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11. 7. 22:00ㆍ#HaHoHe
지난 1월 16일 밤, 헤르타 BSC 상임위원회 회장, 카이 베른슈타인이 향년 43세로 타계(1980-2024)했습니다. 베를린 베스트엔트의 노파를 둘러싼 모든 관계자와 독일 축구계 전체가 행동가이자, 탐험가로 그려진 이의 갑작스러운 부고에 비통함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재정적인 광란의 몇 년을 보내면서 군데군데 깊이 병들어 버린 슈프레아테너는 안정과 회복의 미래를 가져다주겠다고 늘 평회원들과 가까이, 접근하기 쉬운 곳에 머물며 우렁찬 목소리로, 유창하고 당당하게, "베를린의 길(Berliner Weg)"을 제시, 선포하던 지도자를 잃었습니다. 추진력 있는 자기 열정으로 주변을 감염시키던 "풍운아"가 떠났으니, 자칫하면, 헤르타 BSC는 다시 방향을 잃고 표류의 시간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대다수가 자기 자리를 지키기에 급급했던 이 오랜, "자극에 과도하게 예민하고, 과열된" 클럽이라면, 그러고도 남았습니다.
위기의 순간, 방향타로 나서서 카이 베른슈타인의 유산, 베를린의 길을 지키고 가꾸어 나가겠다고 선언, 혼란을 최소화한 이가 파비안 드레셔입니다. 헤르타 BSC 상임위원회 부회장인 그는 곧바로 회장직을 승계하는 대신, 자기 자리에 남으면서 떠난 사람의 직무를 대리했습니다. 재정 면에서 "큰 산"을 마저 넘어야 하는 상황에 "전문 경영인"으로서 그의 역량을 의심, 공격하는 다른 후보들도 나오지만, 이달 17일, 클럽 총회 정기 선거에 드레셔는 완전한 회장으로 선출될 가능성이 (비교적) 큽니다. 이 슈판다우 출신 변호사는 올림피아슈타디온 베를린 오스트쿠어베(안방 응원단; 쿠어베)의 오랜 구성원으로, 팔 년 전부터 상임위원회 안에서 활동해 왔지만, 선수 출신 아닌 다수의 클럽 고위 관계자와 같이, 베르너 게겐바우어의 사퇴 이후 치러진 이 년 전의 보궐 선거에 지금 자리에 오르기까지, 조명을 독차지한 경험이 거의 없었습니다. "베른슈타인의 러닝메이트"에서 "베른슈타인의 후계자"로 신분 변화를 기다리는 그에게 지난달, <<11 프로인데>>가 마이크를 쥐였습니다.
파비안 드레셔 씨, 당신은 올 1월부터 2. 분데스리가 헤르타 BSC 상임위원회 회장 대행을 맡고 있고, 11월에는 첫 번째 정기 선거에 출마해요. 처음부터 그렇게 계획되지는 않았는데 말이죠?
전임자가 갑작스레 세상을 떠났으니, 누구도 회장이 되고 싶어 하지 않았습니다. 옳지 않은 일이라고 느껴졌고, 저도 잠시 머뭇거렸습니다. 하지만, 저는 카이 베른슈타인과 한 팀으로, 제가 그의 러닝메이트로 (지난 보궐 선거에) 경쟁했습니다. 저는 그 책임을 져야만 했습니다.
등 떠밀리듯 사무실을 맡게 됐을 때, 무얼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나요?
공동의 길을 계속 가고 싶었고, 구성원들과 소통하는 그의 방식도 이어가고 싶었습니다. 저는 대화에 열려 있고, 접근성 있기를 바랍니다. 그가 제게 가장 중요했고, 지금도 그러합니다.
2024년 1월 16일을 돌아봐요. 그날, 카이 베른슈타인 회장이 운명했어요. 돌아보면, 무엇이 제일 먼저 떠오르나요?
그 사실을 알게 된 순간. 저는 그를 절대로 잊을 수 없습니다. 저는 그날 아침, 변호사로서 일정을 소화하려고 법정에 나갔습니다. 평상시, 일정을 마치면, 휴대전화를 죽 확인하는데, 그날따라 고객에게 무언가를 자세히 설명해 주어야 했습니다. 지하철역 승강장에서야 휴대전화를 꺼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그 소식이 있었나요?
아닙니다. 잠금화면에 토마스 헤리히 전무이사에게 빨리 다시 전화하라는 변호사 사무실로부터 문자만 한 통 보였고, 그 밑으로 톰으로부터 걸려 온 부재중 전화 두 통이 있었습니다. 무언가 일이 벌어졌음에 틀림없다고 직감했습니다. 특히, 보통은 톰이 제게만 연락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벌써 메슥거리는 속을 안고 그에게 전화했습니다. 톰이 제게 카이의 죽음에 관해 말했을 때, 저는 거기 주저앉아, 그 사실을 믿을 수 없었습니다. 이후로 모든 약속을 취소하고 클럽 사무실까지 차를 몰았습니다. 회원들과 팬들이 계속 찾아와, 저녁이 되기까지 우리는 함께 애도했습니다. 단, 그다음 며칠은 당연히, 정리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았습니다.
축구계 온 시선이 헤르타 BSC를 향했어요.
클럽에서 우리는 단순히 로봇처럼 제 기능을 다하고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슬픔이 그 전부를 가렸습니다. 저는 (일에) 감정을 허용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헤르타 BSC 일원으로서 우리가 함께 애도하기가 더 중요했습니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카이의 죽음이 얼마나 감정적으로 다가갔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그즈음, 감동적인 순간이 참 많았죠?
저는 포르투나 뒤셀도르프와 올림피아슈타디온 베를린에서 경기(1월 21일) 전의 추모 행렬이 특히 인상적이었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거기 함께했는지. 분명, 대다수가 그를 개인적으로 알지 못했을 텐데도, 그들은 거기 있었습니다. 이는 그가 그들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무엇을 주었는지 보여 줍니다. 그 슬픈 공감이 우리 모두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당신은 카이 베른슈타인 회장을 어떻게 그리시나요?
그는 재임 기간, 헤르타 BSC 전체를 아울렀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모두에게 자신이 그 한 명 한 명을 보호해 줄 수 있다는 믿음을 주고 싶어 했습니다. 그는 늘 그가 그 일을 자기 통제로 두었고, 어떠한 폭풍우가 닥치더라도 그들을 위해, 그들이 필요로 하는 곳에 있어 줄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엄청난 힘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는 예를 들어, 베르너 게겐바우어와는 물론, 프로 축구 업계의 수많은 동료와 회장의 역할을 완전히 다르게 해석했다고 하더라고요. 정관에 따라서 자기 핵심 업무가 아닌 문제까지도 처리했다고요?
그의 존재감은 대단했습니다. 맞습니다. 그는 월요일을 제외하고는 매일 클럽 사무실을 찾았고, 상임위원회 사무실을 차렸고, 자기 사업을 제쳐두었습니다. 이전에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그 덕분에 상임위원 전부가 클럽과 더 가까워졌습니다. 카이는 클럽을 새롭게 하고 모범을 보였으며, 그를 언제나 올바른 방향으로 끌고 가기를 원했습니다.
일상적인 업무는 사실, 아웃소싱 경기 운영 KGaA의 영역이죠?
카이가 늘 존중해 온 자체 경영진이 있습니다. 그러나 기본적인 생각은 맞습니다. 회원들에 의해 선출된 클럽의 수장은 클럽을 책임감 있게 이끌고 협력해야 합니다.
베른슈타인의 작업은 오늘, 클럽을 휩쓰는 도시로부터 새로운 호의의 물결에 크게 이바지했다고 간주해요?
그와 가까운 사람으로서 저는 거기 객관적으로 답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저는 사람들이 두 번째 대회 수준에도 경기장에 가기를 즐기고, 선수단을 향해 인내심을 가지며, 실패를 용서하는 하나의 핵심적인 이유가 카이 베른슈타인과 그가 일관성 있게 걸어온 길 때문이라고 주장합니다.
자주 인용되는 "베를린의 길" 말이죠?
"쿠어베의 자식"으로서 카이는 헤르타 BSC 팬들의 열망과 요구를 인지했습니다. 그는 우리가 그 무엇보다 하나의 클럽이며, 연예 회사가 아니라고 분명하게 말했습니다. 클럽에서는 회원들이 '특히' 중요합니다. 그는 그들에게 헤르타 BSC 일부나마 돌려주었습니다.
베른슈타인의 당선은 이미 그 총회에서부터 큰 소리로 열광을 받았어요.
우리가 무언가를 원하면, 우리가 함께 그를 이루어 낼 수 있다는 신조 아래, 클럽에 새로운 활력이 넘쳤습니다. 그 이후로 무엇보다 팬들이 주체적으로 이끌어서 여자축구팀과 그 청소년 부서가 출범했고, 그 없이는 진작에 와해했을, 우리만의 경기장이라는 꿈을 위해 주도권을 갖고 꼼꼼하게 일하는 "블라우바이세스 슈타디온(Blau-weißes Stadion)"이 추진했습니다.
선거가 끝나고 클럽은 어려운 상황과 직면했어요. 헤르타 BSC는 강등됐고, 오래된 부채로 인해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었어요. 혁명가에게는 꽤 많은 현실 정치가 있었죠?
카이는 현실주의자였고, 자기 이상에 어긋나더라도 늘 클럽에 최선의 이익이 되는 행동을 했습니다. 예를 들어, 투자자 777 파트너스의 인수 시점에 더 많은 KGaA 주식을 매각했습니다. 회장 후보로서 그는 중기적으로 도박 업체와 완전한 결별을 희망한다고 강조했는데, CrazyBuzzer와 후원 계약을 맺기도 했습니다. 소통이 언제나 핵심이었습니다. 그는 회원들에게 즉시, 투명하게 내용을 전달했습니다. 777 파트너스에 매각하지 않으면, 우리는 문을 닫아야 할 수도 있다고. CrazyBuzzer와 계약하지 않으면, 사무실에서 더 많은 직원을 정리 해고해야 한다고.
당신과 카이 베른슈타인이 어려서부터 친구는 아니고, 헤르타 BSC를 통해서 처음 사귀었죠?
우리는 쿠어베에서 서로를 알았습니다. 카이는 잘 알려졌듯이 앞에서 노래하는 가수였고, 저는 제가 속한 팬클럽과 조금 더 위쪽에 있었습니다. 다만, 저는 "울트라(Ultra; 광적인 지지자)"는 아니었고, 평범한 한 명의 팬이었습니다. 돌이켜보면, 저는 에움길로만 헤르타 BSC를 찾은 듯합니다.
그러면, 당신은 원래 블라우바이스 90 베를린(역주: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에 UEFA 챔피언스 리그 우승을 안긴 골로 유명한 칼하인츠 리들레가 경력 초기에 몸담았던 베를린 마린도르프의 클럽으로, 한때 분데스리가에서 경쟁했고, 헤르타 BSC와 같은 주체로부터 재정 지원을 받기도 했으나, 1992년에 파산했습니다.)의 팬이었나요?
아, 제발… 저는 1990 FIFA 월드컵 당시, 제 마음을 축구에 빼앗겼고, 슈판다우의 우리 공동 마당에서 경기를 봤습니다. 어른들이 큰 진공관 텔레비전을 마당으로 끌고 나갔고, 우리는 안디 브레메(1960-2024), 토토 스킬라치(1964-2024) 등을 봤습니다. 저는 그 직후에 토이토니아 슈판다우 9세 이하 팀에 들어갔는데, 저는 "인상적으로" 운동을 못하는 아이였고, 기본적으로 그렇게 많이 달리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웃음).
90년대에는 헤르타 BSC가 어린 축구광들이 제일 좋아하는 클럽이 아니었죠.
학교에 가도 FC 바이에른 뮌헨이나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이야기만 있었고, 헤르타 BSC는 두 번째 대회에서 뛰었습니다. 저는 이전에 늘 도이칠란트할레(역주: 1935년, 베를린 베스트엔트에 아돌프 히틀러가 지은 경기장, 다목적 공간으로, 1995년에 상징물로서 그 지위를 인정받았지만, 2009년에 폐쇄됐고, 그로부터 이 년 뒤인 2011년에 결국, 철거됐습니다.)에서 열렸던 전설적인 대회를 통해서 처음으로 클럽을 접했습니다. 헤르타프뢰셰(역주: 한때 높은 폭력성과 극우주의 따위로 악명이 자자했던 헤르타 BSC 지지자 조직으로, 훨씬 더 광적인 울트라스의 시대가 열린 뒤로는 영향력이 떨어졌으며, 현재는 공식적으로 해산했습니다.)가 상단에서 엄청난 소음을 만들어 냈으니, 저는 거기 압도됐고, 깨달았습니다. 축구는 여기, 우리와도 함께 있으므로 도르트문트에 가지 않아도 된다고. 거기서 아버지께서 제게 첫 번째 헤르타 BSC 목도리를 사 주시기도 했습니다. 아직도 그를 갖고 있습니다.
첫 경기장 방문은요?
1. FC 뉘른베르크 상대, 1995-96 시즌, 0 대 1 패배입니다. 최근에 다시 표를 찾았습니다. Hundert,6(역주: 영화제작자인 울리히 샤모니 등이 설립한 베를린 최초의 사설 라디오 중 하나입니다. 2000년대 중반에 파산 위기를 겪었습니다.)가 후원한 특별한 경기였습니다. 꽤 유명한 가수들이 초청됐습니다. 윗대를 위해서는 엑스트라브라이트(역주: 80년대에 상업적인 성공을 거둔 밴드로, 펑크와 뉴 웨이브의 독일어 하위 변형인 노이에 도이체 벨레의 대표입니다.)나 웨스턴 유니온(역주: 베를린과 브란덴부르크주를 기반으로 활동한 컨트리 음악과 슐라거 음악 밴드로, 1967년에 결성했습니다.), 젊은 세대를 위해서는 Mr. 프레지던트(역주: 1991년부터 활동한 유로댄스 그룹으로, 그 장르에서 손에 꼽히는 성공을 거두었습니다.)와 DJ 보보. 제게는 대단한 명단이라, 아버지께서 우리 표를 사실 때까지 저는 당신을 귀찮게 했습니다. 그즈음, UFA가 클럽 후원사로 들어왔고, 선수단이 강화하여, 이듬해 승격으로 이어졌습니다. 승격한 해에 저도 정기적으로 경기장을 찾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시즌권을 소유했습니다.
그때는 관심의 중심이 명확했나요?
슈판다우의 아이스카페 플로리다(Eiscafé Florida)에서 학업 이외 일을 하면서 헤르타 BSC 경기와 겹치지 않도록, 늘 교대 근무를 조정했습니다. 더는 일상에 도움이 되지 않는대도, 저는 아직도 눈 감고도 슈파게티아이스를 만들 수 있습니다. 몇 시간 지나서 팔이 아프지 않도록 아이스크림을 퍼 담는 방법도 압니다.
아, 그렇다면, 한 번 알려주세요.
국자를 따뜻한 물에 담그고 두드린 다음, 용기 가장자리를 따라서 잡아끄는데, 특히 카시사(Cassis)나 패션 프루트처럼 단단한 아이스크림 종류는 가운데서 뜰 수 없습니다 (Da kannst du nicht in die Mitte rein).
좋은 전환이에요. 헤르타 BSC "고위 관계자"로서 당신도 곧바로 중심에 서지는 않았어요 (Bei Hertha sind Sie als Funktionär auch nicht direkt in die Mitte rein).
아닙니다 (Nein). 제 직업과 팬들 덕에 그렇게 됐습니다. 변호사 자격을 취득하고 2012년, 신설된, 사법 문제를 겪는 팬을 돕는 부서(Fanhilfe) 책임자들로부터 경기가 있는 날에 지지자의 권리를 보호하는 데 변호사로서 도움을 줄 수 있는지 문의받았습니다. 예를 들어서, 누군가 경기장 경비실에 잡혀오면, 제가 도와야 했습니다. 당시에는 때때로 의심을 사서 경비실에 끌려와, 밤 11시까지 붙들려 있기도 했습니다. 일 년 뒤에 클럽 법무 부서 선거가 있었는데, 한 자리가 비었습니다. 제가 후보로 세워졌고, 당선됐습니다.
2016년에는 상임위원회로 걸음이 이어졌어요.
클럽 법무 부서 선거와 비슷했습니다. 한 자리가 비었고, 그때까지 회원들 중심에서 나온 대표자가 위원회에 한 명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다른 많은 회원, 팬과 대화 끝에 후보로 세워졌습니다. 돌아보면, 카이가 회장이 되기 전까지, 특히 팬, 회원과 관련된 주제에 있어서는 제 영향력이 모자랐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어째서요?
위원회 내에서 제 의견은 분명히 중시됐습니다. 다만, 2018년 도르트문트 방문 경기 이후처럼, 이미 아이가 우물에 빠져 버린 뒤(소를 잃은 뒤)에야 그런 경우가 종종 있었습니다. 당시, 거대한 울트라 집단이 그 열다섯 번째 생일을 축하하고 있었는데, 응원석에서 그들과 경찰이 충돌했습니다. 이후에 클럽 측은 팬들과 대화하지 않았고, 갈등에 대한 그들의 의견을 듣지 않았습니다. 대신, 그다음 경기에는 걸개가 금지된다고 서둘러서 발표했습니다. 품위 있는 팬들은 그를 이내 이해하리라는 기본 태도로.
그와는 달리, 일주일 뒤에 열린 RB 라이프치히와 안방에서 경기에는 오스트쿠어베에 적막감이 감돌았죠?
저는 그 주 내내, 이런 형태의 집단 처벌은 말이 안 된다고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하지만, 그 경기가 끝난 뒤에야 그에 대한 제대로 된 깨달음, 인식이 있었습니다. 갑자기 "음… 어쩌면, 당신이 옳은지도 몰라요."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 시즌, 경기 시작 전에 "Nur nach Hause" 응원가가 돌연히, 더는 들려오지 않았습니다. 상임위원회는 당시 KGaA 경영진이 결정한 사안에 대하여 아무런 발언권이 없었습니다. 비록 그가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감이 모든 헤르타 BSC 지지자에게 분명해 보일지라도.
오늘 헤르타 BSC는 회원, 팬과 소통에 있어서 모범적인 사례로 여겨져요. 어떻게 실망감을 주지 않고 그 많은 회원과 대화할 수 있나요?
예를 들어, 상임위원회 우편함이 있습니다. 누군가 우리에게 문의하고, 그 내용 중 모욕이 없다면, 우리가 답합니다. 또는 저는 주로 경기가 있는 날을 활용합니다. 대중교통을 이용해서 경기장에 가고, 경기 시작 전에 못해도 45분간 바깥에 있으면서, 자리로 가기 전,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눕니다.
헤르타 BSC의 새로운 성격은 프로팀으로 높은 투과성을 지닌 훌륭한 유소년 육성, 회원들과 투명한 소통, 그리고 팬들과 더욱 좁혀진 거리를 갖습니다. 우리가 무언가 빠뜨렸나요?
우리가 스포츠와 경제 면에서 야심적이라는 점. 우리는 우리 가능성과 필요한 고요함, 평화를 최대한 활용하려고 합니다. 몇 년을 두 번째 대회에서 보내기가 우리 목표일 수 없습니다. 우리는 (분데스리가로) 올라가야 하지만, 베를린의 길로, 가랑이 찢어지지 않게, 그렇게 해야 합니다. 승격에는 대안이 없다는 점을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앞뒤 잘린 톰 헤리히의 발언이 몇 주간, 여기저기서 인용됐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극적이지는 않습니다. 무엇보다 우리는 건강하고 지속 가능한 방식으로 행동해야 합니다.
11월 중순에 "임시회장" 파비안 드레셔가 "완전한 회장"이 될 수 있어요. 당신은 회장이 되기를 원한 적이 없는데도 그 선거에 나왔죠. 앞으로 몇 년간의 목표는 세우시겠나요?
몇 년 안에 클럽은 외부 자본에 의존하지 않고도 자체 운영될 수 있어야 합니다. 즉, 헤르타 BSC는 그때까지, 우리가 면허 심사마다 깊이 숨을 들이마시지 않아도 되는, 그런 방식으로 재활합니다. 또, 스포츠 관점에서 과제는 분명합니다. 우리는 "가까운 미래"에 다시금 견고한 분데스리가 클럽이 돼야 합니다.
Köster, P., & Dinkelaker, M. (2024, October 22). "Wir kommen nicht vom Weg ab". 11 Freunde, 276, 5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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