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분데스리가 50주년: 지나온 역사와 더 뜨거워질 분위기

2024. 8. 1. 07:00DFL

 

 오는 금요일 밤, 라인에네르기슈타디온에서 두 전통의 클럽, 1. FC 쾰른과 함부르거 SV가 맞붙어, 새로운 2. 분데스리가 시즌 개막을 알립니다. 올해는 지난 1974년 8월 2일, 루트비히스파크슈타디온에서 1. FC 자아브뤼켄과 SV 다름슈타트 98의 대결로 독일 프로축구 차상위 무대의 역사가 시작된 지 꼭 50년 되는 해입니다. '50주년'을 기념할 수 있는 바로 그날, 두 북부 주요 도시의 열성적인 지지자 집단이 서로를 마주하도록, 관계자들이 심혈을 기울여 설계했습니다. 헤센의 백합 클럽이 막 분데스리가에서 강등된 터라, 반세기 전에 안방에서 경기한 자알란트의 클럽이 있었다면, 더 재미있는 일정이 짜였겠지만, 그들이 현재, 3. 리가에서 경쟁하는 까닭에, 그렇게 되지는 못했습니다.

 아무래도 2. 분데스리가와 같이, 프로축구 피라미드 두 번째에 놓이는 대회는 그 상위의 그림자에 가리기 마련이지만, 독일에서는 이 수준이야말로 "진정한 하나의, 통일된 대회"라고 불릴 만합니다. 지금껏 128개 클럽이 이 길목에서 경쟁하며 각자 역사를 써 내렸는데, 연방을 구성하는 16개 주에서 모두 (적어도 하나씩은) 대표를 낼 수 있었습니다. 올해도 1. FC 쾰른과 FC 샬케 04, 포르투나 뒤셀도르프, SC 파더보른 07, SC 프로이센 뮌스터 등, 굵직한 이름들(총 다섯 클럽 =최다)을 내세운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에서만 서른다섯의 참가자가 줄을 섰고, 16개 클럽을 배출한 바이에른주와 바덴뷔르템베르크주가 그 뒤를 이었습니다. 전자에서는 SpVgg 그로이터 퓌르트, 1. FC 뉘른베르크, SSV 얀 레겐스부르크 등, 셋이 오는 주말, 새로운 시작을 기다리고, 지난 시즌, 3. 리가 정상을 차지하며, 장장 23년을 기다린 끝에, 마침내, 이 무대에 복귀한 SSV 울름 1846가 칼스루어 SC와 함께, 후자의 자존심을 지킵니다. 서로 다른 11개 클럽과 그를 따르는 니더작센주는 두 달 전, VfL 오스나브뤼크를 잃었지만, 하노버 96와 아인트라흐트 브라운슈바이크가 경쟁에 남아 있습니다. 여담으로, 지난 시즌 서른두 번째 경기를 끝으로 강등이 확정된 VfL 오스나브뤼크는 통산 여덟 차례, 2. 분데스리가에서 강등을 경험한, 이 부문의 최고봉입니다. 계속해서, 헤센주에서는 아홉, 라인란트팔츠주에서는 여덟, 베를린에서는 일곱, 자알란트주에서는 다섯, 함부르크주에서는 셋, 그리고 작센안할트주에서는 두 클럽이 분데스리가로 승격의 꿈을 꾸었습니다. SSV 얀 레겐스부르크와 승강 플레이오프서 SV 베엔 비스바덴(헤센주)이 좌절하며, 여섯 개 주 모두, 올해는 한 클럽씩만 이 대회에 참가할 자격을 갖췄습니다. 순서대로 SV 다름슈타트 98, 1. FC 카이저슬라우턴, 헤르타 BSC, SV 07 엘버스베르크, 함부르거 SV, 1. FC 막데부르크가 그 주인공입니다. 나머지 여섯 개 주에는 이번 시즌에 2. 분데스리가에서 겨루는 클럽이 없습니다. 단, 작센주는 여섯, 브란덴부르크주는 셋, 튀링엔주와 브레멘주, 슐레스비히홀슈타인주는 각 둘, 메클렌부르크포어포메른주는 하나의 클럽을 역사책에 올렸습니다. 이 중, 슐레스비히홀슈타인주에서는 지난 5월 11일, 홀슈타인 킬이 창단 이래 처음으로 독일 프로축구 최상위 무대 진출을 확정, 칠 년 만에 둘째 대회를 '탈출'했고, 메클렌부르크포어포메른주의 자랑, 유일한 클럽이던 FC 한자 로스토크는 그로부터 일 주 뒤, 또 한 단계 아래, 3. 리가로 추락했습니다.

 

1971년, 호어스트그레고리오 카녜야스, 당시 키커스 오펜바흐 회장이 분데스리가 내 유명 선수들이 승부 조작에 가담, 뇌물을 수수했다는 혐의를 제기하며 터진 대형 추문은 오늘까지도 독일 프로축구 사상 가장 부끄러운 일 중 하나입니다. [ⓒ wdr]

 

 2. 분데스리가는 경제적이고 경쟁적인 관점에서 분데스리가를 뒷받침하려고 만들어졌습니다. 그 출범 이전까지, 서독에는 최상위 프로 대회 바로 아래, 다섯 개 지역으로 나뉜 레기오날리가가 존재했습니다. 1973년, 북쪽, 레기오날리가 노르트(19개 클럽)와 서쪽, 레기오날리가 베스트(18개 클럽), 남쪽, 레기오날리가 쥐트(18개 클럽), 남서쪽, 레기오날리가 쥐트베스트(16개 클럽), 그리고 레기오날리가 베를린(12개 클럽)에서 총 83개 클럽이 자웅을 겨뤘습니다. 거의 모든 클럽이 재정난에 허덕였는데, 심지어는 베를린에서 "유대인 클럽"으로 위세를 떨치던, 이해, 분데스리가로 승격에 성공한 테니스 보루시아 베를린조차, 이즈음, 50만 마르크에 육박하는 부채를 졌습니다. 그들이 국가대표 선수로 활동하며, AS 로마와 AC 밀란 등, 해외에서도 이름을 알린 칼하인츠 슈넬링어(1939-2024)와 계약하자, "도대체 어디서 그 돈이 나서" 그런 "대형 계약"을 성사했는지 의아해하는 반응이 다수였을 정돕니다. HSV 바름베크-우렌호어스트, SC 콩코르디아 함부르크, FC 장크트 파울리 등, 함부르크에서만 여러 클럽이 참가(그나마 SC 슈페르버 함부르크가 1972년에 강등되기 전에는 네 개 클럽이 한 번에 경쟁하기도 했습니다)한 레기오날리가 노르트에서는 도시의 (주요 무리가 겹친) 축구광들이 이리저리 엉켜서 문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한편, 시장 제약 외에, 최고 대회의 도덕적인 몰락도 독일 연방 축구 최고 관계자들의 2. 분데스리가 창설 논의를 앞당겼으니, 매년, 분데스리가에서 시즌 막판만 되면, 레기오날리가로 강등을 어떻게든 피해 보겠다고 승부 조작을 추진하는 일이 비일비재했기 때문입니다. 클럽들은 지역 대회로 떨어지는 순간, 경제적인 기반이 와르르 무너진다고 생각했습니다. 1971년의 대형 추문은 '특히' 충격적이었습니다. 시즌 막판, 여덟 경기에 비도덕적인 행위가 있었고, 너무나 많은 선수가 거기 얽혔습니다. DSC 아르미니아 빌레펠트는 스물여덟째 경기, FC 샬케 04 선수들에게 4만 마르크, 서른세 번째 경기, VfB 슈투트가르트 소속 선수 세 명에게 1만 5,000마르크(중간 전달자에게 수수료 25,000마르크), 최종전, 헤르타 BSC에 25만 마르크를 주고 각기 다른, 세 번의 1 대 0 승리를 샀습니다. 이들과 강등권에서 경쟁한 로트바이스 오버하우젠의 최종전 상대였던 아인트라흐트 브라운슈바이크에도 그 경기(1 대 1로 비겨서 액수가 작아졌습니다)에 이기는 조건으로 14만 마르크 이상이 전해졌습니다. 이에 앞서, 32라운드에는 빌레펠트 클럽으로부터 6만 마르크를 받은 게르트 켄치케 등, MSV 뒤스부르크 선수들이 계약 내용을 깨고 4 대 1로 이겨 버리기도 했습니다. 알려지자마자 수많은 축구광을 실망하게 한 이 사건은 서독 대표 선수로 1970 FIFA 월드컵 멕시코에도 출전했던 1. FC 쾰른의 유명 골키퍼, 만프레트 망글리츠(그는 실제로 뇌물도 챙겼습니다)로부터 수차례에 걸쳐 협박 전화를 받은 키커스 오펜바흐 회장, 호어스트그레고리오 카녜야스의 폭로로 세상에 나왔습니다. 1971년, DSC 아르미니아 빌레펠트는 로트바이스 오버하우젠 등과 분데스리가에 남았고, 키커스 오펜바흐는 순위표상 열일곱째로 강등됐습니다.

 사실, 처음에는 "또 하나의 분데스리가"를 만들기가 혼란만 가중한다며 정치권에서도 우려의 목소리가 나왔는데, 중앙의 협회(DFB)가 통제하는 대회가 개막하면, 지역마다 축구협회의 약화가 자명했으므로, 그곳에서 자기 자리와 권세를 지키고 싶었던 일부가 '누구보다' 기를 쓰고 그 새로운 둘째 무대 탄생에 반대했습니다. 이들은 다시, 분데스리가에서 횡행하던 경기 결과 왜곡 시도를 들추며, "분데스리가에서 넘어오는 그 나쁜 풍토가 지역 축구 물을 흐리고, 결국은 독일 축구계 전반을 병들게 한다."라고 주장했습니다. 다 지난 뒤의 이야기지만, 결국, 온갖 난관을 극복하고 세상에 나온 2. 분데스리가는 그 출범과 거의 동시에, 분데스리가와 1974 FIFA 월드컵 서독 우승의 감동에 겨워 있던 수많은 축구 애호가를 사로잡았습니다. 초기의 2. 분데스리가는 오늘날과 달리, 북부(노르트)와 남부(쥐트)로 나뉘어 운영됐으며, 각 스무 개 클럽씩, 총 마흔 개 클럽이 참가 자격을 얻었습니다.

 

TSR 올림피아 빌헬름스하펜은 당대, 비교적 자금력이 센 클럽으로서, 2. 분데스리가 출범 첫해, 대회 한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지만, 그 금전적인 힘이 떨어진 1970년대 후반에는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습니다. [ⓒ IMAGO/ Rust]

 

 성난 지역 축구 협회 고위층을 달래려, DFB가 "분데스리가"라는 이름을 떼고 "2. 리가"로 불러도 좋다고 했던 그 새로운 무대의 시작을 코앞에 두고, 1973년과 1974년, 이즈음, 가장 나은 경제력과 경쟁력을 앞세워, 13개 클럽이 2. 분데스리가 참가 자격을 확보한 남부(레기오날리가 쥐트), 열한 자리를 약속받은 서부(레기오날리가 베스트)에서 상황이 제일 빠르게 안정됐습니다. 레기오날리가 쥐트에서 충분히 붙어 볼 만한 전력을 갖추었던 KSV 헤센 카셀과 역사 깊은 프라이부르거 FC, SSV 얀 레겐스부르크 등이 일제히 강등될 만큼, 경쟁이 치열했습니다. DFB가 2. 분데스리가 참가 조건을 매우 까다롭게 내건 까닭인데, 직전 오 년간의 경쟁 성과, 성적뿐 아니라, 15,000명 이상 수용할 수 있고, 투광 조명을 갖춘 경기장, 10만 마르크의 보증금 등이 필수 요소로 제시됐습니다.

 각 일곱 클럽씩 배정받은 북부(레기오날리가 노르트)와 남서부(레기오날리가 쥐트베스트)에서는 쟁탈전이 과열되다 못해, 판을 치는 온갖 술수와 눈속임으로 얼룩지고야 말았습니다. 북부를 먼저 살피면, TSR 올림피아 빌헬름스하펜은 시의회와 지역의 타자기 공장으로부터 지원받아, 당시, 자금력이 비교적 센 클럽이었습니다. 이에, 그들은 부족한 자격 요건을 돈으로 때우려고 했으며, 이미 자격을 얻은 HSV 바름베크-우렌호어스트가 로텐바움의 함부르거 SV 훈련장을 빌려 써야 한 점을 트집 잡아, 그들의 프로 무대 진출을 막으려고도 했습니다. 결과적으로 두 클럽 모두, 초대 2. 분데스리가 노르트에 참가할 수 있었는데, 레기오날리가 노르트에서 마지막 시즌, TSR 올림피아 빌헬름스하펜은 7위였고, HSV 바름베크-우렌호어스트는 5위였습니다. 이때까지는 다섯 개의 레기오날리가, 각 1·2위 팀이 두 개 조로 편성돼 승격을 위한 추가 대회를 치르고, 각 조 선두가 분데스리가로 올라갔습니다. 레기오날리가 노르트에서 최고 성적을 내고 승격 라운드 A조에 속한 아인트라흐트 브라운슈바이크가 (조 선두를 달려) 더는 차상위 프로 대회에 남을 이유가 없어지자, TSR 올림피아 빌헬름스하펜이 "추가 합격"했습니다. 클럽은 곧장, 베른트 헬름슈로트 골키퍼 등, 유명 선수들과 계약하고 최고 무대로 승격에 도전했지만, 1975년 여름, 그들이 받아 든 2. 분데스리가 노르트에서 성적표는 강등권에 해당했습니다. 이후, 다시 지역 대회를 전전하던 빌헬름스하펜의 클럽은 금전적인 힘이 떨어진 1970년대 후반, 쇠락의 길에 접어들었습니다.

 

출범 첫해, 2. 분데스리가에 참가할 수도 있었던 SV 알젠보른은 연이은 난관을 결국, 극복하지 못하고, 오버리가로 강등됐습니다. 특히, 헤어만 노이베르거의 1. FC 자아브뤼켄에 면허를 내주어야 했으니, 그 클럽과 감정이 좋을래야 좋을 수가 없었습니다. [ⓒ IMAGO/ MKA]

 

 남서부에서는 상황이 훨씬 심각했습니다. 프리츠 발터(1920-2002)가 지원하던, 세 번이나 지역 대회 정상(승격에는 번번이 실패했으나)에 오른 SV 알젠보른(1973-74년 레기오날리가 쥐트베스트 10위)이 총점 95점을 얻어, 2. 분데스리가 참가 클럽 심사에서 안정권에 들었으나, 경기장 관련 요건을 맞추지 못했습니다. 이에, 이들이 처음에 내놓은 해결안은 평가에서 낙제했지만, 육만 명 넘게 입장할 수 있는 쥐트베스트 슈타디온을 가진 쥐트베스트 루트비히스하펜(1973-74년 레기오날리가 쥐트베스트 11위)과 '합병'이었습니다. 쥐트베스트 슈타디온은 과거, 서독 대표팀 경기를 연, 당대의 손꼽히는 경기장 중 하나로, 1980년대 들어서는 SV 발트호프 만하임이, 가끔은 1. FC 카이저슬라우턴 등이 이곳을 썼습니다. 엘튼 존(1984년)과 마이클 잭슨(1992년), 율레 나이겔과 페터 마파이(1998년; 합동), 본 조비(2000년), 브루스 스프링스틴, 헤어버트 그뢰네마이어(이상 2003년), 메탈리카(2004년) 등, 전설적인 대중음악가들이 차례로 무대에 오르면서, 후대에 대형 공연장으로 더 알려지기도 했습니다. 다시, 1974년, SV 알젠보른과 쥐트베스트 루트비히스하펜의 합병은 수포가 됐습니다. FC 08 홈부르크 등, 경쟁자들이 서로 다른 도시(지역)의 클럽끼리 합쳐서 프로에 진출하기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거세게 반발했기 때문입니다. 알젠보른과 루트비히스하펜은 오늘날에도 차로 30분 넘게 떨어져 있습니다. 주변의 소음을 무시하면서까지 계획을 밀어붙일 만한 연고를 마땅히 찾을 수 없었습니다. 이어서는 그해 여름, 레기오날리가 쥐트베스트 7위를 차지했지만, 새로운 차상위 대회에 나설 자격은 얻지 못한 아인트라흐트 바트 크로이츠나흐가 수십만 마르크에 2. 분데스리가 클럽 면허를 사겠다고 SV 알젠보른에 접근했습니다. 물론, 이 또한 숱한 논란을 낳았고, 결국, 무산됐습니다. 종장에는 SV 알젠보른과 쥐트베스트 루트비히스하펜, 아인트라흐트 바트 크로이츠나흐 모두, 손을 붙잡고 강등당했습니다. SV 알젠보른이 간신히, 18,000석 수준까지 경기장을 증축했지만, 그로부터 인제는 경제 조건에 미달해, DFB가 그 자격을 박탈한 탓입니다. 1974년 여름까지 클럽은 소송을 걸고 항의했지만, 그들의 이의는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지난 5월, 1. FC 자아브뤼켄과 FC 08 홈부르크가 란데스포칼 결승전에 서로를 마주했습니다. 3. 리가 5위에 그쳐, 2. 분데스리가로 승격에 또 한 번 실패한 1. FC 자아브뤼켄이 2 대 1로 이기고, 자알란트주에서 자존심은 지켰습니다. 한때 떼려야 뗄 수 없는 앙숙이었던 두 클럽이지만, 올해도 레기오날리가 쥐트베스트에서 싸우는 FC 08 홈부르크가 프로 무대를 밟은 지 오래라, 둘의 제일 최근 2. 분데스리가에서 맞대결을 찾으려면, 1995년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 Steven Mohr/ Jan Huebner]

 

 역사에 남은 마지막 시즌, 남서부는 계속된 판정 시비로도 한창 시끄러웠습니다. 오랫동안 FC 08 홈부르크의 수장을 역임한 사업가, 우도 가이틀링어(1939-2018)가 공개적으로 "1. FC 자아브뤼켄은 시즌 중, 늘 적절한 시점에 페널티킥 기회를 얻었습니다."라고 비판하고 나섰는데, 그의 공격에 아주 근거가 없지는 않았습니다. 이 시즌, 1. FC 자아브뤼켄은 총 30경기에 19승 5무 6패, 승점 43점(아직은 한 번의 승리에 승점 2점이 주어지던 시절입니다)으로 레기오날리가 쥐트베스트 2위에 올랐습니다. 그들이 거둔 19번의 승리 가운데 여덟 번은 페널티킥 덕분이었고, 하인츠 크빈도우라는 심판이 그중, 무려 네 번이나 도움을 주었으니, 의심을 사고도 남았습니다. 1973년은 독일 프로축구에 경기 중 선수의 위험 행동을 경고하기 위한 노란색 카드가 도입된 해이기도 한데, 크빈도우는 FC 바이에른 뮌헨이 안방에서 포르투나 뒤셀도르프를 3 대 1로 완파한 분데스리가 개막전, 게오르크 슈바첸베크(당시 FC 바이에른 뮌헨)와 디터 브라이(당시 포르투나 뒤셀도르프)에게 최초로 그를 꺼낸 인물로도 유명합니다. 1. FC 자아브뤼켄은 코블렌츠에서, 당시, 쾰른 한 매체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보다 더할 수 없을 만큼 의심스러운 페널티킥"과 함께 3 대 0으로 승리, 골 득실로 순위표에서 FC 08 홈부르크를 앞지른 지 4주 뒤, 가이틀링어 회장의 팀을 상대로, 경기 종료 십 분여를 앞두고 선언된 페널티킥에 힘입어, 3 대 2로 이겼습니다. 두 경기 모두, 크빈도우 주심이 관장했습니다. 18승 5무 7패, 승점 41점으로 시즌을 마친 FC 08 홈부르크는 결국, "심판들에게 사랑받은 자아브뤼켄의 팀"에 가까스로 밀렸습니다. 레기오날리가 쥐트베스트에서 최고 성적을 낸 보루시아 노인키르헨과 함께 승격 라운드에 진출한 1. FC 자아브뤼켄은 아인트라흐트 브라운슈바이크, 1. FC 뉘른베르크(레기오날리가 쥐트 2위), SG 바텐샤이트 09(레기오날리가 베스트 1위), 바커 04 베를린(레기오날리가 베를린 2위) 등과 A조에 묶여, 여덟 경기를 더 치렀는데, 거기서 여섯 번 지고, 한 번씩 이기고 비긴 끝에, 승점 삼 점, 조 꼴찌로 2. 분데스리가로 향했습니다.

 

1. FC 자아브뤼켄의 잘 알려진 회원이었던 헤어만 노이베르거는 독일에서 "전후 제일 중요한 축구계 인사 중 하나"로 꼽힙니다. 그가 DFB 회장을 역임하던 시기, 전차 군단이 영광을 구가하기도 했지만, 그에 대한 어두운 그림자도 늘 따라다녔습니다. [ⓒ IMAGO via DFB]

 

 사실, 1. FC 자아브뤼켄은 분데스리가로 승격을 위한 추가 일정에 실패를 맛본 뒤, 새롭게 문을 여는 2. 분데스리가에 참가할 자격도 갖추지 못했습니다. 1970년대 들어, 자꾸만 레기오날리가서 강등권 언저리로 몰리며 잃은 많은 승점이 발목을 잡았습니다. 하지만, "당해 레기오날리가서 최고 성적을 낸 클럽들이 같은 수준의 대회 신설과 함께, 하위 무대로 강등됨이 과연, 정당한가?"라는 다툼이 발생했고, DFB가 개입, 직권으로 1. FC 자아브뤼켄의 2. 분데스리가 참가 자격을 인정하며, 상황이 역전됐습니다. 다시, 이로써 그들에게 자리를 내준 클럽이 바로, 재정 점수를 깎아 먹은 SV 알젠보른이었습니다.

 언뜻 보기에 '우연'의 연속으로 넘길 법도 한 일련의 과정에 1. FC 자아브뤼켄에 대한 DFB의 특혜 논란이 커진 이유는 자알란트주 축구 협회의 장을 맡고 있던, 1974 FIFA 월드컵 서독 개최 실무를 이끈 당사자이자, 당해 가을, FIFA 부회장으로, 이듬해에는 DFB 회장으로 선출된 헤어만 노이베르거(1919-1992)가 잘 알려진 그 클럽의 회원이었기 때문입니다. 자연히, 그를 위해 DFB가 1. FC 자아브뤼켄을 2. 분데스리가 이상 수준에 안착시키려고 경기장 안팎에서 손을 썼다는 불평이 곳곳에서 터져 나왔습니다. 거꾸로, 2. 분데스리가 참가를 위한 그 빡빡한 조건 일체가 공개된 직후, 일 년간의 경기 결과와 관계없이, 1973년에 갓 레기오날리가로 승격한 클럽들은 도로 하위 무대로 돌아가야 함이 너무도 자명하다는 지적이 있었기에, 더욱 그러했습니다. 어쨌든, 그 모든 우여곡절 끝에, 1. FC 자아브뤼켄 선수 열한 명이, 1974년 8월 2일, 루트비히스파크슈타디온에 입장, 잔디를 밟았습니다.

 이러한 2. 분데스리가 출범 당시, 그를 향한 일각의 의혹에도, 헤어만 노이베르거는 독일에서 "전후 제일 중요한 축구계 인사 중 하나"로 불립니다. 그는 1978년부터 1990년까지 FIFA 월드컵 조직 업무를 총괄했고, 전차 군단은 그가 협회장으로 있는 동안, 1980년, UEFA 유러피언 풋볼 챔피언십에 우승하고, 1982년부터 세 번의 연속된 대회에 연거푸 FIFA 월드컵 결승에 올라, 마지막, 1990년 대회에 세계를 제패했습니다. 그러나, 그에 대한 어두운 그림자는 이후에도 모두 걷히지 않았습니다. 그가 이미 DFB 회장으로 재직하던 1970년대 후반에는 아르헨티나 군부 독재 정권과 관계, 그 안에서 한 독일인 학생에 대해 자행된 인권 유린, 심지어는 (그가 그를 막을 수 있었다는 정황이 드러나기도 했는데) 살해에 대한 방관, 나치 부역자인 한스울리히 루델의 대표팀 방문에 대한 침묵 따위로 구설에 올랐고, UEFA 유로 1988 유치를 위한 경합 과정에는 동유럽으로부터 표를 얻으려고 서베를린을 개최지에서 제외(이는 서독 정치권과도 논의된 내용이었다고 하나)해 빈축을 샀습니다. 여러모로, 노이베르거는 우익 극단주의 신문들과 더 친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1974 FIFA 월드컵 서독 우승을 이끈 헬무트 쇤(1915-1996) 감독이 은퇴한 뒤, 유프 데어발(1927-2007)을 전국에서 제일 유명한 축구 감독으로 만들었는데, 이때도 그가 쇤 감독의 조수로 일하기는 했지만, 데어발이 1972년에 올림픽 대표팀을 이끌고 실패했으며, 과거, 1. FC 자아브뤼켄에서도 분데스리가로 클럽을 끌어 올리지 못했다며, 노이베르거가 자신과 친한 인물을 사령탑에 앉힌다는 비판이 일었습니다.

 

1981년 7월 31일, 알레마니아 아헨과 슈투트가르터 키커스의 경기로 "하나로 합쳐진" 2. 분데스리가의 막이 올랐습니다. 이전까지 북부와 남부로 나뉘어, 총 마흔 개 이상 클럽이 참가하던 대회는 그 경계를 허물었고, 참가 클럽 숫자도 절반 이상 줄었습니다. [ⓒ IMAGO]

 

 한동안 북부와 남부, 둘로 나뉘어 운영되던 2. 분데스리가는 1981년에 변곡점을 맞이합니다. DFB가 두 편을 하나로 합치고, 대회에 참가하는 클럽 숫자도 스무 개까지 줄이기로 하면서입니다. 출범하고 십 년도 안 돼, 협회 차원에서 이러한 큰 변화를 단행한 배경에는, 또 다시, 42개 클럽(40개 클럽 체제가 유지되다가 1979년에 분데스리가에서 강등된 숫자와 그리로 승격한 숫자가 맞지 않아서 2. 분데스리가 쥐트에 하나가 늘어 버렸고, 1980년에는 2. 분데스리가 쥐트의 참가 클럽 숫자가 20개로 돌아왔지만, 2. 분데스리가 노르트에 22개 클럽이 속했습니다)을 괴롭힌 재정적인 늪이 있습니다. 이들이 진 빚은 총 3,000만 마르크에 달했습니다. 1970년대 말, 규모가 크고 이름이 알려진 일부 아마추어 클럽에서는 이면 계약으로 선수가 최대 2,000마르크의 월급을 받기도 했는데, 이즈음, 대다수 2. 분데스리가 프로 클럽 소속 선수는 500마르크에서 800마르크 정도를 달마다 몫으로 챙길 뿐이었습니다. 이 수준에서 좋은 성과를 내서 분데스리가로 진출해도, 이미 수년간 그곳에서 전력을 강화한 클럽들과 경쟁하려고, 그들을 따라잡으려고 애쓰다 보면, 가랑이가 찢어지기 일쑤였습니다. 일찍이 테니스 보루시아 베를린이 120만 마르크까지 불어난 빚더미와 같이 주저앉아, 스웨덴 출신 공격수인 베니 벤트(1977년에 1. FC 카이저슬라우턴으로 이적), 창의적인 미드필더, 빈프리트 베르케마이어(1978년에 1. FC 뉘른베르크로 이적) 등, 주축 선수들을 방출해야 했습니다. 팀을 맡았던 루디 구텐도르프(1926-2019) 감독은 "2. 리가가 독일 축구의 끝에 있는 것만 같습니다."라고 하소연했습니다.

 FC 장크트 파울리와 로트바이스 뤼덴샤이트, FV 04 뷔르츠부르크, SV 발트호프 만하임 등도 대부분 비용을 소급해서 분할 납부, 근근이 버티는 지경이었습니다. 1977-78년에 독일 프로축구 최상위 무대를 밟았던 FC 장크트 파울리는 특히, 150만 마르크를 '이미' 대출 통장에 기입해 둔 터라, 분데스리가에 남아야만 그 뼈대를 이어갈 수 있었으나, 180만 마르크가 된 부채와 곧바로 강등을 경험한 뒤에는 2. 분데스리가 6위를 차지하고, 부실 재정을 근거로 DFB에 의해 프로 면허를 박탈당했습니다. 1979년 여름, 클럽이 향한 곳은 오버리가 노르트였습니다. 같은해, FC 장크트 파울리보다 한 계단 위에서 대회를 마친 베스트팔리아 헤르네도 2. 분데스리가에서 한 경기(1979년에 시작된 새 시즌 첫 경기)를 더 치르고는 오버리가 베스트팔렌으로 자취를 감췄습니다. 마찬가지로, 재정 기반이 약화해, 면허를 반납해야 했습니다. 1978-79 시즌을 2. 분데스리가 19위(뒤에서 둘째)로 마친 로트바이스 뤼덴샤이트가 그로부터 행운을 잡았습니다.

 

1981년 11월 14일, SpVgg 07 루트비히스부르크와 '오버리가 바덴뷔르템베르크' 경기를 앞두고 SSV 울름 1846 측에서 제작, 배포한 포스터.

 

 갈수록 커지는 분데스리가 클럽들과 격차도 주된 고민거리였습니다. 1963년에 분데스리가가 출범한 뒤, 2. 분데스리가가 문을 열기 전, 11년 동안, 23개 클럽이 그리로 올라섰고, 1978년 여름까지, 그중 최상위 대회에 '안착', 살아남은 클럽은 여섯이었습니다. 그런데, 지역 협회가 갖던 힘을 DFB에 집중하고 처음으로 세 바퀴를 돈 뒤에는 총 승격팀 아홉 중 둘만이 분데스리가에 잔류해, "생존율"이 소폭 감소했습니다. 심지어 네 개 클럽은 분데스리가의 여름과 겨울을 한 번씩밖에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를 지도하던 "전설적인" 우도 라테크(1935-2015)는 "(분데스리가로) 승격에는 거의, 그만한 가치가 없습니다."라고 극단화하는 차이를 에둘러 비판했습니다. 준비 기간부터 열심히 뛰어서 2. 분데스리가서 걸맞은 성과를 내도, 그다음에 대한 기대가 별로 없고, 심지어 일부 클럽 관계자는 승격 후에 빠르게 제자리로 돌아오는 편을 선호한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프로축구 차상위 대회에서는 기껏해야 총 38경기 중 열 번 정도가 "최고 수준"에 근접했습니다.

 결국, 경제적인 관점과 경쟁적인 관점에서 모두, 그 출범 취지에 어울리는 운영이 안 되던 2. 분데스리가에는 어떻게든 출구 전략이 필요했으니, 1980년, 일 년 뒤로 예고한 "대숙청"을 위해, DFB는 근 삼 년간의 성적과 재정적인 조사 결과를 근거로 각 클럽의 면허를 심사하겠다고 했습니다. 1973년, 아인트라흐트 브라운슈바이크 유니폼 전면에 예거마이스터, 상징적인 사슴 상징을 노출하는 조건으로 자금을 조달해, 독일 프로축구 사상 최초로 "유니폼 광고 후원"이라는 개념을 도입한 볼펜뷔텔의 귄터 마스트가 71만 마르크를 대어 준 1. FC 자아브뤼켄은 그 유명한 비터스를 홍보하며 열심히 달렸지만, 2. 분데스리가에 남을 권리를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억울한 사례는 이번에도 속출했습니다. SSV 울름 1846은 '항상' 제때 선수단 임금을 지급할 만큼, 재정이 안정됐다는 점을 강조했지만, 2. 분데스리가 쥐트 다섯째로 1980-81년을 마감한 이들은 두 대회 진영을 합쳐, 제일 높은 순위로 강등된 클럽으로 남고 말았습니다. "삼 개년의 성적" 평가에 밀린 탓입니다. 클럽 고위층은 자신들이 면허 발급 대상에서 제외되고, 12위, 보르마티아 보름스와 14위, SpVgg 퓌르트(아직, TSV 페스텐베르크스그로이트와 합병 전이라, "그로이터"는 클럽명에 포함되지 않았습니다; 둘은 1996년에 합쳤습니다)가 들어간 데 노골적으로 불쾌감을 표출했습니다. 재판장 입성까지 불사했지만, 프랑크푸르트 지방법원은 DFB 심사 절차가 적법했다고 판결했습니다.

 

1982년, 개편된 2. 분데스리가서 3위를 차지한 키커스 오펜바흐와 외나무다리 싸움에 나선 바이어 04 레버쿠젠은 등에 10번을 새긴 공격수, 페터 체히(1953-2014)의 결승 골로 "사상 첫 승강 플레이오프 승자"가 됐습니다. [ⓒ IMAGO]

 

 처음에는 프로 무대의 클럽 숫자가 절반 넘게 줄어들면, 400명가량 선수가 직장을 잃고, 특히, 젊은 선수들이 활동할 폭이 좁아진다는 우려가 거셌습니다. 이는 1977년, 뉴욕 코스모스와 계약한 "황제" 프란츠 베켄바우어(1945-2024)가 분데스리가에서 선수들이 받는 압박을 문제 삼고, 젊은 선수들의 새로운 세계에서 도전을 독려하던 시기와 일부 겹쳐, 현장을 동요하게 했습니다. 계획 강행이 확실해진 뒤로는 형평성 논란이 재차 불거졌습니다. 반발을 무릅쓰고 개혁을 단행하려면, 면허 발급 요건을 더욱 엄격하게 따져야 한다는 비판이었습니다. SC 프로이센 뮌스터와 테니스 보루시아 베를린, 로트바이스 오버하우젠 등, 오래된, 잘 알려진 클럽들이 개편 과정에서 탈락했는데, 경제적으로 비교적 안정돼 있던 VfR 뷔어슈타트는 이들과 함께 아래로 쫓겨났지만, 공공연히 부채 사실이 알려진 FC 샬케 04와 헤르타 BSC, 하노버 96, 키커스 오펜바흐 등, 인기 클럽 일부가 DFB로부터 차상위 대회 잔류를 약속받아, 다툼에 기름을 부었습니다.

 한편, 당해 여름에 분데스리가에서 강등된 TSV 1860 뮌헨도 2. 분데스리가 참가를 위한 DFB 면허 심사를 피해 가지는 못했습니다. 이들은 300만 마르크가 넘는 수준의, 엄청난 빚더미와 함께, 내려앉았습니다. 선수 일곱을 방출하고, 열넷의 후원자를 찾아, 134만 마르크를 마련하겠다고 공언했으나, 결국, 보너 SC, FC 장크트 파울리에 이어, (해당 시점까지) 사상 세 번째로 DFB에 의해 면허를 박탈당한 클럽으로 남고, 오버리가로 향했습니다. 분데스리가에서 경쟁하고 일 년 만에 프로 클럽으로서 지위를 상실하기는 함부르크의 클럽에 이은 둘째였습니다. 역설적으로, TSV 1860 뮌헨의 에리히 리들(1933-2018) 회장은 "함부르크가 뮌헨을, 베를린이 프랑크푸르트를 상대로 경기하면, 이 거대 도시의 클럽들이 바우나탈이나 바네아이켈 원정길에 오를 때와는 이야기가 달라집니다."라며, 초기에 "하나의 2. 분데스리가 모델"을 제시한 인물 중 하나입니다. 이해, 뮌헨 사자 군단의 실격으로부터는 SG 바텐샤이트 09이 혜택을 입었습니다.

 이전까지 2. 분데스리가 노르트와 2. 분데스리가 쥐트 각 우승팀이 자동 승격 권리를 얻고, 양쪽에서 우승 다음가는 등위를 차지한 팀끼리 겨뤄, "막차" 탑승자를 갈랐다면, 베를린에서 아헨까지, 또 오스나브뤼크에서 보름스까지, 지도상 구분이 사라진, 하나로 통합된 2. 분데스리가에서는 순위표 최상단의 두 클럽이 다음 연도 분데스리가 출전 자격을 획득했고, 세 번째 자리를 차지한 클럽은 상위 대회에서 순위표 열여섯째에 그친 클럽과 오르고 내림을 두고 벌이는 외나무다리 싸움에 진출했습니다. 이때부터, 오늘날처럼, 분데스리가 16위 클럽에 "마지막으로 힘을 써 볼 기회"가 주어지기 시작한 셈입니다. "하나의 2. 분데스리가" 첫 번째 해에는 FC 샬케 04와 헤르타 BSC가 각각 1·2위로 최상위 무대에 복귀했고, 키커스 오펜바흐가 그 뒤를 이어, 바이어 04 레버쿠젠과 대결했습니다. 헤센주의 클럽은 거기서 졌습니다.

 

대회 창설 50주년을 맞은 올해, 2. 분데스리가는 역대 최고로 치열한 "승격 다툼"을 예고합니다. [ⓒ Derbystar]

 

 1990년의 독일 재통일 이후, 18개 클럽 체제로 또 한 번 개편된 2. 분데스리가가 오늘까지 독일 프로축구 두 번째 대회로서 명성을 유지합니다. 열기는 언제나 뜨겁습니다. 1999-2000년, 처음으로 "평균 관중 만 명 시대"를 열어젖힌 2. 분데스리가는 지난 2016-17년, 평균 21,732명의 관중을 끌어들였습니다. 이는 그해, 프랑스 프로축구 최상위 무대인 리그 1 기록을 앞서고, 이탈리아 프로축구 최상위 무대인 세리에 A 기록과 맞먹습니다. 지난 시즌에는 무려, 평균 29,290명이 이 대회의 경기장을 찾아, 역대 기록을 경신하고, 관중 수를 기준으로 유럽 내 다섯째(분데스리가, 프리미어 리그, 세리에 A, 라리가, 2. 분데스리가 순)를 찍었습니다. 186,000명의 회원을 거느린 FC 샬케 04가 경기당 61,538명을 동원(당연히 역대 최고 기록)해 흥행에 앞장섰고, 함부르거 SV(55,960명)와 헤르타 BSC(50,898명)도 오만 명 이상을 모았습니다. 특히, 슈프레아테너의 안방에서 펼쳐진 헤르타 BSC와 FC 샬케 04의 후반기 대결에는 공식 집계 결과, 69,156명이 올림피아슈타디온 베를린에 입장했는데, 이는 같은 날, 스페인에서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와 FC 바르셀로나의 "빅뱅", 완다 메트로폴리타노를 찾은 68,253명을 뛰어넘어, 소셜 미디어에서 이목을 집중시켰습니다. 두 달 전, 2. 분데스리가 시즌 마지막 경기에는 총 284,643장의 입장권이 판매됐으며, 이는 261,099장의 표가 나간 분데스리가보다 2,000장 이상 많았습니다. "축구 하원"이 "축구 상원"을 압도하기는 역사상 처음이었습니다.

 올해는 그 어느 때보다 치열한 "승격 다툼"이 예고돼, 분위기가 한층 더 뜨거워질 전망입니다. 재정적인 어려움을 타개하기 위해서라도 꼭 승격해야 하는 헤르타 BSC가 크리스티안 피엘 감독을 선임하고 새로운 축구 철학을 입혀, 고지를 노리고, 데이비 젤케를 영입해, 슈테펜 바움가르트 감독에게 무기를 더해 준 함부르거 SV가 "올해는 진짜 다르다."라고 자신하며, 지난 시즌, 아쉽게 승강 플레이오프에서 좌절한 포르투나 뒤셀도르프도 심기일전합니다. 슈테펜 라이틀과 세 번째 계절을 맞는 하노버 96나, 크리스티안 아이히너의 칼스루어 SC, 루카스 크바스니오크의 SC 파더보른 07, 피엘이 떠난 자리에 미로슬라프 클로제를 앉혀서 화제성을 잡은 1. FC 뉘른베르크 등도 상위권을 위협할 후보로 분류되며, 전통의 FC 샬케 04는 언제나, 무시할 수 없습니다. 분데스리가에서 "최악의 수비력"을 선보이고 일 년 만에 2. 분데스리가로 돌아온 SV 다름슈타트 98가 명예 회복을 꾀하며, 1. FC 쾰른은 이적 시장에서 새로운 선수를 등록할 수 없는 징계의 어려움 속에서도 돌파구를 찾고, "곧바로 승격"을 노립니다.

 SV 베엔 비스바덴과 FC 한자 로스토크, VfL 오스나브뤼크가 3. 리가로 떨어지고, SSV 울름 1846, SC 프로이센 뮌스터, SSV 얀 레겐스부르크가 올라와, 이론적으로 2. 분데스리가는 더 많은 축구광을 관중석에 앉힐 수 있습니다. 최근 몇 년간 가속한 "전통 있는 클럽"의 분데스리가에서 실패, 강등으로 수용력이 폭발적으로 증가했고, 전국적으로 관심도가 높아졌습니다. 이대로라면, 지난 시즌에도 경기당 38,973명의 관중을 불러 모아, 유럽 최고의 자리를 지킨 분데스리가를 추월하기도 (당장 현실성은 떨어지나) 마냥 불가능하기만 한 꿈은 아닙니다. 준비 기간은 끝났습니다. 대회 출범 50주년을 기념하는 이 역사적인 해에 피라미드 꼭대기로 오르는 사다리를 탈 주인공은 누가 될지, 힘을 꽤 쓴다는 무리들이 달력의 서른한 번째 주말을 기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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