990)였으며, 오늘날에는 많은 관광객의 발길이 닿는 명소가 된 체크포인트 찰리가 서 있습니다. 벽이 무너지고 '하나의 베를린'을 되찾은 오늘, 우리는 무심한 듯 이곳의 안내/경고 표지판 밑을 지나치곤 하지만, 머릿속에 남은 냉전의 오랜 껍데기, 잔해는 아직도 이 도시를 서로 다른 '편'으로 가르는 데 더 관심이 있나 봅니다. 길었던 분단의 시기는 알게 모르게 베를린 사람들에게 고약한 고정관념과 선입견을 심어 주었고, 그는 이 도시의 여러 공동체를 '틈만 보이면' 분열하게 하는 원흉입니다. 알고 보면, 서로 이해가 조금씩 부족해서 생겨난 충돌이 다수입니다. "Mauer im Kopf"는 곳곳에서 도시를 괴롭히고 있습니다. 주로 젊은 세대의 '나와 다른 이'에 대한 혐오와 '절대 악 만들기'가 가뜩이나 위태로운 줄타기를 이어온 이 도시를 더 깊이 상처 입힙니다. 인제 그만, 우리는 또 한 번 '벽'을 넘거나, 무너뜨릴 수 있어야 합니다. 눈앞의 어려움을 하나의 힘으로 극복해야 합니다. 내달 5일, 다시 '베를린'과 '베를린'이 독일 프로축구 최상위 무대에서 맞부딪힙니다. 그날은 지난 세기의 냉전부터 코로나19 범유행에 따른 무관중 경기까지, 오랜 '격리'의 역사를 살아온 이 도시 모두에게 '축제의 날'이 되어야 마땅합니다. 관중석을 비워두고 경기하는 데 대한 반발심/거부감 때문에 반년 전의 기회는 다소 조용히 차감되고 말았습니다. 12월이 되어서도 베를린의 축구광들이 올림피아슈타디온 베를린을 가득 메우지는 못할 테지만, 이번에는 "나와 똑같은 시기를 지나는, 똑같은 처지의 옆 사람"과 단결해, 상생의 길을 찾기를 바랍니다. 타자에 대한 혐오나 '절대 악 만들기' 따위는 이 도시의 오랜 '축구 문화'를 이해하지 못한 채 춤을 추는 껍데기에 불과합니다. 대롱대롱 매달려도, 껍데기란, 언젠가 벗겨지기 마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