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 베른슈타인의 유산을 추억하며

2024. 1. 17. 08:00#HaHoHe

Ruhe in Frieden, Kay Bernstein ●○

In Gedenken an ihn…

 

ⓒ City-Press

 

 게재한 글의 숫자조차 헤아리기 힘든, 활동을 시작한 지 오래인 베를린의 기자들이 이보다 무겁고 비통한 마음으로 펜을 잡은 적이 거의 없다고 고백합니다. 실로 비극적인 일이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지난 2022년 6월부터 헤르타 BSC 상임위원회 회장직을 지내 온 카이 베른슈타인이 간밤에 향년 43세로 타계(1980-2024)했습니다. 베스트엔트 클럽을 둘러싼 온 관계자는 물론, 독일 축구계 전체가 슬픔에 빠져, 애도를 표합니다. 베른슈타인은 행동가이자, 탐구가였습니다. 클럽을 경영하며, 어려운 일이 닥치면, "객관적인 시선"의 외부에 질의하고, 귀를 기울이기를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늘 평회원들과 가까이, 접근하기 쉬운 곳에 머물고자 했고, 청중 앞에서 우렁찬 목소리로 유창하고 당당하게 자기 의견, 자신이 그리는 클럽의 미래상을 선포하여, 인심을 끌 줄 알았습니다. 재정적인 광란의 지난 몇 년을 보내며 곳곳이 병들어 버린 헤르타 BSC에 안정과 회복의 미래를 가져다주기 위해, 정신적인 '전환점'을 마련하고, 그리로 조직을 이끌기를 그는 자기 소명으로 삼았습니다. "베를린의 길(Berliner Weg)"은 그의 정신이 집중된 곳이었고, 동시에, 누구보다 행복하게도, 그가 즐기는 일이었습니다. 체코 공화국과 국경 인근의 마린베르크에서 태어나, 드레스덴에서 자라고, 독일 재통일 일 년 전에 동베를린의 마찬으로 올라온 베른슈타인은 일전에 할레킨즈 베를린 '98(울트라스 모임)의 공동 설립자로 잘 알려졌습니다. 올림피아슈타디온 베를린의 오스트쿠어베(홈 응원석)에서 희로애락을 경험하며 인생을 배운 그는 숙련된 산업기계공이자, 한 이벤트 에이전시의 소유주이기도 했지만, 결국, 카포로서 목청껏 응원한 하나의 축구팀이 그에게는 전부나 다름없었습니다. 일요일 원정길에 동행했다가 월요일, 부랴부랴 기차역에서 출근길로 갈아타기도 했고, 소싯적에는 잦은 여행의 경비를 마련하기 위해 피를 뽑기도 했습니다. 평생을 자신이 사랑해 마지않은 일(=헤르타 BSC)에 바치고, 그 정점에서 떠난 그는 가히 '풍운아'였습니다.

 

ⓒ Soeren Stache/ dp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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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 베른슈타인, 헤르타 BSC의 신임 회장

지난달 말, 올림피아슈타디온 베를린에서 베르너 게겐바우어 전 회장의 시대가 정확히 14년 만에, 공식적으로 막을 내렸습니다. 재작년 10월 선거에서 여태 가장 낮은 54% 득표율에 그쳐, 네 번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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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세기 초에 클럽을 이끌었던 SPD 출신 "헌신적인 노조원" 빌헬름 베르니케(1882-1967)에 이어, 헤르타 BSC 역사상 두 번째로 긴 상임위원회 회장 임기(14년)를 지낸 베르너 게겐바우어(2008년의 선거부터 4선)가 지난 2022년 5월 말, 그와 격한 갈등을 겪은 라스 빈트호스트가 정식으로 소추한 그의 탄핵안이 클럽 총회에서 다루어지기 직전, 사퇴하자, "혼란스러운 시기의 보궐 선거"에 카이 베른슈타인이 도전장을 던졌습니다. 전 독일연방의회 의원으로, 스포츠 클럽, 퓍세 베를린 라이니켄도르프의 최고직을 역임한 정치인, 프랑크 슈테펠(CDU)이 그와 맞붙었는데, 클라우스 브뤼게만, 당시 헤르타 BSC 감독위원회 위원장(전직) 등이 추천하고 홍보한 슈테펠은 클럽의 '오랜 권력'과 빈트호스트가 선호한 후보였습니다. 절대다수가 "노련한 정치인"의 무난한 승리를 예상하던 선거 운동 초반, 세 번이나 올림피아슈타디온 베를린에 출입이 금지됐던 울트라스 출신 인사는 열심히 기자들과 만나, 자신을 "오스트쿠어베의 자식"이라고 소개하며, 클럽을 위해서라면, 자기 영혼의 일부라도 팔 수 있다고 선언, '쇄신을 요구하는 시대의 목소리를 대표하는 후보'로서 노선을 개척하여, 종국에는 "역사적인 승리(분데스리가 역사상 첫 번째 울트라스 출신 상임위원회 회장 당선)"를 따냈습니다. 그간, "빅 시티 서커스"라는 오명을 뒤집어쓴 채로, 슈프레아테너를 향한 사랑이 식어 가던 베를린 사람들의 마음을 '다시' 클럽의 중심으로 당겨왔고, 클럽과 활동적인 축구광 집단 사이의 소원한 관계도 일부, 극복해 냈습니다. 그가 곧, 베스트엔트에서 도시 최고의 "독이 든 성배"를 집은 베른슈타인의 기반이 됐습니다. 부푼 가슴을 안고, 자기 '평생의 클럽'을 위해 전부를 내던지기로 했지만, 그의 회장 임기는 혹독한 현실 시험의 연속이었습니다. 베른슈타인이 헤르타 BSC 상임위원회 회장직에 오른 이래, 베를린의 노파에 불어닥친 안팎의 '거대한' 풍랑만 정리해도, 그 목록의 끝을 찾으려면, 한참을 아래로 내려야 합니다.

 

  • 2022년 10월 | 라스 빈트호스트의 여론 조작 추문과 테너 홀딩 B.V. '철수' 선언
  • 2023년 1월 | 프레디 보비치, 전 운동 부서 전무이사 경질
  • 2023년 3월 | 777 파트너스의 헤르타 BSC GmbH & Co. KGaA 지분 인수 협상 완료
  • 2023년 4월 | 잔드로 슈바르츠 전 감독 경질
  • 2023년 5월 | 클럽 역사상 일곱 번째 강등
  • 2023년 6월 | 파산에 가까운 재정 상황: 가까스로 면허 유지
  • 2023년 7월 초 | '신입생' 토니 라이스트너에 대한 일부 울트라스의 원색적인 공격
  • 2023년 7월 중순 | 오스트리아서 구금된 마리우스 게어스베크
  • 2023년 8월 | CrazyBuzzer와 주요 후원 계약 체결에 따른 논란
  • 2023년 10월 | 클라우스 브뤼게만, 전 감독위원회 위원장 사임
  • 2023년 12월 | 중계권 사업 지분 부분 매각에 관한 DFL 클럽 회의 투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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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ertha BSC

 

 지난 수년간, 헤르타 BSC는 자아 분열과 자기 과대평가의 진동을 거듭했습니다. 소란스러운 의견은 거부하고, 대상을 가리지 않고, '불편한 질문'을 할 줄 알았던 카이 베른슈타인은 종종 자기 능력과 "프로축구"라는 서식지의 한계에 부딪혀야 했습니다. 아픔만 남긴 라스 빈트호스트, 테너 홀딩 B.V.와 서로 손을 놓고, 조시 완더의 777 파트너스라는 새로운 재정적 거대 협력자를 맞아들이며, 헤르타 BSC GmbH & Co. KGaA 지분 14%를 추가로 내주어야 했습니다. 마이애미 자본에만 전체의 78.8% 지분이 넘어가 있는데, 보통주와 우선주를 혼합한 증자와 대주주의 의결권을 63%로 제한하는 등의 장치로 "50+1 규정"의 테두리 안에 들어왔지만, 클럽 재정이 외부 자본에 지나치게 의존한 결과를 이미 봤기에, 일련의 과정은 '울트라스 출신' 베른슈타인의 '이상'과 아무래도 거리가 있었습니다. 비슷한 사건이 또 있었으니, 2021년 여름에 Autohero와 합의한 이 년의 기본 계약이 만료되고, 삼 년 차의 선택적인 연장 조항을 발효하지 않기로 한 지난 8월, 헤르타 BSC는 스포츠 베팅 업체, CrazyBuzzer와 일 년간 효력이 있는 주요 후원 계약(200만 유로 규모)을 체결했습니다. 파랗고 하얀 유니폼의 가슴 면에 "스포츠 베팅에서 온 더러운 돈"의 흔적이 남기는 불과 일 년 전, 베른슈타인이 선거 운동 중 '자기 임기에는 없으리라고' 한 약속에 전면으로 어긋났습니다. 시장에서 저자세로 나서기를 시종일관 거부하던 그는 끝내, 자기 가치관에 대한 "배신"으로 괴로워했지만, 현실은 대안이 없는 현실과 타협이었습니다. 파산 직전, 가까스로 2. 분데스리가에서 경기할 수 있는 면허를 받은 헤르타 BSC는 협상장에서 절대 유리한 위치에 오를 수 없었습니다. 지난 12월에는 중계권 사업 지분 부분 매각에 관한 "논란 많은" 수정안(DFL은 대회 중계권을 관리, 가능한 한 많은 수익을 창출하는 자회사를 설립하기를 원하며, 외부 투자자를 찾아, 최대 8%까지 그 수익에 참여하도록 하고, 향후 20년간, 그 연간 수입의 일부를 떼 주는 조건으로 10억 유로가량을 제공받고자 합니다; 전국에서 이에 반발하는 축구광 집단의 격한 시위가 벌어지는 오늘입니다)이 DFL 클럽 투표에 부쳐졌고, 분데스리가와 2. 분데스리가 총 36개 클럽 중 24개 클럽의 "찬성" 표를 받아, 통과됐습니다. 투자자들의 양면성을 잘 아는 베른슈타인은 앞장서서 "반대" 의견을 개진했지만, 이때도 지원군이 부족했습니다.

 

ⓒ City-Press

 

 카이 베른슈타인은 입버릇처럼 "일이 힘들지만, 저는 제가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장소에 있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실로 그러했습니다. 대다수가 자기 자리를 지키기에 급급했던 이 오랜, "자극에 과도하게 예민하고, 과열된" 클럽에서 그는 설득력 있게 일했고, 늘 올바른 해결책을 갖고 있지는 못했지만, 자주 올바른 질문을 던지고, 갈등을 피하지 않았습니다. 벌써 그를 "역대 최고의 헤르타 BSC 상임위원회 회장"으로 기억하는 목소리가 들립니다. 여름, 오스트리아서 "사건" 이후, 그가 (클라우스 브뤼게만 등과 갈등을 빚으면서까지) 뒤를 지켜주고, 끝까지 기다려 주었던 마리우스 게어스베크를 비롯해, 파비안 레제, 토니 라이스트너, 나더르 엘진다우이 등, 선수단 구성원도 각자 베른슈타인과 추억을 공유하고, 슬퍼합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추진력 있는 자기 열정으로 주변을 감염시키던 인물은 이제, 떠났습니다. 클럽은 오는 11월의 총회, 정기 선거 전까지, 새로운 상임위원회 회장을 선출할 뜻이 당장 없습니다. 그때까지 베른슈타인의 빈자리는 파비안 드레셔, 현 헤르타 BSC 상임위원회 부회장이 채웁니다. 그는 회장직을 승계하는 대신, 부회장으로 남되, 회장의 직무를 대리합니다. 역시, 오스트쿠어베의 오랜 구성원 중 하나로, 2016년부터 상임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해 온 이 슈판다우 출신 변호사는 지난 보궐 선거에 베른슈타인의 러닝메이트를 자처, 부회장에 당선됐습니다. 어깨가 무거운 그를 다른 여섯의 위원, 아네 윙어만, 페어 모크슈튀머(이상 2020년 10월-), 한스요아힘 블레징(2022년 6월-), 아네 노스케, 자라바난 순다람, Dr. 랄프 테터(이상 2023년 10월-) 등이 지원합니다. 그를 처음으로 제시하고, 끊임없이 추진하던 당사자는 사라졌지만, 베른슈타인의 유산인 "베를린의 길(Berliner Weg)"을 이들은, 헤르타 BSC는, 계속 지키고, 가꾸어야 합니다. 그가 이 어려운 시기, 대도시의 "광기"를 끝내고, 마침내, 경기장 안팎에서 클럽을 하나로 뭉치게 했습니다. 토마스 헤리히와 계약을 다시 논의해야 할 시기가 다가오고, 2. 분데스리가는 후반기에 접어들며, DFB-포칼에서 도전도 이어집니다. 선구자 없이, 갑작스레 그 정신을 이어받기란 절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길을 닦는 작업은 계속됩니다. 끈임없는 도전과 실패, 그 극복과 승리가 130년 넘게 이어진 헤르타 BSC의 역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